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범 “노벨경제학자가 극찬한 김영삼,민주화·정보화·세계화 대통령” [YS 서거 9주기③]

이각범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문민정부) ​​​​​​​“YS, 대통령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개혁 해내” “군부 지배하던 정치권력 거두고 문민화 개막” “투명한 경제, 정상적인 경제, 합리적 경제로” “개혁 개방화 대전환, 중진국서 선진국 도약” “YS 세계화는 일류국가 시대로의 질적 전환”

2024-11-19     윤진석 기자,정진호 기자,유경민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정진호 기자, 유경민 기자]
 

이각범

이각범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은 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를 세계일류국가로 만든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유럽 등 세계 선진국에서 부러워하는 초일류 시스템을 만든 YS. 그 밑에서 이각범 전 수석(이하 이각범)은 문민정부에서 초고속 정보화 마스터 플랜을 총괄했고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정책을 주도했다. “우리나라가 민주화, 정보화, 세계화 강국이 되기까지 YS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평소 지론이다. 왜 그런지 각론으로 들어갔다. 11월 7일 마포구 본지 사무실에서 만났다. 

 

민주화-경제의 질적 성장  


- YS의 하나회 청산이 완전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뭔가.

“하나회 청산은 YS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군부가 지배하던 정치권력 행사를 문민화한 것이다. 완전히 군정을 종식했고 이 나라의 민주헌법을 성취했다. 민주주의적 질서에 의해 정치·경제를 비롯한 여러 행위가 일어날 수 있도록 틀을 만들었다.”

- YS가 하나회 청산 이후 금융실명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대한민국이 투명해지고 선진국형 부강한 나라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이번에 노벨경제학상 수상한 경제학자가 그의 저서(아제모을루의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한국을 경제 발전의 모델로 들었다. ‘한국이 경제 발전을 하게 된 데는 박정희 대통령이 절대 빈곤의 나라를 세계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중진국으로 만들어 한국 경제를 탈바꿈시켰다’고 했다.

두 번째로는 민주화를 통해서 한국 경제가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했다고 했다. 그 성공에는 YS가 부정부패를 척결해 사회적인 비용을 축소시키고, 두 번째로는 금융실명제를 통해서 지하경제를 지상 경제로 끌어올린 그 공덕이 컸다. 또 YS는 부동산실명제를 통해서 누가 재산을 소유하고 어떤 투자를 하고 어떻게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가에 대한 모든 과정을 명백하게 밝혀냈다. 부정부패와 지하경제, 투기에 의한 불로소득을 없애고 건전하게 생산적으로 돈을 벌게끔 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저자들이 이걸 얘기했다.”

- 노벨 경제학자가 주목한 것에 놀랍다. 

“그렇다. 그런데 그 책을 안 읽어본 기자들은 ‘민주화’ 그러면 무조건 머리띠 매고 화염병 던지는 모습을 자료 화면으로 내놨는데 그게 아니라 YS가 했던 경제 정의의 정착과 부정부패의 일소가 시대적인 전환이었던 거다. 세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학자가 주목한 것은 거리에서 빨간 띠 매고 시위한 게 경제를 질적으로 성장시킨 게 아니라 YS가 이룩한 투명한 경제, 정상적인 경제, 합리적인 경제 이것이 우리나라 경제를 질적으로 성장시켰다는 거였다.”

