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강화에서 북녘을 보다
〈최기영의 山戰酒戰〉 강화도 바이크 여행길에서 느낀 역사의 데자뷔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최기영 피알비즈 본부장)
약 150여 년 전 강화도는 정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의 군함이 각각 쳐들어오더니 1875년에는 이상한 국기를 단 군함 한 척이 강화도에 또 나타났다. 일장기를 처음 본 우리 병사들은 그 배의 동태를 긴장감 속에 유심히 지켜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 큰 배에서 작은 배가 하나 내려오더니 초지진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위협을 느낀 우리 군이 포를 쏘며 접근을 저지하자 그 작은 배는 후다닥 군함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 이상한 국기를 달고 있던 군함은 기다렸다는 듯이 초지진을 향해 포를 쏘기 시작했다.
이틀에 걸친 공격에 초지진은 박살이 났다. 일본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종도로 상륙해 사람들이 사는 집에 불을 지르고 약탈한 가축들로 잔치를 벌인 다음 유유히 사라졌다(운요호사건). 그 뒤 그들은 우리의 공격으로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며 협상을 요구했다. 결국 그렇게 '강화도조약'(1876년)이 체결됐고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했던 한반도 병탄의 역사가 시작됐다.
지난주 나는 강화도 마니산을 올랐다. 서울을 빠져나와 김포를 거쳐 강화 초지대교를 건너서 섬으로 들어갔다. 강화도 마니산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정겹고 즐겁다. 마니산은 정상의 참성단(塹星檀, 468m)까지 등산로가 계단길로 포장돼 있다. 그래서 노약자나 초심자들도 비교적 쉽게 산을 탈 수가 있다. 입장료를 내고 마니산 입구를 통과해 직진하면 계단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계단이 없는 단군로가 나온다. 나는 주로 단군로로 올라가서 계단길로 하산한다. 오르는 내내 계단을 오르는 건 지루하고 재미가 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산을 타면 쉬엄쉬엄 걸어도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마니산은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산이다. 섬 산이 그렇듯 바다와 섬마을과 구름이 어우러진 일망무제의 풍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코스가 아쉬우면 마니산 정상 참성단에서 함허동천이나 정수사 방면으로 길이 있는데 그곳으로 하산하면 1∼2시간 정도를 더 걸을 수 있다. 마니산 정상에는 우리 민족 시조인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다. 지금도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제를 올리고, 전국체전의 성화도 이곳에서 채화한다.
나에게는 다루기 쉬운 미들급 바이크가 하나 있다. 우리나라는 오토바이의 고속도로나 자동차전용도로 진입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중·장거리 라이딩을 즐기려면 국도나 지방도로를 탄다. 그러다 보니 정겨운 시골길로 들어설 때가 많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는 그러한 바이크를 타고 가는 여정 그 자체가 너무 즐겁다.
이날도 나는 바이크를 타고 강화도로 향했다. 가볍게 산행을 마치고는 해안도로를 따라 바다 풍광을 즐겼다. 강화의 해안도로는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찾는 명소다. 굽이굽이 천천히 해안선을 따라가는 라이딩은 더없이 재미가 있고,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등 강화도의 아픔이 있는 군사적 유적지도 직접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평화전망대에도 갔었다. 그곳에 오르면 손에 잡힐 듯 바로 바다 건너에 있는 황해도 땅이 보인다.
그렇게 강화 투어를 하고 강화군의 또 하나의 섬인 교동도로 향했다. 교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군인들이 신원을 확인하고 발급하는 방문증을 받아야 한다. 교동은 과거 조선 시대 왕족들의 귀향지이기도 했다. 광해군과 연산군도 이곳으로 유배됐었다. 그리고 박정희,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 벽보도 볼 수 있고 정겨운 재래시장도 있다. 교동은 그렇게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예전 70년대 고향마을 모습 그대로다. 난 교동에 들리면 꼭 강화쌀을 산다. 언젠가 교동에서 쌀을 한번 사갔더니 식구들이 그렇게 밥맛이 좋다고 해서 그 뒤로는 이곳 쌀만을 먹고 있다.
그날 집에서 강화도까지 가는 거리가 편도 약 70여Km 정도 됐다. 강화대교 위로 황해도를 연결하는 다리가 하나 놓인다면 강화에서 개성까지가 서울과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게 된다. 그렇게 황해도를 훤히 볼 수 있는 강화도는 남북한 교전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 항몽의 역사까지 포함해서 강화도처럼 사연 많은 섬이 또 어디 있을까. 그렇게 강화도는 우리 민족의 풍파를 가장 고되고 아프게 겪어 왔다.
올 초 일본의 초계기가 우리의 해군 함정에 근접 비행을 하며 위협을 했었다. 그들은 우리 함정이 먼저 레이더로 그들을 겨냥했다고 했다. 최근에는 강제노역 피해자들에게 전범 기업인 일본제철이 각각 5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우리 대법원의 판결을 문제 삼으며 일본 정부가 경제보복 조치에 나섰다. 보상이나 그 어떠한 사과도 받아본 적이 없는 피해자들에게 힘으로 '강짜'를 부리며 되레 겁박하는 것이다. 마치 과거 강화도조약 회담장 주변에서 포를 쏘아대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협박했던 것처럼 말이다. 자꾸 150년 전 운요호 사건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지금 강화도에 있기 때문일까.
나의 바이크는 강화도에서 서울로 향해야 했다. 통일이 된다면 바이크를 타는 사람들에게 강화도는 북한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강화도조약을 맺었던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우리나라의 국위를 이번 기회에 일본인들에게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하며 우리의 강화쌀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최기영은…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前 우림건설·경동나비엔 홍보팀장
現 피알비즈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