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걸 “감옥 갈 결심으로 출판한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시민의 전리품” [6월항쟁되짚기⑳]

윤재걸 전 동아일보 기자  5‧18 취재 건으로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  1984 복직 후 계엄군 헬기 난사 최도 보도 1987 공수부대 하사관 최초 고백수기 출간  2015 이한열 성적표 유품 기념사업회 기증

2024-09-23     윤진석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윤재걸

 

6월항쟁 되짚기의 첫 단추. 거슬러 올라가면 광주민주화운동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윤재걸(77) 전 <동아일보> 기자(이하 윤재걸)는 탐사보도저널리스트의 대가다. <장준하 의문사>도 그의 첫 보도에서 출발했다. 

1980년 5‧18 현장도 취재했다. 

전두환 신군부에서는 그를 블랙리스트 언론인 A급으로 분류했다. 

5‧18 취재 건으로 강제 해직되자 윤재걸은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4년여간 복수의 증언자들을 만나 밀착 취재에 들어갔다. 팩트를 좇아 크로스체크를 반복했다. 1984년 복직된 후에도 실체적 진실을 향한 추적은 계속됐다. 

1985년 7월 <신동아>를 통해 5‧18 광주 계엄군의 헬기 난사 사건을 최초 보도했다. 계엄군이 헬기에서 비무장 상태의 무고한 시민을 향해 기총소사를 했다는 사실이 처음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장장 7년여간에 걸친 취재 기록을 엮어 1987년 책을 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모티브가 된 특종 수기 <작전명령-화려한 휴가>가 그 책이다. 한 공수부대 하사관의 최초의 고백 수기를 수록한 것이 압권으로 평가된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윤재걸, 초판 당시를 돌아보며.

“얼마나 팔렸을 것 같아요?” 

지난달 7일 만났을 때 이 말을 물어왔다. 

2008년 이래 낙향해 전남 해남 생가에 살고 있다. 

서울서 내려간다고 하자, 해남까지 오면 멀다며 나주역서 보자고 한다. 빵떡모자를 쓴 원로는 동글한 몸집을 하고 있다. 가쁜 숨을 들이쉬는데 어딘지 불안하다. 심장병 수술로 매사 조심해야 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찌는 듯한 폭염은 한낮의 도시마저 무기력하게 만드는 듯했다. 여행객들마저 뜸하다. 듬성듬성 문을 닫은 가게들이 굳은 표정을 짓고 서있다. 적막한 분위기가 지방도시 위기론을 짐작하게 한다. 

어렵사리 찾아 들어간 카페. 질문 하나에 답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삼십여 분이 훌쩍 지나갔다. 능선을 타듯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가던 이야기는 그가 쓴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의 첫 출판 당시를 소회하는 대목으로 넘어갔다. 

- 되게 많이 팔렸을 것 같습니다. 

“많이 팔렸어. 한 20만 부 이상 팔렸어요.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접시꽃 당신>, <졸병 시대> 등이 베스트셀러가 돼서 돈을 막 긁어모았어요. 나는 웬만하면 다 실천문학사 벌라고 놔뒀어요. 인세 내놓으라고 하기가 좀 그렇더라고. 일부 받은 돈은 구로구 노동자들 도와주고 그랬지.”

-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사 쪽에서는 좀 받았나요.

“십 원도 못 받았어. 영화표도 안 주더라고(웃음).”

- 의외네요.

“내가 이야기도 안 꺼냈어요.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는 시민전쟁의 전리품 같은 거잖소.” 
 

윤재걸

 

- 책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요.

“내가 1980년 8월 9일 신문사에서 쫓겨났어요. 그해 10월부터 광주에 내려가 숨어 지냈는데 친구들이 내 취재 노트를 본 거예요. 문학진 같은 친구는 대한민국 최고의 원본이다, 이거야. 단순하게 쓴 게 아니라 취재원들의 속성까지 다 파악해 보탤 건 보태고 뺄 건 빼고 해서 기사를 확대 발전시켰다는 거예요. ‘일반 기사를 보면 허점을 발견하게 되는 데 형님 것은 빈틈이 없다’고 해요. 책은 나기주 선생이라고 특전사 내무반장 했던 분이 나한테 100매를 써왔어요. 그걸 출력해서 현장에 가서 취재하고 종합해 놓은 것이 <화려한 휴가 작전명령>이라고 보면 돼요.”

초판은 1987년. 