- YS의 그런 공로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말하는 건 기사로 쓰실 때 꼭 넣어 달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가지고 우리가 감격하지만, 한국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세계 초일류 경제학자가 노벨상을 받은 저서에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모델로 언급한 게 얼마나 자랑스럽나. 얼마나 위대한 민족인가.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보다도 못 살던 한국이 이렇게 발전하게 된 건 교육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도 교육 개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교육 개혁을 통해 요즘 미국 학력이 굉장히 많이 향상됐다. 
교육 문제는 일부고,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데는 국가 리더의 역할이 컸다. 우리는 북한보다 훨씬 못 살던 절대 빈곤의 나라였다. 해방될 때 남한은 농업밖에 없었는데 북한에는 흥남 질소비료 공장, 제철 공장, 중요한 발전 시설 등 일본이 지은 공장이 많았다. 남한보다 북한 전기 생산이 5배나 많았는데 1947년인가에는 소련군이 남한으로 가는 송전을 다 차단해서 우리가 전기 없는 시대를 맞기도 했다.
남한에는 당인리 화력발전소처럼 아주 작은 화력발전소만 있었고 큰 규모의 수력 발전은 없었다. 그렇게 전혀 다른 경제적 환경에서 남북한이 시작을 했다. 에너지산업과 공업을 갖춘 북한과 농업밖에 없는 남한. 우리는 북한의 1인당 GDP의 3분의 1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가난한 나라가 세계의 중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YS 대통령 마지막 임기인 1997년에는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했다. 얼마나 대단한 발전인가.”

 

이승만과 YS


1993년

- 노벨상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게 나라의 경사다. 일각에서는 한류가 세계화 바람을 타면서 한글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이에 우리나라 문학에까지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만큼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됐고 문화강국이 됐다는 것일 거다. <시사오늘>은 이 모든 게 대한민국이 개방형 민주주의 국가로 완성됐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 분석해 보고 있다. 한반도의 같은 땅, 같은 민족임에서도 북한은 삼대 독재 세습 일당 독재의 폐쇄형 국가다. 지금의 우리처럼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이 상상에서나마 가능했을까 싶다.

“한강 작가와 연관하는 건 또 긴 역사적 논쟁이 되기 때문에….”

4·3항쟁 아픔을 소재로 다룬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 등의 작품을 두고 역사 왜곡이라며 비난하는 목소리들도 있는데 그 점을 언급한 듯하다. 

샛길로 빠진 것일 수도 있지만 이각범은 해당 답변 대신 다른 역사 논쟁에 눈을 돌렸다.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이냐 아니면 임시정부가 들어선 1921년이냐 하는 논쟁이 있지 않나. 문재인 정부 때인데, 2021년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 기념식을 아주 성대하게 치르려 한 적이 있었다.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이 굉장한 준비를 했었다. 여의도광장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타고 온 비행기가 아직도 전시돼 있다. 김구 선생 같은 분들이 타고 온 거다. 리허설하는 걸 나도 여러 차례 봤다. 사람들이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입고, 일본 관원들이 나와서 잡아가고, 두루마기 입은 우리 선열들이 임시정부 만들고 하는 과정들을 연극 같은 퍼포먼스에 담아 몇 달에 걸쳐 예행연습을 했다. 내 사무실도 여의도에 있다. 자연스럽게 볼 수밖에 없었는데 그게 일시에 없던 일로 돼버렸다.”

- 그러고 보니 갑자기 취소됐던 기억이 난다. 

“문 정부가 임시정부 100주년에 맞춰 하려던 걸 북한 조선중앙통신에서 ‘임시정부 같은 그런 쓸데없는 행사를 하지 마라’고 딱 한마디 하니까 없어져 버렸다. 행사를 준비했던 문재인 정부 측은 뭘 바라고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 거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1948년 8월 15일이 아니다 내지는 우리 헌법을 가진 1948년 7월 17일이 아니다, 원래 우리 건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때다 하면서 김구 선생을 추켜세우고자 그랬을 거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누구였나.”

-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 전 대통령이고 건국했을 때의 초대 대통령도 이승만이다. 그분은 1930년대 후반 <재팬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책을 써서 ‘일본이 미국을 기습적으로 침략해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일본의 속내를 바깥으로 드러내겠다’고 한 분이었다. 그만큼 학문적으로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았다. 10대 후반에 이미 ‘조선은 입헌 군주 국가가 돼야 된다’고 했던 분이다. 그러니까 청년 혁명가였다. 왕을 없애자는 게 아니라 왕이 있어도 지금처럼 통치하지 말고, 상징적으로 있고 모든 통치는 백성들이 민주적 방식으로 하자, 왕에 의한 인치가 아니라 헌법에 의한 통치를 하자, 이렇게 주장했다. 

