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탈당과 유일한 낙선’…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① [대통령 회고史]

1952년 경찰·폭력조직이 국회 둘러싼 가운데 발췌개헌 강행 사사오입 개헌 통해 초대 대통령 한정 중임 제한 규정 미적용 DJ “자유당 부정 행태 갈수록 대담해져”…민심, 자유당 돌아서

2024-07-03     김자영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민주화된 지 40여 년이 돼가는 지금도 정치권에선 ‘독재’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대한민국 정치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본다.

<시사오늘>은 현대 정치사 주요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대통령이 본 정치史’를 내보인 바 있다. 1960년~2000년대 초반의 굵직한 정치 사건들을 지난 역대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의 입을 빌려 살펴봤다. 대통령 회고사2, 첫 번째 주제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서 발생한 3·15 부정선거다.  <편집자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그를 둘러싼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건국의 아버지 또는 장기 집권을 시도한 독재자. 여러 평가 가운데 3·15 부정선거가 이승만의 ‘과(過)’라는 데 큰 이견이 없다. <시사오늘>은 대통령 회고사를 통해 1960년대를 몸으로 지나쳐온 역대 대통령들의 평가를 살펴봤다. 

1987년 헌법 전문엔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김영삼·김대중·노태우, 세 전직 대통령의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특히나 김영삼(YS)과 김대중(DJ)은 1950년대부터 집권 여당인 자유당의 반대편에서 이승만의 장기 집권 시도를 반대했다. ‘4·19 민주이념’에 숨겨진 의미를 알기 위해선 1950년대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4·19 혁명은 단순히 3·15 부정선거라는 사건 하나로 촉발했다기보다 자유당의 부정한 정치 행태가 12년 동안 누적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이승만은 1948년 취임 이후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법과 제도를 바꿔가며 권력을 놓지 않았다.

 

이승만, 희박한 재집권 가능성에 ‘발췌 개헌’ 강행
김대중, ‘부산 정치 파동’ 충격에 정치 입문 결심


이승만

제헌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는 4년, 한 번의 중임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번에 걸친 개헌(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이 있어서였다. 

우선 1952년 ‘발췌 개헌’이다. 제헌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게 돼 있었는데, 1952년 헌법에서 국민들의 ‘직접선거’ 방식으로 바뀌었다. 

자유당이 1950년 총선에서 고전함에 따라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재집권이 어려울 것으로 본 이승만은 2대 대선을 앞두고 ‘직선제 개헌’을 꺼내 들었다. 2대 국회는 친이승만계 후보들이 대거 탈락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무소속 의원들이 60% 이상을 차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첫 번째 직선제 개헌안 시도는 1952년 1월 부결됐다. 

1952년

이후 발생한 사건이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이다. 1952년 5월 25일,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다음날 야당 의원들을 강제로 연행해 일부 의원에게 국제공산주의와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 1952년 7월 여당이 주장한 대통령 직선제, 양원제 개헌안과 야당이 주장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췌해 마련한, 이른바 ‘발췌 개헌’이 국회를 통과했다. 경찰과 폭력조직이 국회의사당을 둘러싼 와중에 이뤄진 표결이었다. 그해 8월 이승만은 74.61% 득표율로 대한민국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부산정치파동’은 한국전쟁과 함께 김대중의 정치 입문을 결심하게 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DJ는 후에 회고록에 “국민의 대표들이 독재자에 의해, 또 독재자를 위해 간단하게 굴복하거나 변절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이듬해인 1952년 5월 26일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다. 북한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었고 전선에서는 5월의 신록 같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 있었건만 임시 수도 부산에서는 치졸한 작태가 벌어졌다. 정치 파동은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의원들이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뽑았고, 이승만 대통령 임기는 1952년 7월이면 끝이 났다. 따라서 이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이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접 선거로 바꾸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하고, 의원들을 포섭해야 했다. 이 대통령은 자유당을 새로 만들었다. 이에 맞서 야당 측은 대통령 중심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꿔 총리가 국정의 책임을 지도록 하려 했다.