“원래는 <동아일보> 출판사에서 내기로 했는데 군기법(군사기밀보호법)에 걸린다면서 안 해버려. <실천문학사>라고, 편집장인 송기원 작가가 내 친구예요. ‘이것 좀 내자’고 했더니 30분 정도 보더라고. 서대문 로터리 화양극장이라고 있어. 뒷골목으로 가요. 노랑머리라는 술집이 있는데 거기 앉아 계속 보는 거야. 3시간 보더니 ‘재걸이 형, 우리 감옥에 가자’, 나도 ‘그래 가자’ 했어요. 간첩죄에 해당되는 것들이라 다들 손 못 댄다고 하는데 감옥 갈 결심으로 책을 실어준 것이지.”

 

고문의 파편들


- 목숨을 건 출판이었네요. 

“그렇지.”

- 5‧18 취재 때도 궁금합니다. 

“1980년 5월 18일 사건이 나니까 다음날 출판국 전체회의가 열렸어요. 전화가 막 빗발치는 거예요. 전라북도에서도 오고 난리야. 십시일반 돈을 모았어요. 취재팀을 파견하기로 한 거예요. 한 48만 원인가 됐어요. 나는 광주에 연고가 많았어요. 기자들 두 명과 같이 갔는데 우리도 현장에서 죽을 뻔한 거야.”

문흥동 교도소 앞을 지날 때였다. 

“봉고차 서너 대가 쳐 박혀서는 피가 낭자한 거예요…. 계엄군이 시민군의 심장을 향해 총을 쏜 현장을 확인한 것이지….”
 

1980년
1980년

- 헬기 난사 최초 보도는요? 

“조비오 신부도 증언해줬고, 그분의 비서인 김양래 씨라고 있어요. 작년에 돌아가셨더라고. 그분들 이야기 듣고 나도 현장을 찾아다녔어요. 시민군이 전남역 뒷길, 금남로 입구에서 싸우는데 헬기기총소사 사건이 난 거예요. 전부 막 쓰러지고 뒹굴고….”

그가 쓴 1985년 7월호 기사에 따르면 “군용헬기가 도청 부근을 선회하더니 갑자기 고도를 낮추고는 MBC가 소재한 제봉로 부근에다 기총소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금남로 부근의 골목에서 웅성거리던 시위 군중들은 혼비백산, 길바닥에 엎드리거나 건물 가장자리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며 “헬기로부터 날아온 탄환에 죽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뒹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사가 나오면 제일 문제인 게 군기법 위반 여부였어요. 민감한 사안들은 빼느라고 뺐는데도 출고된 직후 이정윤 부장과 함께 보안사에 끌려갔어요. 고문 조사하던 서빙고분실은 악마의 소굴이었어. 나중엔 송파로 옮겨졌는데 민간인 첫 손님으로 우리를 잡아간 거예요.”
 

윤재걸

- 어떤 식으로 고문을 당했나요. 

“일단 들어가면 혁대부터 모든 걸 풀어요. 자살할 수 있기 때문에 고무줄 같은 것은 절대 없게 하는 거예요. 깨벗기고는(벌거벗다의 전라도 방언) 두들겨 패는데 ‘김일성보다 더 나쁜 놈. 빨갱이보다 더 나쁜 놈. 너 이 새끼. 이북 방송 듣고 썼지?’ 하면서 묻는 겁니다. ‘이북 방송이 무엇인데요?’ ‘인마, 다 나오게 돼 있어’…. 의사가 내 혈압을 재보더라고. 군의관인데 ‘윤형 혈압이 높다’며 ‘아파를 자주 하십시오’ 막 그래. 나는 남자답지도 못하고 자그마한 체구야. 그런 몸이 한 열 댓 번 깨벗겨졌을 거예요. 처음 잡혀 들어갔던 때도 기억나네….” 

- 어떤 기억입니까.

“1971년 서울대생내란음모 사건이라고 있어요. 내가 자금 지원 및 배후조종으로 몰린 거예요. 강제 입대 후 남산 지하실로 끌려갔는데 그 왜 쓰레빠(슬리퍼 속어) 있잖아요? 얇은 고무로 찰싹찰싹…뺨을 몇 번이나 맞았는지 몰라. 한 삼주 간 고문을 당했어요. 10월 말 한파가 왔는데 어떻게나 추운지 그때 나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 

고문으로 하반신 마비까지 왔다고 전해진다. 두 번의 척추수술 끝에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됐다. 

 

5월에서 6월로 


끌려갔던 기억의 편린을 들춰낸 시간을 지나 다시 헬기 난사 최초 보도 사건으로 돌아왔다. 