독립협회를 만들고 역모로 사형 선고를 받고 고문당하고 했다. 사형수로서 6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요새처럼 교도소에서 자유롭게 다니고 식사도 하러 줄줄이 나가고 이런 게 아니라 흙바닥에서 목에 칼을 들이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당시 선교사들이 넣어준 영어 성경을 달달 외우며 6년 동안 한영사전을 집필했다. 사실은 노벨경제학상 받은 분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몰라서 그랬는데,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제일 큰 밑거름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 대한민국이 오기까지 이승만 정부에서 추진한 농지 개혁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YS의 문민정부 업적을 철학적으로 봐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도 철학적으로 봐야 한다. 그분이 세운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바탕 위에서 대한민국이 발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정치적 독립뿐만 아니라 경제적 독립이 있어야 공고해진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남의 나라 식민지나 마찬가지라는 걸 건국할 때부터 말씀했다.”

 

문화 복지와 세계화 


- YS가 문민정부의 개혁을 통해서 복지 국가의 틀을 완성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YS는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

얘기는 이승만에서 다시 YS로 넘어왔다. 

“YS는 취임 후 목표가 우리나라의 시대 전환을 하겠다는 거였다. 복지에 대해서도 아주 체계적으로 접근했다. 소득분배 일환으로 복지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약분업도 YS가 했다. 의료보험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 때 강화한 거지만, 좀 더 체계적으로 하자는 차원에서 YS가 추진한 게 의약분업이다. 옛날에는 의사들이 진료와 수술은 부차적인 거고, 주로 약을 팔아 수입을 얻었다. 병원의 주수입도 약 파는데서 나왔다. YS는 진료나 의료 처치는 의사가 하고 약은 약사가 하게 했다. 병원에서 약을 못 팔게 했다. 모든 약은 의사가 처방전을 써주면 약국에서 받도록 했다. 지금은 처방받은 약을 약국에서 지을 때 무슨 약인지를 알고 먹지 않나. 옛날에는 약이 세 개면 그것들을 모두 가루로 빻아 넣어줬다. 이런 것들도 의약분업을 통해 변화된 거였다.”

- 의약분업이라는 것이 결국 의료업의 투명화를 가져온 것 같다. 지금은 의약분업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진다. 

“처음엔 아니었다. 한의사들이 난리가 났다. 진맥하고 약을 팔아야 하는데 진맥하고 처방만 하라고 하니 정말 난리가 났다. 의약 분업을 통한 의약 논쟁이 일어났다.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 윤석열 정부에서 의대증원 정책을 추진해서 의협으로부터 큰 반발을 사고 있다. 지금과 비교해 그때는 어땠나. 

“반발로 치면 당시가 더 컸다. 6개월간 매일 데모했다. 그전 정권에서는 손도 못 대던 것이었다. 어떻게 감당을 하겠나. YS는 집권 1년차 때 워낙 지지율이 높았다. 90%였다. 이후로도 그만큼 얻는 대통령이 없지 않나. YS를 10% 미만으로 찍었던 호남에서조차 지지율이 80%였을 거다. 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의약분업을 했다. 심지어는 예술이나 음악이나 이런 데까지도 문화 복지까지 했다.”

- YS의 세계화 추진에 대해서도 설명해 달라.

“YS가 세계화 선언을 하게 된 배경은 호주 순방을 통해 세계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종래 양자간 관계에 집착하던 관행을 깨고 세계 속의 경쟁력 있는 주체로서 대한민국이 거듭나면 세계속의 기회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절감하게 된 데 있다. 
우루과이라운드라고 있었는데, 앞으로 자유무역을 방해하는 모든 조치를 철폐하라는 거였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쌀값이 굉장히 높은 나라지 않나.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쌀값을 의도적으로 높게 책정하고, 매년 정부에서 추곡 수매라고 해서 수매가를 정부가 지원해왔는데 우루과이라운드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유무역 정신에 어긋나 못 하게 됐다. 그래도 어떤 나라가 ‘이거는 지켜야 되겠다’라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는 관세를 유예하거나 최소화하도록 하는 협상을 하는 게 우루과이라운드다.
당시 우리가 협상을 하는데, 전농이라고 민노총처럼 전국농민연합회가 있다. 어마어마한 시위를 하고 여의도에서 차량을 불태우고 막 그랬다. 폭동에 가까운 시위를 했는데, YS는 ‘이제부터 우리는 무역에 대해 수세적으로 하지 않는다. 앞으로 모든 상품을 세계 일류 상품으로 만들어서 세계적인 수준에 맞게 운영하겠다’고 했다.”

