김승연 한화 회장, ‘의리’의 역사 ① [옛날신문보기]
창업주 김종희 회장 이어 1981년 한화 총수로 ‘햇병아리’ 평가 M&A·전문화 전략으로 타개 ‘빅딜’마다 외친 고용승계 원칙…‘의리 경영’ 평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권현정 기자]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달 29일 영면에 들었다. 창업 2세 경영인의 부고 소식으로 재계 안팎에서 한 세대가 저물어가는 데 대한 헛헛한 실감이 돈다. 그룹의 새로운 얼굴로 나선 3세들의 어깨도 무거워지고 있다. 선대의 일대에서 공과 과를 살필 때겠다. <편집자주>
최근 한화의 노사 관계는 끓어넘치기 직전이다.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노동자들은 한화그룹 노조와 연대해 △약속했던 상생협약 이행 △하청노조 대상 손배소 건 해결 등을 외치며 공동·상경투쟁을 진행하고 있고, 한화생명금융서비스와 소속 설계사 노동자 간 임단협은 해를 넘겨 장기 공회전 중이다.
지난 40여 년 한화가 ‘신뢰와 의리 경영’의 대명사로 불렸던 것을 고려하면 의아한 일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구조조정 칼바람이 불었던 IMF 시기에도 ‘고용승계’를 원칙 삼아 노사분규를 최소화하는 등 인력관리에서 강점을 보인 경영인으로 평가받아 왔다.
‘온실 속 화초’ 냉소 속 시작한 경영…‘성공적 2세 경영인’ 반전
김승연 회장이 한화(당시 한국화약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건 지난 1981년. 선대이자 창업주 김종희 회장의 별세로 진행된 승계였다. 당시 김승연 회장은 만 29세로, 직전년도부터 그룹관리본부장(부회장)직 수행을 통해 사실상 회장 직무 수습 기간을 밟는 중이었다.
당시 김승연 회장에 대한 재계의 평가는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창업주 2세’로 총수에 오른 30대 회장단(쌍용 김석원 회장, 동부 김준기 회장, 동아 최원석 회장 등)과 함께 묶여 ‘온실 속 화초’ 취급을 받은 탓이다.
지난주 한국화약 그룹의 2대 회장으로 선임된 김승연 씨도 31세의 젊은 총수.고 김종희 회장의 장남인 신임 김 회장은 지난달 30일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자 곧장 태평양 건설 등 18개 계열기업의 상반기 영업실적을 보고받는 등 회장업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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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2세 그룹 총수들은 그러나 온갖 어려움을 겪고 재벌의 성을 이룩한 창업 1세와는 달리 온실에서만 자라 거대한 기업군을 이끌어 갈 경륜과 인간관계 등에 상당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1981년 8월 4일자 <조선일보> 30대 재벌 그룹 총수 많아져
김 회장이 이 같은 우려에서 벗어난 것은 공격적인 인수합병(M&A) 전략으로 사세를 빠르게 키우면서다.
김 회장은 취임 2년 차를 맞은 1982년부터 한양화약(현 한화솔루션 케미칼 부문),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 정아그룹 등을 연이어 사들이며 그룹의 몸집을 불렸다. 동시에 주력 사업으로 방산과 함께 석유화학을 내세우면서 그룹 이미지 변신도 꾀했다.
1987년부터는 기존 22개 계열사를 14개사로 줄이고 분산돼 있던 계열사를 사업부문별로 통합하는 등 전문화 전략을 구사했다.
성공적이었다. 한화는 매출액과 국내 그룹 순위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뒀고, 김 회장에 대한 평가 역시 ‘선대 못지않은 후대’로 천천히 반전됐다.
계열전문화로 그룹의 업종은 △종합화학(에너지 포함) △방산 △기계 △금융 △레저 △유통 등으로 압축되게 된다. 한 마디로 중화학과 소비재의 투톱 시스템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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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화학 부문을 크게 키울 계획인데, 특히 석유화학 최대 프로젝트인 나프타분해 사업 진출에 전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화약그룹의 이번 결단은 문어발 확장 일변도의 재계 풍토에 좋은 선례로 평가되고 있다.
1987년 2월 6일자 <매일경제> 내실강화로 ‘세계 속 웅비’ 추진
지난 81년 선친인 김종희 회장의 별세와 함께 29세의 나이로 그룹총수의 자리를 맡았던 김승연 한국화약그룹회장(39)이 1일로 취임 10주년을 맞았다.
