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시곗바늘 거꾸로 돌린 쿠데타”…5·16 군사쿠데타 [대통령 회고史]

YS “쿠데타 세력은 역사의 죄인…정당화 안 돼” DJ “무력 동원한 권력 탈취…혁명 아니다” JP “구질서 붕괴시키고 신질서 만들었다” DR “5·16 본질은 쿠데타…혁명 정당화 안돼” 박정희·장도영 본 윤보선 “올 것이 왔구나”

2024-08-22     김자영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민주화된 지 40여 년이 돼가는 지금도 정치권에선 ‘독재’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대한민국 정치는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본다.

<시사오늘>은 현대 정치사 주요 사건들을 되짚어보는 ‘대통령이 본 정치史’를 내보인 바 있다. 1960년~2000년대 초반의 굵직한 정치 사건들을 지난 역대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의 입을 빌려 살펴봤다. 대통령 회고사2, 두 번째 주제는 박정희 18년 통치의 시작을 알린 5·16 군사쿠데타다. <편집자주>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 방송에선 다음과 같은 포고문이 울려 퍼졌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입법·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 조직했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같은 날 오전, 청와대 안으로 들어선 박정희와 장도영을 보고 대통령 윤보선은 이렇게 말했다.

“올 것이 왔구나.”

실질적 국정운영 책임자였던 장면 총리는 쿠데타가 일어날 당시 어디로 숨었는지 깜깜무소식이었다. 윤보선은 한국군을 출동시켜 쿠데타를 막으라는 미군의 요청에도 불구, 한국군 간 유혈 사태가 일어나선 안 된다는 이유로 진압군의 출동을 저지했다. 정부가 머뭇거리는 사이 승기는 군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게 박정희 정권 16년의 신호탄을 울린 5월 16일 디데이가 지나갔다. 

5·16에 대한 3김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김영삼(YS)은 “쿠데타 세력은 역사의 죄인”이라 비판했고, 김대중(DJ)은 “무력을 동원한 권력 탈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아무리 미화해도 혁명은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혁명의 설계자였던 김종필(JP)은 “구질서를 붕괴시키고 신질서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선 박정희·김종필 등 혁명 주체 세력인 군인의 입장 그리고 민주당 정권 당시 치열한 파벌싸움 등 혼란한 국내 정치 상황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4·19 이후 국내 정세 혼란기 이어져…1년 뒤 5·16 쿠데타 발발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하야한 1960년 여름, 제2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8월 12일 윤보선 대통령이 취임했고 19일 장면 초대국무총리가 임명됐다. 4·19 이후 거리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시위가 열렸다. 당시 ‘데모하지 말라는 데모를 해야 한다’는 식의 우스갯소리도 세간에 전해졌다. 

천신만고 끝에 권력을 잡은 민주당 정권은 신파·구파로 나뉘어 헤게모니 싸움에 치중했다. 1956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 경선 때부터 시작된 신·구파 간 경쟁은 선거 승리 이후 더욱 격화했다. 당시 구파에 속한 YS는 집권 경쟁 과정에서 대통령과 총리 배분 등 사안을 두고 “신·구파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됐다”고 회고했다. 

구파는 신파 출신의 장면 총리가 신파 일색의 초대 내각을 구성했다며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DJ 자서전에 따르면 “민주당 구파는 야당보다 더 독하게 장면 내각을 공격했다.” 

5대 국회 개원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86명의 구파 의원이 모여 ‘구파동지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따로 꾸려 등록하기에 이른다. 다음 해 2월 구파는 분당해 나와 신민당을 창당했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장면 내각은 정책 추진 동력을 잃었다. 

JP는 “민주당 정권은 정쟁과 누습(陋習), 극도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민주당 장면 내각을 ‘우유부단함의 극치’라 평가절하했다. 당시 군인 신분의 노태우는 회고록에서 “장면 총리의 경우 군 통수권자로서의 권위나 국민들이 느끼는 친밀감에 있어 이승만 대통령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한 편”이었으며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무성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우리 기대와 포부와는 달리 민주당 정권 출범 이후 시국은 날로 혼란스러워졌다. 제2공화국 잉태기라 할 수 있는 과도 정권하에서는 학생들의 자율적인 사회정화와 질서 확립 운동으로 한동안 사회는 평온했다. 하지만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지난날 독재 치하에서 억압됐던 욕구와 가치들이 끊임없이 표출되며 사회적 혼란이 갈수록 심해졌다.

반면에 민주당 정권은 신구파분쟁 노장파와 소장파 대립 등 당내 파벌 싸움에 휘말려 표류했다. 그로 인해 4·19 혁명을 진전시키는 실질적 개혁 조치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것 없었다. 

민주당 정권이 경제개발제일주의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기는 침체하고 국민들의 삶은 더 어려워졌다. 당시 자료를 보면 물가는 38% 오르고 실업률은 23.7% 달했으며 경제성장률은 인구증가율에도 못 미치는 2.1%로까지 떨어졌으니, 국민들의 고통과 불만이 어떠했겠는가. 

