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하면 망한다…보수 몰락史의 트리거 ‘이회창 학습효과’ [옛날신문보기]

모든 카드 사용한 김대중 vs 분열에 분열 거듭한 이회창

2024-12-03     이윤혁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이윤혁 기자]

이회창

1997년에 치러진 15대 대선을 돌아보면 그해는 보수 진영의 가장 충격적인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선거 150일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 상으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가 선두를 달렸지만, 추세를 지키지 못하고 결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선에서 여당이 패배했다. 원인은 무엇일까. <시사오늘>은 당시 이회창 후보의 패배로 보수가 몰락한 순간을 되짚어본다. 

 

 구도의 불리함


선거는 구도를 어떻게 형성하느냐가 승부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다. 15대 대선은 범보수진영이 나뉘어 다자대결 구도로 치러졌다. 신한국당 경선에 나선 이인제 후보는 2위를 차지하며 결선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으나,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9월 13일 당을 탈당해 독자 출마를 선언한다.
 

“李(이) 지사 출마 선언

李仁濟(이인제) 경기도지사는 13일 신한국당을 탈당, 대선 독자출마와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李(이) 지사는 이날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맨하탄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세대교체만이 30년의 낡고 병든 3김 정치구조를 청산하고 깨끗하고 신뢰받는 생산적인 정치의 틀을 창조할 수 있다’며 독자출마를 선언했다.

李(이) 지사는 신당 창당 및 세력 확대 문제에 대해 ‘각 분야의 창조적 인사, 범민주 개혁 세력과 연대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국민정당을 건설한 것’이라며 ‘신당 창당은 서두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경선결과에 무조건 승복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당원과 국민 여러분에게 정치인의 한사람으로 진심으로 사죄한다’면서도 ‘그러나 경선 이후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해 모든 것이 뒤엉켜 또다시 국민들이 나를 불렀다’고 주장했다. 李(이)지사는 추석 연휴가 끝난 뒤 지지인사들을 규합, 10월 중순쯤까지 신당 창당을 완료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9월 14일 <조선일보> 기사 중 

 

 김대중·김종필의 DJP연합


김종필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가장 성공한 단일화로 꼽히는 김대중(DJ)·김종필(JP)의 DJP연합도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당선되면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함께 내각을 구성하는 등 공동 정부를 운영한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DJP 단일후보체제 출범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3일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문 서명식을 갖고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로의 단일후보 체제를 출범시켰다.

국민회의 김대중,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서명식 후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집권할 경우 앞으로 5년간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99년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할 것을 공약했다.

두 金(김) 총재는 이르면 5일 박태준 의원과 3자회동을 갖고 이른바 ‘DJT 3인 연대’를 선언할 예정이다.

기자회견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단일후보로서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양당간 후보단일화는 정치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치적 거보’라며 ‘단일화 성사를 통해 분열주의 정치를 청산하고 지역계층 세대를 넘어 통합과 참여의 정치를 실천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 1997년 11월 4일 <매일경제> 기사 중


이렇듯 이회창 후보가 보수 진영의 표를 모두 규합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김대중 후보는 다양한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 충청도에서 43만여 표 차이의 격차를 벌리는 승리를 거두는 등 연합은 성공적이었다. 

 

스스로 자초한 대선 패배


IMF

다만 이러한 세력 규합의 차이에도 두 후보의 격차가 고작 1.53%포인트밖에 나지 않았다는 점을 보았을 때 이회창 후보는 질래야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졌다는 것이 증명된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회고록을 쓴 전영기 <시사저널>편집인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JP가 이 후보의 손을 잡지 않았던 이유로 이같이 증언했다. 
 

“어쨌든 그때 이회창 총재가 교만했다고 봐요. 자기가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본 거죠. JP는 말이죠. 사실은 교만함에 대한 몽니였던 것 같아요. 충청도 말로 심술부리는 거 있잖아요. 너무 자기를 무시하는 거야. 나이도 자기가 위고 정치경력도 위고 모든 면에서 존중받아 마땅한데 너무 무시한 거예요. 그래서 몽니를 부리듯 DJ한테 간 측면도 있다고 봐요.”

-2024년 1월 6일 <시사오늘> 기사 중 


아울러 이회창 후보는 이인제 후보의 탈당 및 대선 출마 역시도 사전에 만류할 기회가 있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1997년 8월 27일, 이인제 지사 출마설이 파다할 무렵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이회창 후보와 자리를 같이했다.(중략)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에게 ‘이인제 지사를 직접 찾아가 출마를 만류하도록 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이인제 지사를 찾아가지 않았다.

이인제 지사는 9월 13일 당을 탈당하고 11월 4일 국민신당을 창당해 정식으로 대선 후보로 나섰다, 같은 당에서 한솥밥을 먹는 민주계가 이인제 후보 쪽으로 합세하고 여론조사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신한국당이 마지막 반전의 열쇠로 내놓은 것이 DJ비자금이었다.”

- 신경식 회고록 중

이회창

1997년 대선에서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는 19.2%나 얻었다. 두 후보가 분열되지 않았다면 그 표는 고스란히 이회창 후보 몫이 됐을 것이고 그랬다면 1997년 대선은 김영삼(YS) 문민정부의 정권 재창출이자 신한국당의 승리로 돌아갔을 것이 자명했다는 평가다. 

또 국민신당에 입당해 이인제 후보를 지지한 박찬종 전 의원도 처음에는 이회창 후보에 합류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혜훈 전 의원 등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정치인들 말을 종합하면 돈암장에서 박찬종 의원을 만나보라는 참모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이회창 후보는 “늦은 시간에 갈 필요가 있나”라며 만나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결국, 당시 한국 사회의 정치지형이 보수에게 굉장히 유리한 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김종필과 박찬종, 이인제까지 그 누구도 잡지 못한 이회창 후보 자신의 실책이 가장 큰 패배의 원인이라 분석할 수 있다. 선거공학상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를 분열과 분열을 거듭한 끝에 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후 이회창 후보는 16대 대선에서도 노무현 후보에게 패하며 또다시 정권을 내줬다. 이처럼 15대 대선은 보수 몰락과 재편을 촉발한 트리거가 됐고, 역사적 전환점으로 남았다. 분열하면 망한다는 학습효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한편 이회창 후보의 대선 패인에는 병풍 사건을 비롯해 YS에 각을 세워 민주계 진영의 반발을 샀던 점도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3김 청산을 강조하며 대통령을 배척해 분열을 촉진했음에도 선거 결과 상당히 접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YS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동수 정치평론가는 관련해 지난달 28일 통화에서 “문민정부 아래서 총리를 역임한 이회창이 대선 당시 YS를 비판했는데, 대통령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페어플레이한 것도 일정 부분 작용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 본 기사에 인용된 여론조사의 자세한 조사 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http://www.nesdc.go.kr)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