보안사에서는 북한 방송을 보고 썼다는 강제 자백을 받은 뒤에야 풀어줬다. 거짓을 강요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진실은 조금씩 실체를 드러냈다. 실제 2018년 광주 동구 전일빌딩에서 총탄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을 계기로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가 실시됐다. 

조사위에서는 1980년 5월 21일, 27일 등 헬기 사격이 여러 차례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헬기기총소사는 전일빌딩 뿐 아니라 전남여고 뒤편 길가 등 다양한 장소에서 일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했던 윤재걸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시작으로 불길처럼 번진 6월항쟁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5‧18은 어떤 조직이 있어서 체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잖아요. 다발적 민심의 힘이 분출된 것인데 그것을 체계화시키고 전국화해 시민 할 것 없이 모두 달려든 것이 6월항쟁인 것이지.”   
 

1987년

- 6월항쟁 기간 기억에 남는 광경은 뭔가요. 

“이한열 열사 추모식이 시청 부근 프레스센터 앞에서 열렸어요. 사진기자 데리고 갔는데 현장서 보니 시민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움직일 수 없을 정도야.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있나…. 하는 수없이 여자들끼리 빙 둘러서 벽을 만들어요. 차례대로 한 명씩 그 안에 들어가 오줌을 누면 물줄기가 흥건히 바닥을 타고 길을 만드는 겁니다. 이런 광경이 어디 있겠어. 그때의 시위 열기를 짐작케 하는 거예요.”  

이한열은 대학(연세대) 후배다. 윤재걸은 취재하다 얻게 된 이한열의 성적표와 사진, 유인물 유품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지난 2015년 6월항쟁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 처음에 어떤 계기로 민주화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건가요.  

“내가 광주서중과 일고를 다녔어요. 역사적 의식이 있는 학교인데 일제 강점기에는 학생들이 주동이 돼 독립운동을 했잖아요. 학교 교문에 딱 들어가면 기념탑이 서 있어. 거기 비문에 적힌 글귀가 이래요.”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기념탑은 1954년 광주의 명문 광주일고 교정에 세워져 있다. 윤재걸은 1960년대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했다. 

“6년간을 드나들면서 본다고 봤어요. 학생이라면 순수하고 깨끗해야 된다. 옳은 일에 앞장서야 된다. 이런 생각이 굳어진 거죠.” 

광주서중은 1972년 없어졌다. 지금은 광주일고만 남아 있다. 

“박정희 정권 때 일류학교를 없애버린 거예요. 광주서중과 일고를 일원화해버렸지.” 

대학은 서울대 법학과가 목표였다. 

“나는 암기력이 탁월했어요. 판사를 하고 싶어 서울대 법대를 가려 했는데 잘 안됐어요.”

3수 끝에도 실패하자, 연세대로 선회했다. 1967년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좋은 성적으로 들어갔어. (연대가)좋아서 갔는데 봤더니….”

- 왜요?

“잘못 정했어. 막상 가서 보니 99%가 우파야. 전부 잘 살고 기독교적이고 천편일률적이고. 주변에서 언론계로 진출한 사람도 나 혼자야. 고시공부도 때려치웠어. 내가 꼭 고시를 해야 되나? 공부도 잘 안 되고 회의감이 들더라고. 형사 대빵이 검사인데 일제강점기로 치면 고등계 형사잖소.”

- 그래서 언론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건가요. 

“사람은 결국 자기 정체성을 찾아 들어가기 마련인 것 같아. 고산 할아버지가 우리 집안 분이에요.”

고산 윤선도의 11대 손이다. 

“나도 말과 글로서 세상을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내가 시인으로 데뷔를 했어요.”

1966년 <시문학>에서 문학상을 받았다. 

“‘플라타너스’ 시로 유명한 김현승 선생의 추천을 받았지.”

 

민주화 의식의 ‘눈’


윤재걸

 

이후 교내 <연세춘추> 기자로 활동했다. 

“부장하면서 편집국장 대리를 하고 있는데 동아리 그룹을 대표해 삼선개헌 반대 호헌투쟁위원장으로 뽑힌 거예요. 그 다음엔 범대학 민권쟁취청년단이라고 있어. 상당히 무서운 이름이야. 대학 7개를 통합하는 단체의 장이 된 거예요. 젊은 날의 나는 상당히 온순하고 키도 작고, 활동량이 적었거든. 그렇지만 그때의 나를 보면 주장과 논리가 셌다고 봐.”

- 그래서 학생운동을….

