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놓은 국회, 속타는 재계
경제 불투명성 심화에 불안감 표출하는 CEO 규제개혁 법안 처리해야 할 정치권은 식물국회 상법·공정거래법 처리 지연에 일각서는 미소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박근홍 기자]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글로벌 경제 위기감 고조, 지속되고 있는 내수 경기침체 등으로 재계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가운데, 이를 해소하는 데에 보탬이 돼야 할 정치권은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양새다.
18일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는 각각 '2019 하반기 산업전망', '우리 기업의 미래준비실태 조사' 자료를 공개하고 대내외 여건 악화로 국내 산업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호소했다.
전경련은 올해 하반기 자동차, 조선업 등을 제외한 나머지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전자 등 주력 제조업 업황이 부진하거나 불투명하다고 내다봤다. 미중 무역전쟁의 심화, 인건비 상승 등으로 산업계 전반에 먹구름이 꼈다는 것이다. 전경련 측은 "주력산업의 위기는 곧 실물발 경제위기로 연결될 수 있는 만큼, 모든 경제주체들이 비상한 각오로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협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상의도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 대한상의는 국내 제조업체 500개 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미래준비실태 조사에서 "대외경쟁력은 악화일로고, 4차 산업혁명을 활용한 신사업도 진척되지 않고 있어 성장 원천이 고갈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샌드위치 현상 심화 △4차 산업혁명 신기술 활용 애로 △미래 수익원 부재 등 삼중고를 겪으면서 한국기업의 미래와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이 날로 불안해지고 있어 근본 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국내 재계의 마이크 역할을 하는 두 경제단체가 같은 날 이 같은 자료를 내놓은 건 현재 정국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게 중론이다. 선거법-공수처법 패스트트랙을 기점으로 개점휴업에 들어간 20대 국회를 향해 전경련과 대한상의가 각종 경제활성화 법안과 규제개혁 법안을 처리해 달라고 간접 압박에 들어갔다는 분석이다. 경제위기 골든타임을 놓치기 전에 제도와 플랫폼을 정비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치권에 피력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하루 전날인 17일 국회를 직접 방문해 여야 5당 원내대표를 면담하고 국민과 기업을 위해 국회가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박 회장은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를 만나 "여야 한쪽의 승패로는 결론이 나지 않는다. 대화하고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우리가 처한 경제 현실을 붙들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진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의 만남에서도 그는 "정치가 기업과 국민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붙들어줘야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보인다"고 강조했다.
또한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재벌 대기업 총수들도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최근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침묵의 리더십'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이달 들어 최고경영진 전략회의를 3차례나 소집하며 "10년 뒤를 장담할 수 없다. 새롭게 창업한다는 각오로 도전해야 한다"고 위기론을 꺼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역시 지난달 한 토론회에서 "기존 성공 방식을 고수해서는 성공을 보장하기 힘들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 부회장과 최 회장이 각각 국정농단 사건 대법원 선고·삼성바이오로직스 수사, 라오스댐 붕괴 SK건설 책임론·동거녀 논란 등 사회적 이슈로 부침을 겪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는 정부와 정치권을 의식한 발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단순 자기보호 차원이 아니라 대내외 악재와 경기둔화에 따른 불안감이 산업계 전반에 고조되고 있음을 스스로가 마이크가 돼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는 여전히 '식물국회'다. 민주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등 여야4당은 공동으로 임시국회를 소집, 오는 20일 6월 국회를 개회키로 했다. 그러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의 국회 복귀가 불투명해 추가경정예산안 심사와 민생경제 법안 처리는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와 김현준 국세청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계기로 한국당이 6월 국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오지만, 정치권에서는 한국당이 청문회와 의사일정을 별개로 참여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재계가 겉으로만 일하는 국회를 요구할 뿐, 속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대로 식물국회가 장기화된다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 개정안, 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감독법 개정안 등 재벌 대기업들의 적폐를 청산시킬 수 있는 각종 법안들이 빛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대관팀 관계자는 "내년 총선 준비로 인해 의원들이 사실상 의정활동에 손을 놓은 상태라고 보면 된다. 의원은 물론이고, 보좌관들 얼굴 보기도 어렵다. 패스트트랙은 핑계에 불과한 것 같다"며 "현재 계류 중인 법안들은 대부분 20대 국회와 함께 그대로 묻힐 공산이 크다. 다가오는 국정감사도 요식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솔직히 기업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