이런 기류를 감지한 이 대통령 지지 세력은 대통령 직접선거를 촉구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폭력조직과 우익단체들이 배후에서 이를 조종했다. 그리고 국민의 뜻이라며 폭력배를 동원해 의사당을 포위했다. 마침내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체포했다. 야당 의원들에게는 국제공산당원이라는 올가미를 씌웠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국무총리였던 장택상 씨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대통령은 직접선거, 국회는 이원제로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발췌개헌이라 불리는 타협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야당 의원을 국회로 강제 연행했다. 구금 중인 의원들도 일단 석방한 후에 다시 의사당에 연금시켜 정족수를 채웠다. 이렇게 경찰과 폭력배가 의사당을 겹겹이 에워싼 채 대통령 직선제와 국회 이원제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중략)

국민의 뜻이 아닌데도 독재 정권은 민의를 도용해 국회를 무력화시키고 헌법을 멋대로 고쳤다. 나는 국민을 섬기는 참다운 민주주의가 아니면 국민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정치가 제자리를 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나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 김대중 자서전, 89~91쪽. 

 

김영삼, ‘사사오입 개헌’ 반발해 자유당 탈당


1954년

자유당은 1954년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승만의 3선 길을 트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발췌개헌’에 이은 또 한 번의 개헌 시도였다. 3대 국회에선 자유당이 203석 중 114석으로 과반을 차지했다. 당시 DJ는 목포에서 5위로 낙선하고, 김영삼은 만 26세 최연소 나이로 경남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YS가 얼마 안 가 자유당을 탈당하는데, ‘사사오입 개헌’이 그 원인이었다. 

1954년 11월 29일 시행된 헌법엔 “헌법 공포 당시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헌법55조 내용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곧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뜻이었다. 

개헌을 위해선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136명)의 찬성이 필요했다. 정부 여당은 자유당 의원 114명 외에도 22명의 지지를 더 필요로 했다. 

정부 여당의 행태를 지켜보던 젊은 초선 의원 김영삼은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1954년 9월 초순경, YS는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박사님, 삼선개헌을 해선 안 됩니다. 삼선개헌만 안 하면 박사님은 위대한 국부로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겁니다”라는 직언을 한다. 

이어 자유당 내 개헌 반대파 의원을 모아 개헌반대운동을 하게 된다. 다음은 ‘사사오입 개헌’ 과정을 설명한 김영삼 전 대통령 회고록 일부다. 

“1954년 11월 27일,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숱한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표결에 부쳐졌다. 개표 결과는 총투표 202표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6표, 무효 1표로 부결됐다. 개헌안이 부결되자 나는 현석호, 민관식 의원 등과 함께 그날 밤 술집에서 자축연까지 가졌다. (중략) 

그러나 부결로 선포된 개헌안은 하룻밤 사이에 가결로 둔갑하고 말았다. 다음날인 1954년 11월 28일, 최순주 부의장이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0.333은 한 사람이 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해서 결국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 타당하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고 나선 것이다. 

개헌안이 사사오입에 따라 통과되자 여론이 들끓었고, 원내에서도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 자유당 의원들의 탈당이 잇달았다. 12월 4일 김두한 의원에 이어 12월 6일 손권배 의원이 탈당했고, 10일에는 김재곤, 김재황, 도진희, 민관식, 성원경, 신정호, 현석호, 황남팔 의원과 내가 탈당했으며, 정해영 의원은 1958년 1월 11일에 탈당했다. 나의 자유당 생활은 그렇게 해서 7개월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중략) 

국민의 마음이 이승만 박사로부터 결정적으로 떠난 것은 억지로 강행한 삼선개헌이 가장 큰 계기가 됐다. 삼선개헌 이후 이 박사의 독재 체제는 더욱 강화됐다.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고 부정선거와 부패가 만연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100~101쪽, 136쪽.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한 자유당 탈당 의원과 민국당, 무소속 의원 60여 명은 호헌동지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꾸리고, 신당 창당에 나선다. 김영삼은 신당 창당 발기준비위원회 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대한민국 정당사 최초의 본격 야당이라 할 수 있는 민주당이 1955년 창당됐다. 

