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드는 개헌…김종필 내각제 합의는 왜 번번이 깨졌나? [유경민의 정치여행]

비상계엄 사태로 본격화되는 개헌 논의 ‘내각제 개헌 카드’, 정치권 게임 체인저?

2025-02-06     유경민 기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유경민 기자]

서울

최근 여권을 중심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청산하자는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7일 제헌 헌법이 생긴 이후 202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9차례 개정 과정을 거쳐 개정돼 왔는데요. 그러나 1987년 9차 개헌 이후 개헌에 성공했던 정부는 없습니다. 역대 정부에서 개헌 논의를 여러 차례 추진했지만 매번 무산됐습니다. 

내각제 개헌 중심에는 항상 김종필 전 총리가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6월 민주항쟁이 발생한 1987년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6월 항쟁 직후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 덕분에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은 불안정했습니다. 미약한 지지 기반 속에서 시작해 이듬해 열린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민정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해 여소야대 정국이었습니다.

노태우는 여소야대 정국을 해소하기 위해 ‘보수대연합’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제로는 세력의 한계에 부딪혀 1인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종필은 의원내각제를 조건으로 제시했고 노태우도 합의했습니다. 1989년 3월, 두 사람은 청와대에서 만났는데요. 사실상 합당에 합의한 겁니다. 

 

3당합당 後 내각제 파동


김영삼은 1989년 6월 소련 방문 후 노태우를 만난 자리에서 “정책 연합이 아닌 합당을 해야 한다”고 제시했습니다. 그는 군부가 계속해서 집권하게 되면, 군정 종식의 시대적 요청을 외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김대중의 연이은 약속 파기로 야권 통합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여당과의 합당이라는 전략적 방안을 택했습니다.   

1990년 1월 22일 오전 10시, 노태우와 공화당의 총재인 김종필, 그리고 민주당 총재인 김영삼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세 사람은 민정당과 공화당, 민정당을 통합한다는 공동 발표문을 내놓으면서 3당 합당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리하여 개헌이 가능한 216석을 차지한 초거대 여당 민자당이 출범했습니다. 

내각제를 연결고리로 노태우와 김종필 그리고 김영삼이 뭉쳤습니다. 당시 김영삼은 3당 합당 심경을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해 10월 25일 <중앙일보>에서 3당 통합 직전에 노태우·김종필·김영삼이 내각제에 합의한 각서가 공개됐습니다. 이른바 ‘내각제 각서 파동’입니다.  

이에 김영삼은 자신을 음해하려는 ‘공작정치’라며 노태우를 몰아세웠고, 당무 집행을 거부하고 경남 마산으로 낙향했습니다. 여론 또한 김영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이 발휘된 겁니다. 노태우는 김영삼을 달래기 위해 ‘내각제를 포기하겠다’고 약속하고 서울로 불러들였습니다. 당권 또한 내주면서 결국 내각제 합의는 물거품이 됐습니다. 

 

DJP 연대 도모했지만…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당선되면서 문민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고자 했던 김종필과 대통령제를 고수하는 김영삼의 갈등은 불가피했습니다. 김영삼은 김종필에게 ‘2선 후퇴’를 종용했는데요. 결국 1995년 김종필은 민자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고 총재가 됐습니다.

아울러 그해 6월 27일에 열린 첫 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대전·충남·충북·강원 4개 지역에서 승리하면서 선방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대선 정국 당시 이회창은 민주당과 합당해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꾸고 조순 후보와 단일화를 했습니다. 또한 이인제가 신한국당의 경선에 불복하면서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김대중과 이회창은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만 했습니다.

김대중은 김종필 집에 직접 찾아가 “내각제를 할 테니 제발 도와달라”며 “내각제는 받아들일 만한 제도다. 2년 내에 국민의 뜻을 물어보고 시행하겠다”고 설득했습니다. 김대중은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연합’을 성사시켰습니다.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으로 하고 공동정부의 국무총리는 김종필이 하는 것을 포함해, 2년 이내에 내각제 개헌을 완료하고 개헌 후 초대 대통령과 수상의 선택을 자민련이 우선권을 갖는 등 협약을 맺은 것입니다. 

1997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39만 표 차이로 겨우 이회창을 누르고 당선됐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자민련과 연합한 공동 정부였고, 자민련은 한나라당 못지않은 보수세력의 산실이었기에 정책 입안 과정에서 자민련과의 불협화음은 불가피했습니다. 또한 거대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견제가 있었습니다.

김종필은 김대중에 의해 국무총리에 지명됐지만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임명에 동의하지 않아 6개월 동안 서리로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1998년 8월에 국무총리에 임명됐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 1차 과제였던 IMF 위기를 극복하는데 총력을 다해야 한다는 이유로 내각제를 유보했습니다. 1999년 7월 21일 김대중과 김종필, 박태준은 연내 내각제 개헌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는 견고했던 ‘DJP연합’이 결별 수순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내각제 개헌 유보 공식 발표는 자민련 내 ‘내각제 강경파’인 충청권 의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충청권의 맹주’로 불리던 김종필은 당 복귀 의사를 밝히면서 충청권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내각제 개헌 유보 결정 발표 이후 충청권 민심이 좋지 않아 그대로 방치할 경우 16대 총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왔는데요. 이러한 위기감이 김종필의 잦은 충청권 방문으로 이어졌습니다.

2000년 1월 12일, 김종필은 공동정부 총리직에서 물러나 자민련에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실시된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55석에서 17석으로 추락하며 위세가 크게 꺾였습니다.

아울러 김대중의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이견으로 자민련과 불화를 가져오기 시작했습니다. 김종필은 햇볕정책 집행에 앞장서서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핵심 인물인 임동원 통일부 장관을 해임할 것을 건의했지만, 김대중은 공조를 깨더라도 임 장관을 해임할 수 없다는 굳은 결심을 보여줬습니다.

2001년 9월 3일,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국회 해임안이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동맹에 의해 가결됐습니다. 이로써 3년간 유지됐던 ‘DJP연합’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을 지낸 정균환 전 의원은 당시 내각제 파기 배경으로 지난해 8월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현실에 부닥친 이유가 컸다”며 "우리나라 국민들은 내각제를 싫어한다. 국민이 원치 않는 데다 여소야대 국면이라 돌파해나가기 어려운 구조였다”고 소회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