 

초고속 정보화의 길 


이각범

 

-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일류인 것들이 많아졌다. 

“그렇다. 수비적으로 ‘이 산업은 우리가 보호해 줘야 되겠다’ 하는 태도를 버리고, 당당하게 세계 시장에 나와서 ‘한국의 상품은 이거다’라고 보여준 게 YS다. 거기에는 문화 상품도 들어간다. 그전에는 일본 영화를 수입하면 우리나라 영화계가 다 죽는다고 난리였다. 유명한 배우들이 나서서 시위했다. 한 문화계 인사는 할복자살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유치산업을 보호하면 도태되고 만다, 이제는 모든 면에서 개방해 싸우자는 게 세계화였다.”

- 스크린 쿼터제를 사수하겠다며 시위했던 때가 생각난다. 지금은 한국 영화의 세계적 위상이 엄청나졌는데 그때 생각하면 다 죽는다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YS식 세계화는 첫째로 세계 일류가 되는 거다, 모든 면에서 우리의 수준을 세계 일류로 끌어올리자, 한국에 누가 오겠느냐 그러지 말고 한국 관광도 세계 사람들이 오게끔 하자. 모든 면에서 우리가 세계에서 일류가 되도록 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래서 나는 YS 업적을 시대적인 전환이라고 보고 세 가지 관점으로 규정한다.
첫 번째는 권위주의적 시대에서 민주통치 시대로의 전환, 두 번째는 수세적인 입장에서 세계를 향해 공세적으로 나아가는 전환, 세 번째로 아날로그 시대로부터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YS는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은 새 시대에 민주화 투쟁기에 일관한 도전정신으로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탈바꿈할 개혁의 길을 질주했다. 이에 산업사회로부터 정보화사회로 이행했고 한반도에 고착된 시야를 넓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차원의 국가 전략을 선언했다.”

- YS가 정보화 초석을 다진 대통령이라고 평가되는 데 그 점에 대해서도 평가해 달라. 

“정보화 기획을 내가 했는데 사람들이 ‘김영삼 대통령이 정보화를 어떻게 아느냐’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여러 경력을 보더라도 ‘아스팔트 위에서 싸우던 분인데 정보화를 어떻게 알겠나’하는 얘기였다. 그런데 YS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냐면, 판단력이 엄청나게 빠르다. 순발력이 뛰어나다. 정보화 정책을 제안했을 때 나는 그냥 서울대학 교수 출신일 뿐인데 정치를 언제 해봤겠나. 아무것도 모르지 않나. 근데 YS는 가만히 듣고 나더니 일리가 있다면서 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무것도 아닌 나 같은 사람 얘기를 즉각 받아들였다. 몇 시간 안에 조치하더니 신문 1면 톱으로 나왔다.”

이각범은 독일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다 1987년 YS 대선캠프에 합류했다. 시민사회 각계를 두루 거치며 개혁적 성향이 돋보였다는 평가다. 

- YS의 그런 면모는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 같다. 

“단번에 받아들여 일사천리로 개혁해 나가는 모습을 통찰력이라고 본다. 공직자 재산 공개도 건의하자마자 ‘그렇게 하자’바로 그러시더라.”

- 공직자재산 공개도 본인 제안이었나. 