모든 불만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9개월밖에 안 되는 제2공화국 기간 동안 거리 시위가 2000건에 연인원 100만 명에 달했으니, 데모만능주의란 말 그대로 무질서와 혼란의 시기였다. (…) 사회 혼란만 가중되는 가운데 민주당 정권은 9개월의 짧은 집권기간 3차례나 전면적 개각을 단행해야 할 만큼 정국의 혼란상을 드러내며 표류하다 결국 5.16 군사 쿠데타를 맞게 됐다.”

- 이기택 회고록 <우행, 내 길을 걷다>, 112~113쪽.

 

쿠데타 설계자 김종필과 지도자 박정희, 1961년 2월 ‘혁명결의’


박정희

그 무렵 김종필을 비롯한 군부 일각에선 혁명에 대한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1961년 2월 19일, 2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박정희를 찾아가 “이제는 혁명해야겠다”고 제안한다. 이날 박정희와 김종필은 동원 가능한 병력을 확인하고 ‘혁명의 결의’를 맺었다. 김종필은 이후 거사 날까지 도서관을 드나들며 프랑스 혁명, 볼셰비키 혁명, 터키 케말 파샤 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이집트 혁명 등 전 세계 혁명사를 연구했다고 한다. 

“꽃샘추위가 매서운 1961년 초봄 나는 분주해졌다. 박정희 소장과 대구에서 혁명 결의(2월 19일)를 한 뒤였다. 혁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출동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정군(整軍)운동은 육군본부 동료들로 충분했다. 이젠 혁명이다. 실병력이 있어야 했다. 그들을 이끄는 야전장교를 포섭해야 했다. 나는 한강 이북, 박 소장은 한강 이남을 맡았다.”

- 김종필 증언록 1권, 42쪽. 

김종필이 처음 점찍어둔 거사 날짜는 4·19 혁명 1주기 날이었다. 학생 시위로 거리가 시끄러운 틈을 타 군이 개시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막상 날짜가 다가오자 군인들이 예상했던 시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거리는 조용했다. 계획은 두 번이나 미뤄졌다.

“첫 번째 4월 19일 계획은 4·19 기념 1주년 행사를 맞아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예상하고 준비한 것이다. 시위가 벌어지면 진압군으로 투입되는 혁명 주체세력이 궐기군으로 전환한다는 구상이었다. 기대했던 데모는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 궐기는 자동적으로 취소됐다. 나는 발상과 접근 자세를 바꾸었다. 상황이 조성돼야 거병하는 소극적 방식은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역사는 스스로 써야 하고 미래는 만들어가야 한다.

이튿날 대구의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폭동 진압 계획에 편승하려는 소극적 계획을 수정하자고 했다. 우리는 주변 조건과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혁명군을 편성하기로 했다.”

- 김종필 증언록 1권, 61~62쪽. 

JP가 정한 D데이 H아워는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쿠데타 지도자인 박정희와 설계자 김종필 그리고 제1공수단, 해병1여단, 6군단 30사단·33사단, 특수부대가 작전에 동참했다. 쿠데타가 일어날 거란 소문이 군 외부로 유출되는 일도 있었지만, 김종필은 두렵거나 당황하지 않았다고 한다. 군과 정부가 무관심하고 나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면 총리는 재임기간 수 차례 쿠데타 관련 첩보를 입수했으며,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사실 확인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장 참모총장은 그럴리 없다며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결과적으로 안이한 대처였다.  

5월 15일 늦은 오후, 김종필은 6개 공약이 담긴 혁명 발표문을 작성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 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군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5월 15일 밤 11시 반, 박정희는 신당동 집을 나와 서울 영등포의 6관구 사령부로 향했다. 거사를 시작한 것이다. 쿠데타군인 해병대와 공수단은 헌병대와 한차례 교전 끝에 한강교를 돌파한다. 그 사이 쿠데타 소식을 접한 장면 총리는 머물던 반도호텔을 떠나 혜화동의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했다. 

군부가 장악한 남산 KBS 라디오방송국 새벽 5시 혁명 취지문에 이어 오전 9시 장도영 참모총장 명의로 계엄포고문이 전국에 방송됐다.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4호

일, 본 군사혁명위원회는 4294년 5월 16일 오전 7시를 기해 장면 정부로부터 일절의 정권을 인수한다. 
이, 참의원·민의원 및 지방의회는 4294년 5월 16일 오후 8시를 기해 해산한다. 단, 사무요원은 존속한다. 
삼, 일절의 정당 및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사, 장면 정부의 국무위원 및 정부위원은 체포한다. 
오, 국가기구의 일절은 혁명위원회가 이를 정상적으로 집행한다. 
육, 모든 기관 및 시설의 운영은 정상화하고 여하한 폭행 행위도 이를 엄단한다. 