‘어린 나이에 대그룹을 제대로 이끌 수 있겠느냐’는 재계의 우려와 달리 김 회장은 취임 초 15개 계열사에 매출액 1조6백 억 원이었던 사세를 현재는 26개 계열사에 매출액 3조3천억 원(작년 말 기준)의 대그룹으로 성장시켰고, 최근 들어서는 경향신문까지 인수, 성공적인 2세 경영인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 재계의 평.
1991년 8월 1일자 <동아일보> 김승연 회장 취임 10돌
물론, 김승연 회장 개인에게 평탄하기만 한 시기는 아니었다. 1994년 김 회장은 6개월간 국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직전년도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까지 된 데 따른 것이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는 남동생인 김호연 빙그레 회장(1992년 당시 전 한양유통 사장)과 선대의 상속재산을 두고 법정다툼을 벌였다. 1996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공판에서 김승연 회장으로부터 70억 원의 뇌물을 받았다고 진술하면서 입길에 오른 일도 있었다.
의욕적으로 출범했던 한화종합금융(전 삼희투자금융)이 인수 전 최대주주였던 박의송 씨와의 경영권 분쟁 등으로 고꾸라지는 등 경영 면에서 부침을 겪기도 했다.
다만, 김 회장이 키를 잡은 ‘화약호’는 장기간 순항했다. 동양전자통신과 골든벨 상사 그리고 덕산토건 등을 잇따라 인수, 신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히면서 성장하는 시기였단 평이다.
한화그룹 계열 종합화학업체인 (주)한화가 덕산토건을 내년 1월 1일자로 흡수합병하기로 이사회에서 결의하고 31일 증권감독원에 합병 신고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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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측은 신규 진출한 건설업 분야를 조기 정상화하기 위해 시공 경험이 많은 덕산토건을 흡수합병하기로 한 것이며 덕산토건 쪽에서도 합병 제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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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한화와 덕산토건의 합병비율은 1대 1.2이며, 이번 합병으로 (주)한화의 자본금은 1천2백11억 원에서 1천2백73억 원으로 늘어난다.
1995년 8월 1일자 <조선일보> 한화, 덕산토건 합병키로
1997년 IMF 칼바람…구조조정·고용승계 ‘두 마리 토끼’ 잡으며 타개
이처럼 발 빠른 투자에 집중하던 한화는 1997년 IMF발(發) 외환위기를 거치며 전략을 되돌아보는 시기를 거친다.
내수와 대출시장이 모두 얼어붙은 상황에 1997년 말 당시 한화는 1200% 수준 부채비율이라는 뼈아픈 성적을 거두는 등 부침을 겪었다.
이때 김 회장의 선택은 선제적 구조조정이었다. 한화는 1997년 말 32개였던 계열사를 2000년에 24개까지 줄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같은 시기 한화는 부채비율을 130%대까지 낮췄다.
IMF 체제 이후 한화는 국내 기업 중 가장 발 빠르게 구조조정에 나선 기업 중 하나다.
지난해 12월 흑자계열사인 한화바스프우레탄을 합작선인 독일 바스프사에 매각한 것을 신호탄으로 △한화투자신탁-미국 얼라이언스사와 합작 △한화NSK정밀-일본정공에 매각 등 불과 한 달 사이 3건의 계열사 매각 및 합작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표현대로 ‘혁명적’인 구조조정 플랜의 서막에 불과하다. 한화에너지 매각이라는 ‘빅딜’을 비롯 해외석유업체와 한화종합화학의 합작, 2천2백억 원 상당의 한화유통 잠실부지 매각, 한화개발의 마포호텔 부지매각과 같은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1998년 1월 23일자 <한국경제> [기업 IMF파고 넘는다] (8) ‘한화’…‘내실경영’
‘책임 경영’ 측면에서도 성과를 거두면서 ‘구조조정의 마법사’에 ‘의리 경영’이라는 수사가 더해지기도 했다.
당시 한화는 한화기계 베어링사업, 한화자동차부품 등을 외국자본(독일 FAG, 캐나다 테스마)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고용승계를 원칙 삼았고, 그 결과 다수 인원의 고용승계에 실제 성공했다.