“(고개를 끄덕이며) 선거 기간 중 건의한 건데 대통령 되자마자 바로 추진했다. 2월 25일에 취임했지 않나. 이튿날 뒤 국무회의에서 ‘나는 오늘 내 전 재산을 정부에 등록합니다. 여러 국무위원들도 이 선례를 따라 자기 재산을 등록해 주기 바랍니다. 주요 공직자들은 오늘부로 자기 재산을 등록해 정부가 이를 관리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공무원 재산 등록제가 만들어졌다. 세계화나 정보화 모두 대한민국 발전에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리면 거침이 없었다. 초고속 정보통신망도 선진국들과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경제기획원 부총리한테 전화해서 초고속 정보통신망 사업은 예타에서 제외해 바로 예산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정보화 후진국에서 정보화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결기의 지도자 YS


- 그런 결단성은 YS의 어느 면모에서 비롯됐다고 보나. 

“결기다. YS는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분이다. ‘나는 대통령이 한번 돼야 되겠다’ 하는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정말 위대한 나라로 만드느냐’ 하는 열망이 굉장히 컸던 분이다.” 
이렇게 운을 떼며 정치 초입 때의 YS를 조명했다. 

다음은 이각범의 얘기를 풀어쓴 것. 

YS는 1954년에 자유당으로 여당 국회의원이 됐다. 근데 당선되자마자 사사오입을 반대하며 여당을 탈당해 민주당으로 입당했다. 당시에 야당 의원들은 굉장한 핍박을 받았다. 야당 의원들이 생활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민주당적을 버리고 자유당으로 갈 때 YS는 정반대로 민주당 의원이 됐다. 아주 영예롭고 편하게 다음 당선은 떼 놓은 당상이었는데 YS는 자유당 의원직을 버렸다. 

“거기서부터 그분의 민주화 대장정이 시작된 거다. 결기를 볼 수 있다.”

결기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일화들도 보태졌다. 먼저, 엄상익 변호사가 쓴 글에서 봤다며 들려준다. 

# 이각범 설명, YH 사건 당시 

1979년 신민당 총재 시절 YS는 YH 노동자들이 당사에 들어와 농성장으로 쓰겠다고 했을 때 ‘여기서 해라’며 빌려줬다. 유신 정권에서 사주해 김태촌이라는 깡패가 들이닥쳤다. 다 도망가고 없자 마지막 5층 총재실로 가니 문이 잠겨 있었다. 도끼로 찍어 열고 들어갔더니 총재이던 YS가 똑바로 앉아 김태촌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눈빛에서 깡패 두목인 김태촌마저 섬뜩함을 느꼈다고 한다.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그래 나를 쳐라’ 하면서 그 자리에 딱 버티고 앉아 있는데, 본인도 깡패지만 ‘지금 이 역사적인 순간에 내가 어떻게 해야 되나’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나’ 주춤하다 떨리는 손으로 도끼로 내려치려고 했는데, 그 순간조차 YS는 피하지 않고 “쳐라”고 소리쳤다. 아무리 정권이 뒤에서 시킨 거지만 총재를 암살하는 게 되는 것이니 어떻게 무사할 수 있겠나. 김태촌은 떨리는 손으로 부들거렸다.

결국 YS를 덮쳐 창문 유리창을 뚫고 뛰어내리게 했다고 한다. YS는 옆에 건물의 슬레이트 지붕으로 떨어졌다. 김태촌은 그때 정말로 떨리고 힘들었다고 훗날 기자들 앞에서 회상한 바 있다. 

이번엔 이각범 본인이 직접 겪은 일화다. 

# 87 대선 이후 

YS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고 난 뒤 울분을 삭이고 있을 때다. 이각범은 같은 YS 대선 캠프 활동을 한 박세일 교수(서울대, 전임 정책수석)와 함께 YS 상도동 자택을 처음으로 찾아갔다. 

“국민들이 그토록 원하던 민주화를 두 분(김영삼 김대중)이 단합하지 못해 이룩하지 못한 잘못이 큽니다. 책임을 통감하시고 통일민주당 총재직에서 사퇴하십시오.” 이각범이 YS 앞에서 한 말이다. YS계에서는 무슨 저런 소리를 하냐며 깜짝 놀랐다. YS는 가만히 있었다. 