“지금까지 한 이 잡소리가 민주화운동을 하게 되기까지를 말해주려고 한 거예요. 나의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감싸고 있던 구속들로부터 떠났던 것이지…. 기념탑(광주일고)에 있던 글귀를 가슴에 새기면서 조금씩 무장이 됐고 잠복돼 있던 것들이 발현이 돼간 거예요. 가족적인 것, 학교 제도적인 것부터 자기 해체가 되면서 새로운 틀 속으로 들어가게 됐던 것이지. 제도적인 틀은 학교 전체의 틀과 똑같아. 인습적이고 관습적인 것, 옳고 그름을 규정하는 사회의식들이 모두 제도적인 것 아니오?”

이야기는 정계 입문 즈음으로 흘러왔다. 

1971년 4‧27 대선이 다가왔다. 그해 대학원(연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김홍일이라고, 김대중(DJ) 총재 아들이 나하고 친구이자 동지였어요. 한국정우회라는 정치학과 모임을 만들었어요. 홍일이 이름으로 마포 아현동에 16평짜리 서서울아파트를 샀어요. 거기서 내가 김대중 대선후보(신민당)의 비밀스피치라이터를 한 거예요. 그 당시엔 향토 예비군 훈련이 문제가 많았어요. 돈 좀 주면 빼주면서 힘없는 사람들이 안 가면 난리야. 민원이 폭주했지. 국가 안보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면서 대폭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내가 내민 글이 제일 설득력 있게 잘 썼대. DJ가 기자회견을 했는데 파급이 상당했어요. ‘이북으로 가라’며 난리가 났지.”

대권에 도움이 됐을까? 하면 의문이었다. 암튼 이런 과정들을 거쳐 시인, 언론, 민주화운동가,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리라. 

정계 입문하면서는 평민당 김대중 총재 수석대변인, 꼬마민주당 수석부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원내 배지는 달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입도선매가 횡행했을 때다. 그런 정치 풍토와는 체질상 맞지 않았을 것이었다. 

“내가 1989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 특종취재로 국가보안법 불고죄 혐의를 받은 적이 있어요. 사전구속영장을 9차례나 받았어요. 대서특필된 사건이었지. 공안부에서 나를 잡아다 놓고 간첩 만들기를 시작하는데 인간 백정들이야. 근데도 내가 이겨냈어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언론 자유가 필요하고 언론 자유를 위해서는 취재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로 싸웠거든. <한겨레> 창간을 준비할 때는 50억 원 만드느라고 힘들었는데 내 사건(서경원 밀입북 특종) 때문에 120억 원이나 모였지.”

한겨레 신문 창간 멤버다.

“어머니가 그때 그러시더라고. ‘재걸아. 너는 당사주 보니까’….”

침을 삼켰다. 

“노인네들은 자기가 믿는 사주나 점이 있잖아요(웃음).”

- 네 그렇죠. 

“‘당사주에 너는 관운이 약한 반면 관재수가 없다고 그러더라’….”

모친이 해준 말을 되뇌었다. 

‘이회창 고립론’을 비롯해 김경재 박지원 이인제 노무현 김부겸 정몽준 등 정치권에 있을 당시 크고 작은 후일담들을 한창 들려주다가 나온 말이었다. 관운이 없는 데 대한 변이라 생각됐다. 

삼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전문가로도 유명하다. 이참에 분석해 달라고도 해봤다. 

“삼김에 대해 쓰다가 일단 놔뒀어요. 정리를 못하겠더라고.”

이유가 궁금했다.

“결국 비판적인 데로 가더라고‥. 남북문제도 해결 못하고 지역감정을 부추겨서 나라가 어리숙해져 가잖소.”

- 다음 대선 전망은요.

“외연 확장의 논리로 본다면 ‘한동훈’도 간단치 않은 인물이에요. ‘이재명’ ‘조국’이 갈라지면 국민의힘 입장에선 적전분열이 되는 거예요.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이낙연’이 반목해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어요. 야권이 다시 또 전철을 밟아야 되겠어요?”  


 

P.S.

요약하면 87년 6·10항쟁 되짚기를 마무리하는 20번째는 6월항쟁의 첫 단추라 할 수 있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한 윤재걸 전 동아일보에 대한 이야기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 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이명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알린 특종기자의 투쟁기(이부영),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성공의 결정타(이재오), YS총선 참여, 6·10항쟁의 동력(이성헌), 언론인으로서 바라본 6월항쟁(최문순), 넥타이 부대의 참여 계기(최재호), 6월항쟁 시발전 5·3사태(장기표), 직선제 개헌의 의의(신평), 세계사적 의의(임혁백), 진짜 주역 YS(인명진, 민경우), 7공화국 제언(최광웅)에 이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