베어링 사업부 소속 임직원 1550명은 전원이, 한화자동차부품 임직원 중엔 194명이 인수사에 고용됐다. 김 회장은 바스프우레탄, 한화NSK정밀 등 계열사 매각 시에도 고용승계 원칙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성과를 거뒀다.
1999년 대림산업과 한화종합화학 간 사업부문 통합 및 맞교환, 한화에너지·한화에너지프라자 매각 등 ‘빅딜’에서도 이 같은 원칙은 빛났다. 대부분의 고용이 신설·통합·인수사로 승계된 것.
대림산업과의 빅딜에선 양사 임직원 전원의 고용이 유지됐고, 한화에너지 706명과 한화에너지프라자 546명의 고용이 인수사인 현대정유(현 HD현대오일뱅크)로 완전 승계됐다.
현대의 한화에너지 정유부문 인수 협상이 1일 밤 타결됐다. 양사는 2일 본 계약을 체결키로 했으며 현대정유는 곧바로 한화에너지에 대한 실사에 돌입, 늦어도 오는 5월 말 이전에 인수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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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에너지 정유부문 및 한화에너지프라자 근로자들의 고용은 전원 현대측에 승계된다.
1999년 4월 2일자 <서울경제> [현대정유] 한화에너지 인수협상 타결
빅딜에서 의리가 빛을 발하긴 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해고된 인원은 적지 않았다. 1997년 11월 25일 ‘한화 대대적 구조조정’ 제하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1997년 한 해에만 한화의 임원 30%(100명)와 직원 8%(1500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김 회장 역시 이 점에 대한 안타까움을 ‘마취없이 폐를 잘라내는 심정’ 등 노골적인 표현으로 여러 차례 전한 바 있다.
이 때의 뼈아픈 후회 이후, 김 회장의 원칙은 더 강하게, 오래 이어졌다. 2012년 독일 태양광 기업 큐셀 인수(현 한화솔루션 큐셀 부문), 2014년부터 2021년까지 6년에 걸친 삼성과의 방산·화학 부문 4개사 빅딜까지 김 회장은 고용승계 원칙을 고수했다.
물론, 한화-삼성 건의 경우 인수 과정 내 세금 탈루 혐의가 제기되는 등 잡음을 남겼고, 당시 피인수사였던 삼성 계열사 노동자들이 매각을 반대하며 파업에 나서는 등 고용승계 과정이 전만큼 매끄럽진 않았다.
그럼에도 ‘고용승계 100%’ 원칙 아래 피인수사 노동자 대상 위로금 지급 등을 통해 M&A는 무사히 마무리됐고, 이웃사의 비주력 사업이면서 자사의 주력사업을 인수한, 한화의 입장에선 ‘이기는’ 거래였단 게 현재까지의 평이다.
‘실형 이른’ 過에도 ‘의리 원칙’ 功 여전…막 오른 3세 경영, ‘원칙’ 이어갈까?
공(功)이 있으면 과(過)도 있다고 했던가. 김승연 회장 역시 과오가 없진 않다. 2007년엔 보복 폭행 사건으로 시민들의 입방아에 연일 올랐고, 2012년 부실 차명회사 불법 지원 등 혐의가 드러나 실형(집행유예)을 받기도 했다.
이에 따라 경영이 제약되면서 지난 2014년 한화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계열사에서 보수를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취업제한 규정 위반 여부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다만, 과를 범했을지언정 ‘의리경영’이라는 그의 경영철학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굳건해 보였던 ‘의리’가 최근 들어 휘청이는 것처럼 보이는 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화가 10여 년에 걸쳐 눈독을 들이다 지난해 마침내 인수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의 경우, 인수 과정에서 한화가 자랑해 온 고용승계 보장 원칙이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 끝에야 합의안에 겨우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조선업은 업의 특성상 대부분의 작업을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가 담당하는데, 하청업체 폐업에 따라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에 대해 고용보장을 하겠다고 약속하고선 이를 이행하지 않다가 노조가 요구하자 다시 논의하기로 했던 것.
전신인 대우조선이 단체교섭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에게 제기한 업무방해 혐의 손배소는 한화오션 출범 후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업무방해, 재물손괴 등 혐의로 형사재판도 진행 중이다.
한화의 육해공을 아우르는 인수전 및 관련사 경영은 이제 김동관 부회장으로 키가 넘어가고 있다. ‘의리의 한화’. 40여 년 역사의 그 명성은 다음 40여 년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