“그래요. 그 말이 맞아. 내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하나의 밀알이 돼야지” 이렇게 말하면서 “내일 바로 사퇴할 테니까 오늘 저녁에 두 사람이 사퇴 기자회견문을 써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각범은 그 길로 박세일과 함께 상도동 2층 서재에서 사퇴 회견문을 작성했다. 둘이 반반씩 나눠 썼다. YS는 하나도 고친 데 없이 다음 날 10시 기자회견을 했다. <조선일보>에서 일면 톱으로 내보냈다. ‘김영삼 총재 총재직 사퇴.’ YS는 4·19 수유리 묘지에 가서 참배한 뒤 설악산으로 떠났다.  

“그 정도의 결기가 있어야 대통령직을 제대로 할 수 있다.”

 

YS, 제2의 건국?


이각범

 

- 지방자치제 도입은 어떻게 해서 추진하게 된 건가. 

“1992년 노태우 정부 때 지방의회가 성립이 됐다. 그때까진 단체장이 임명제였는데 YS정부는 이를 확대해 단체장까지 선거로 뽑는 전면적인 지방자치제를 도입했다. 그래서 1995부터 실시하게 된 거다. 근데 난데없이 DJ가 1994년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하라고 단식 투쟁을 했다. 지금도 민주당에서는 DJ의 단식 투쟁으로 지방자치제가 전면 실시됐다고 하는데 1992년에 이미 지방의회를 했고 1995년에 단체장 선거를 하게끔 예정돼 있었다. YS의 머릿속에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는 지방권력이 중앙권력보다 덜 통제받기 때문에 너무 부패할 수 있어서 지방자치제를 반대했다. 그런데 YS는 지방자치제를 제대로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 지금도 지방자치제에 반대하나.

“대장동 문제 등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시장 당시 행한 부정부패 의혹들이 과연 성남시만의 일일까 하는 의문은 아직까지 있다.”

- YS가 ‘제2의 건국’을 통해 이룬 대한민국에서 우리 세대가 살고 있다는 분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YS는 제2의 건국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분은 대한민국 건국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시각은 다를 수 있다. 김정남 전 청와대 사회교문수석은 사석에서 신한국을 모토로 전 분야를 개혁해온 YS에 대해 ‘제2의 건국을 한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YS=제2의 건국론’은 박명림 연세대 교수도 YS 문민정부 업적 관련해 분석하며 이에 빗댄 바 있다. 이각범의 말은 그에 대한 반박보단 YS가 자유민주체제로 수립된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이를 계승하려 했다는 데 더 많은 방점을 뒀다고 본다. YS는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우리 국민은 참으로 위대합니다"라며 건국사에 대해 긍정한 바 있다. 
차치하고, 다시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본다. 

“YS는 돌아가실 때까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화해를 안 했다. 역사는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하지 않나. 역설적이게도 이승만의 건국, 박정희의 산업화를 가장 빛나게 하고, 대한민국 발전에 대한 역사적 자리매김을 제대로 한 분이 YS다. 왜냐하면 노벨경제학 수상자들이 썼듯이, 민주화가 없었으면 우리나라 경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룩한 상태에서 그대로 답보하고 있었을 거다. 고도성장을 하면서 부정부패가 많아지고, 지하 경제가 많아지고, 땅 투기·건물 투기·여러 가지 금융 상품 투기가 넘쳐났을 거다. YS는 이를 개혁했다.”

- 결국 YS가 이룩한 시스템 바탕안에서 지금의 우리 세대가 서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런 점들이 대중적으로는 잘 인식되고 있지 못한 듯하다.

“국민들이 YS 업적에 대해 잘 모른다. 그는 정말로 역사적으로 훌륭한 대통령임에도 업적이 많이 가려져 왔다. 민주화 세력이라고 어필해오는 민주당에서조차 YS 공로에 대해 폄훼하고 있다. 굉장히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암암리에 왜곡시키고 있다.”