- 1961년 5월 17일 자 <동아일보> ‘정권 인수·국회 해산’

 

YS “쿠데타로 민주주의 뿌리째 뽑혀…단죄받아야”
DJ, 민의원 당선 2일만 국회 해산…“민주주의 후퇴”


12·12 군사 쿠데타의 주역 중 하나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혁명에 긍정적 입장을 취했다. 

“1961년 5월16일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혁명을 일으킨 주역이 박정희 소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안심이 됐다. 소대장 시절 사단장으로 모셨던 그분의 인품과 능력을 믿었다. 결코 경거망동할 인물이 아닌 데다 누구보다도 확고한 국가관을 갖고 있는 분이어서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혁명을 주도했으리라는 점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서울대 문리대에서 교관을 하고 있는 전두환 대위와 연락을 취했다. 우리 두 사람은 혁명의 성격을 이야기하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중략) 1961년 5월 18일에 있었던 육사 생도 및 장교단의 혁명지지 시가행진은 언론에 크게 보도돼 혁명의 성공을 기정사실로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날 아침 사관생도 800여 명은 교수 훈육관들과 함께 동대문에서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상권, 116~118쪽. 

민주화 운동의 양대 거목인 김영삼과 김대중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그들은 5·16과 관련해 ‘역사의 시곗바늘을 돌리는 행위’ ‘민주주의를 뿌리채 뽑는 행위’ ‘무력을 동원한 권력 탈취’로 표현하는 등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군사 쿠데타가 벌어지던 날 YS는 고향인 거제도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어장 일을 돌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쿠데타 소식에 깜짝 놀란 그는 급하게 서울로 이동했다. YS는 당시를 “서울로 올라와 보니 시내 중심가와 주요 건물에는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운 채 삼엄하게 지켜 서 있었다. 나는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세운 민주정부가 군대의 총칼 앞에 맥없이 무너지다니!”라고 기록했다. 그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내 눈에는 5·16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혁명이 아니라 정권 탈취 행위에 불과했다. 5·16 때문에 갖은 풍상 속에서 겨우 싹을 틔운 이 나라 민주주의가 뿌리째 뽑힌 것이다. 군사쿠데타가 역사의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버린 것이다.

가난과 무지, 정치적 무관심, 폭력과 전제의 정통, 행정능력의 부족, 여기에 더해서 정치만능의 풍조 등 악조건 속에서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하는 일은 결코 단기간에 성취할 수 없다. 장면정권의 고통과 시련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중략) 

자유는 더 높은 목표를 향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 그 자체가 가장 높은 가치이고 목표이다.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선택한 것 이상일 수는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질서를 뿌리내릴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것만으로도 쿠데타 세력은 역사의 죄인으로 단죄받아 마땅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쿠데타는 결코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18년 동안 우리 사회를 빈익빈 부익부의 황금만능 사회로 만들었고,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끌어 모았다. 고도성장이라는 허울 아래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은 가치 전도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권, 155~156쪽. 

3번의 민의원 선거 낙선 끝에 1961년 5월 재보궐에서 당선한 김대중은 5·16 쿠데타로 인해 이틀 만에 국회의원직을 잃게 된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회 해산을 포고했기 때문이다. 

“초기 쿠데타 세력의 일 처리는 쾌도난마에 비유할 수 있었다. 우유부단한 듯 보였던 장면 내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리고 완전한 계엄령 체제에서 일방적으로 장면 내각을 몰아붙였다. 부패하고 무능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군사 정권의 선전을 일부 국민은 신선하게 느끼기도 했다. 사실 국민들은 장면 내각 출범 후 계속된 정쟁에 지쳐있던 게 사실이었다. 이에 비해 군인들은 모든 정책을 명쾌하게, 규칙적으로, 신속하게 처리했다. (중략) 

5·16은 혁명 공약이나 그 후 그들이 취한 권력 다툼을 보면 명확한 이념과 확실한 계획을 가지고 진행된 혁명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무리 미화해도 애당초 혁명은 될 수 없었다. 무력을 동원한 권력 탈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싹을 무력으로 잘라 버렸다. 정당 정치와 의회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군부는 정치적 패권을 장악한 특권 집단이 됐고 이후 정치군인이 득세했다. 5·16 군사 쿠데타로 우리 민주주의 역사는 30년이나 후퇴했다.”

- 김대중 자서전, 144~146쪽. 

김영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상도동계 원로 김덕룡 민주화추진협의회 이사장은 21일 5·16 쿠데타의 역사적 평가를 다음과 같이 <시사오늘>에 보내왔다.  

“5·16은 혁명이라 할 수 없다. 군사 쿠데타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공약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이 혁명의 정당성을 가질 수는 없다. 5·16 사태 연장선에서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를 혁명으로 명하려는 입장이 있으나, 본질은 12·12 사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군사 ‘쿠데타’에 지나지 않는다.”

김 이사장은 또한 “5·16은 정당한 경쟁을 통해 선거로 선출된 민주당 정권을 전면 부정했다는 점에서 군사 쿠데타에 미치지 못하는 그 전 단계”라는 박한 평가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