정부는 민심을 점점 잃었지만 야당의 인기는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이승만은 1956년 대선에서 다시 대통령에 당선됐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신익희, 압승 분위기 속 급서…이승만 대통령 취임·이기붕 부통령 낙선
정부 여당, 비우호적 세력 탄압 이어가…경쟁자 조봉암 ‘사법 살인’

1958년 총선, YS ‘투표함 바꿔치기’로 낙선 DJ 후보 등록 제지 당해


1956년

당시 야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신익희, 부통령 후보는 장면이었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그들의 슬로건은 국민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신익희 후보는 정권 교체를 열망하는 국민들과 야당 연합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선거가 종반에 접어들자, 우열은 더욱 분명해졌다. 정부의 관리들도 신 후보 진영에 은밀히 줄을 섰다. (중략) 누구도 신익희 후보의 압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집권 자유당의 부정 선거 수법은 수준이 낮았다. 민심은 정권 교체를 원했다.”

- 김대중 자서전, 95쪽. 

그러던 중 청천벽력 같은 일이 발생한다. 민주당 대선후보인 신익희가 선거 열흘 전인 1956년 5월 5일 유세를 하러 지방으로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 뇌출혈로 돌연 사망한 것이다. 향년 61세 나이였다. 

상황은 급변했다. 이승만은 69.98% 득표율로 3대 대통령에 당선한다. 부통령 선거에선 민주당의 장면이 46.43% 득표율로 자유당의 이기붕(44.03%)을 이겼다. 

이승만은 당선됐음에도, 무소속의 조봉암이 3대 대선에서 30% 넘는 표를 얻고, 부통령에 자유당이 아닌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데 우려의 감정이 앞선 듯하다. 이후 정부 여당에 비우호적인 세력과 경쟁 정치인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경쟁자였던 조봉암은 1958년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법살인을 당한다.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1959년 7월 교수형에 처했다.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한 후보자들의 기록을 보면 이때도 여당의 부정행위가 판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차례로 김영삼과 김대중의 기록이다. 

“누구의 눈에도 내가 대승을 낚아채리라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그런데 투표가 끝난 5월 2일 오후 6시 무렵, 한 경찰관이 “개표 전에 투표함을 바꿔치기 위해 가짜 투표함을 실은 스리쿼터(소형트럭)가 서구청으로 가고 있다”는 제보를 해 왔다. 내 선거운동원들이 개표장인 서구청으로 갔을 때는 새끼줄을 쳐 놓았을 뿐 아니라, 카빈총으로 무장한 헌병과 경찰관들이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있다. 계엄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헌병이 개표소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는 사이에 포장을 친 스리쿼터가 들락거렸다. 투표함이 바꿔치기 되는 순간이었다.

이날 밤 개표가 시작되었다. 33개의 투표함 가운데 16개의 함에선 내가 7대 3의 비율로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머지 투표함을 열자, 나의 지지표가 투표함 1개당 7표, 심지어 3표나 2표밖에 안 나오는 해괴망측한 이변이 일어났다. 그 결과 자유당 이상룡 후보가 2만2131표, 민주당의 내가 1만8858표, 노동당 장 후부가 2119표, 무소속 강 후보가 761표로 자유당 후보가 당선됐다. 이러한 환표 부정사건은 나의 4대 국회 진출의 길을 봉쇄했을 뿐만 아니라, 나의 국회의원 생활 가운데 유일한 ‘낙선’ 기록을 남겼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130쪽. 

김대중은 정부 여당의 방해로 후보 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경찰은 선관위 사무실 앞에 선 DJ를 밖으로 쫓아냈다. 

“후보 등록을 하기도 전에 정부와 여당은 야당 후보와 당원들 그리고 유권자들을 협박하고 매수했다. 그들의 부정 선거 수법은 몇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대담해지고 교묘해졌다.”

- 김대중 자서전, 100쪽.

자유당은 그 선거에서 233석 중 127석(54.50%)을 얻어 과반 승리를 거뒀다. 

결정적인 부정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발생했다. 

당시 대통령 후보로 자유당에선 이승만, 민주당에선 조병옥이 나왔다. 그런데 조병옥이 선거 한 달 전인 1960년 2월 15일 향년 65세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났다. 민주당은 후보 등록 마감 시간이 지나 다른 후보를 내세울 수 없었다. 이승만의 당선 확정이었다. 

하지만 자유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이 또다시 낙선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3·15 부정선거’가 벌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