이각범은 이리 말하면서 YS의 민주화 업적은 민주당 진영을 대표하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가장 높게 평가해왔다는 점을 꼬집어 지목했다. 그는 문 전 대통령이 YS 서거 2주기 때 밝힌 추모사를 가져와 인터뷰 자리에서 낭독했다. 야권 진영 일각에서 YS 업적을 왜곡하며 부산 김영삼민주주의기념관 건립을 반대하거나 3당합당을 두고 폄훼하는 목소리도 나오는데 이런 것을 의식한 듯 일부러 읊은 듯 보였다. 문 전 대통령의 추모사를 대신해 여야 좌우를 막론하고 YS 업적이 부정돼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거로 읽혔다. 나름 의중을 갖고 시간을 들여 길게 읽었다고 생각돼 문 전 대통령의 추모사를 개략해 옮겨 본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지도자가 여러 분 계신데, 그중에서도 김영삼이라는 이름은 가장 우뚝 서서 오늘에도 길이 남아 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1970년대에 유신정권에 맞서서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야당 지도자가 됐다. 민주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고 YH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기렸으며 유신정권으로부터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고초를 겪으셨다. 초산 테러를 비롯해서 개인적인 여러 암살 시도가 있었음에도 결국은 민주화를 이룩하셨다. 
특히 유신정권 때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의원직을 제명당하셨을 때 부마항쟁이 일어났는데 결국은 박정희 정권을 몰락시키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1980년대 김영삼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은 5·18 광주민주항쟁과 함께 다시 불타올랐다. 가택연금 중에서도 광주 민주항쟁 3주기를 기려서 시작한 단식 투쟁은 23일간 목숨을 건 긴 투쟁이었다. 
이 단식 투쟁을 통해서 독재의 어둠이 거치고 민주주의의 새벽을 불러왔다. 김영삼 대통령께서는 90년대까지 독재 권력에 맞서 온몸으로 민주화의 길을 열었다. 바른 길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대도무문의 정신을 가슴에 새겼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40여 년의 민주화 여정을 거쳐 도달한 것은 군사독재의 끝, 문민정부의 시작이었다. 
문민정부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남긴 역사적 의미는 결코 폄하되거나 축소될 수 없다. 우리가 오늘날 자랑스러워하는 4·19 혁명과 부마민주항쟁, 광주민주항쟁, 6월 항쟁이 역사에서 제자리를 찾았던 때가 바로 문민정부 때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후 3개월이 채 지나가지 않은 5월 13일 발표한 담화문에서 문민정부의 출범과 그 개혁은 광주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실현시켜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광주사태라는 이름을 광주민주화 항쟁으로 바꾸시고 광주민주화항쟁을 역사적인 기념비적인 의거로서 자리매김하셨다.”
-문재인 전 대통령 YS서거 2주기 추모사 중-

 

청렴과 인권의 대통령


이각범

- 민주당도 그렇지만 YS가 3당합당해 만든 국민의힘도 관련 업적을 잘 알고 있을까 싶다. 

“처음에는 YS가 한 업적들을 몰랐다. 자유한국당 당시 홍준표 대표와 김성태 원내대표 이런 분들이 있을 때 YS에 대한 업적을 듣고 싶다고 해서 내가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 앞에서 그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분들이 당의 어른으로 YS를 모시고 싶다고 해서 지금 국민의힘 당사에 세 분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이 세 분이다. 세 분이 다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있어서 큰 족적을 남긴 분들 아닌가.”

- YS 공로 관련해 추가로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YS는 청렴한 기반을 만들었지 않나. 아주 부잣집에서 태어나 민주당이 어려울 때 야당의 정치자금을 거의 대다시피 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나서는 돈이 너무 없어서 서예전을 해 자금을 마련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그런 청렴에 기반해 이룩한 건설 사업이 초고속 정보통신망이었고, KTX 사업이다. 입찰 과정에서 어떤 부정도 없었다. 그랬기에 우리나라 KTX가 정상적으로 흑자 운영되고 있다. 인천공항 건설도 YS가 했는데 이런 중요한 건설 사업 모두 어떠한 부정부패 없이 세계 일류로 지어질 수 있던 데는 YS 공로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한다.”

이어 그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여성 지위 향상에 대해서 굉장히 기여했다”는 점을 전했다.  

“YS 이전에는 상징적으로 정무2장관 딱 하나만 뒀다. 나머지는 여성이 장관을 못했다. 국회의원도 굉장히 한정된 숫자만 됐다. 그런데 YS는 국회의원 정수에서 여성 할당을 하고, 여성발전기본법을 만들어 여성이 취업할 때 임금의 제한을 두면 안 된다, 똑같은 조건으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정부에도 복수로 여성 장관을 임명하게 했다. 한때는 교육장관 환경장관 복지장관 등 이렇게 세 분이 여성 장관으로 내각에 있기도 했다. 그런 선례를 만들었다. 

또 문민정부 전만 해도 여자는 외국 대사로 나갈 수가 없었다. 여자가 외교부에 가더라도 ‘가정 살림을 해야지 외국 대사로 나가면 어떡하느냐. 남편이 따라가지 못하는데’ 하면서 못 나가게 했다. YS는 ‘그런 게 어디 있냐. 여자도 외교관으로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 하면서 최초로 여성 대사를 임명했다. 원래 이인호 서울대 교수를 여성 대사로 러시아에 보내려고 했는데, 그 당시 외교관들이 엄청나게 반대해서 인접 국가인 핀란드 대사로 임명했다. 그다음에 DJ가 러시아 대사로 임명하게 된 것이다.”

- YS가 초석을 다졌고 DJ가 계승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YS가 복수 여성 장관, 국회에 다수의 여성 의원들이 진출하게 했다면 DJ가 이를 계승했다고 보면 된다. YS가 한 정보통신사업도 DJ가 이어서 했다. 근데 지금은 정보화를 DJ가 한 걸로 알고 있다. 학자들이 나와서 우리나라 인터넷망은 DJ가 건설했다고 하는데 너무 잘못됐다고 본다. YS가 초고속 인터넷 1000만 시대를 열었다는 것을 잘 알 텐데….”

특히 정보화 실무 등에 깊게 관여돼 있던 그인 만큼 역사적 왜곡이 버젓이 진행되고 있는 것에 더 많이 억울할 듯했다. 

 

YS와 이각범 


- 끝으로 YS와의 인연에 대해 말해준다면.

“내가 옛날에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다. YS를 모시던 서울대 학생운동권 출신의 참모로부터 내 얘기를 듣고서 만나자고 연락을 해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때가 6월항쟁 직전인 5월 말인가 6월인가 그랬다.”

YS가 통일민주당 창당하면서 용팔이 사건으로 당사를 뺏겼던 시절, “YS가 갈 곳이 없어 서울 무교동에 있는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 한편에 민추협 의장 겸 통일민주당 총재로 있을 때다. 그때 나를 불러서는….”

YS : 우리가 이번에 새로운 민주헌법을 반드시 이뤄내 대통령 직선제를 할 건데 내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겁니다. 
이각범의 눈에 YS는 확신에 차 있었다. 
YS : 집권하면 군사정부보다도 민주정부가 더 나은 정책을 펴고, 우리나라를 더 발전시켜야 되지 않겠소. 그런데 우리한테는 인재가 거의 없어요. 아스팔트 위에서 고생하느라 전문가들을 길러내지 못했어요. 대학에 있는 분들이 많이 도와줘야 됩니다. 

- 그래서 뭐라고 했나. 

“선뜻 ‘제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능력도 모자라지만, 할 수 있는 한 모시고 일하겠다’ 그렇게 했다.”

- 박세일 교수도 그때 알게 된 건가.

“나를 천거한 참모와 박세일 교수를 천거한 참모가 달랐다. YS가 그즈음 서울대를 졸업한 참모들한테 ‘서울대 교수들 중에서 좋은 사람이 있으면 천거해 봐라’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내가 천거 받은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박 교수도 추천을 받은 것 같다.”

이각범과 박세일은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YS의 세계화 추진은 박 교수의 제언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각범= 1948년 부산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독일 콘스탄츠대와 빌레펠트대에서 박사 학위, 동국대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교환교수, 감사원 산하 부정방지위원회, 한국정보사회학회장, 한국미래연구원장, MB정부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민간위원장,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준비위원, 카이스트 명예교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