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결심, 92년부터”
○“文정부, 적폐 청산 올해로 마무리해야”
○“안희정과 함께 둘이 잘 나갈 날 올 것”
○“대망론? 나보다 유능한 대선주자 많아”
○“K-뉴딜과 행복 세트 도시가 미래 관건”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윤진석·한설희 기자]
인류 앞에 코로나라는 시험 문제가 놓여 있다. 선진국들이 무너지고 기후 악화와 질병의 창궐까지.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절체절명 위기 앞에서 노아의 방주와 같은 새로운 모델을 찾는 여정이 시작됐다. 미국이 AI 분야에, 중국이 데이터 분야에 앞서있다는 평가 속에 닥쳐올 디지털 세상은 누가 이끌 것인가. 이 시험 문제를 누가 푸느냐가 디지털 혁명의 주인공을 판가름하게 된다. 농경문명의 중국, 산업문명의 서양에 이어 디지털 문명의 주역이 될 기회가 한반도에도 오지 않을까.
진화하는 친노 '전략맨 이광재'의 말이다. 현실 정치로 돌아온 그는 거센 파고의 오늘 앞에, 손은 시험지에, 눈은 국가의 장기 비전을 준비하는 미래를 향해 있다.
고목나무라고 해서 죽어있는 것들만 있지는 않다. 이끼가 자라 움튼다. 생명이 싹트는 광경 앞에서 위기를 돌파할 힘을 얻었다고, 오래 전 어느 강연해서 소회하던 때가 생각난다.
돌아올 사람은 돌아온다. ‘노무현의 오른팔’로 불린 그는 원조 친노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한국형 뉴딜의 설계자로 하반기 국정운영의 ‘인간 싱크탱크’ 역할을 맡고 있다.
정치인 중엔 풍운아가 많다.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 역시 저점과 고점, 굴곡을 넘나들었다.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83학번 법학과를 졸업했다. 학생운동 출신이다. 88년 노무현 대통령이 13대 국회의원일 당시 23살 제일 나이 어린 비서관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참여정부에서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냈다. 권력의 중심부로 부상하며 실세라는 소문이 돌자 직을 던지고 내려왔다.
2004년부터 8년간 17‧18대 국회의원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힘썼다. 2010년 민선5기 제35대 강원도지사에 당선됐다. 십 년 가까운 정치 공백기 동안 중국 칭화대학교 등 세계를 오갔다. 민간 싱크탱크 여시재 원장에 있으면서 국가의 백년대계를 고민했다. 사면 복권 뒤 21대 강원도 총선을 총괄했다. 원주갑에 출마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취미는 일하는 거다. 말보다는 정책을, 시스템을 만들고 설계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관심이 많다.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이 디지털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느냐가 고민이다. 목표는 일과 소득·주거·교육·의료·문화가 한 공간 안에서 해결되는, 삶의 질이 충족된 행복 세트 도시를 만드는 데 있다. 저비용 시대 속 그린 기후 선진국가와 일류 교육 국가도 꿈이다. 조선시대 세종이 한글을 통해 백성 모두가 공유하는 문자를 만들었듯 코로나 이후 언택트 사회를 대비해 누구나 누리는 개방형 교육의 플랫폼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국회도서관 자료 등 저작권 문제를 해결해 다함께 이용할 수 있는 지적 시스템을 구상 중이다. 교육판 넷플릭스 등을 통해 전 국민 창조의 동력으로 삼을 예정이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저서의 골자와 같이 ‘진보는 보수에게, 보수는 진보에게 배우자’라는 평소의 지론이 있다. 통합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다. 좌우 분열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새로운 대한민국 문명의 내일은 없다는 논리다. 이념에 치우치기보다 실리와 통합, 초당파적 면모가 두드러진다는 평가다.
올해 나이 56세. 백세 시대로 보면 절반을 건넜다. 유구한 역사와 철학을 사랑한다. 시골 소년에서 큰 꿈을 좇기까지 정치인보다는 정치가로 살아온 이광재 의원.(이하 이광재) 인터뷰는 지난 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가졌다.
1. 우량주로 주목하는 이유
“나는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다. 누가 더 진화하느냐가 중요”
-by 이광재
당위론적으로 보면 잠재적 우량주와 같다. 유력주자는 아니나 잠룡 후보군 중 주시되는 인물이다. 차기 강원도지사 설도 있지만 미래주자로 거론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점부터 짚었다.
- 진보 진영에서 볼 때 보수 쪽 대권주자로 누가 제일 뛰어나냐 하면 원희룡 제주지사에 대해 얘기를 합니다. 보수 진영에서는 진보 쪽 대권주자로 누가 제일 합리적이냐 물으면 이광재 의원이라고 지목하는 거죠.
“그럼 후보가 안 된다는 말이네.(웃음)”
- 요즘 통합이 화두잖아요? 주목되는 이유일까요.
“정치에서는 적을 만들 때가 가장 쉬워요. 쟤가 나쁜 놈이다, 쟤 때문이라고 하면 결집하는 게 쉬워지죠. 아마도 경계의 지점에서 양자를 통합하고 대화가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봐주는 것 같아요. 합리적이라는 평가겠지만 어떻게 보면 회색군자라는 말도 되겠죠. 나는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아요. 누가 더 진화하는데 현실적이고 정확한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죠.”
- 스스로 회색군자라고 하네요.
“나는 회색군자가 괜찮다고 생각해요. 이란에서 석양을 볼 때였어요. 석양은 아름답잖아요? 왜일까…. 낮과 밤이 만나는 지점이니까. 일출은 왜 아름답나. 낮과 밤, 그리고 아침이 만나는 지점이니까. 서로 다른 성질이 만났을 때 역동적인 변화가 생겨요. 혁신적 에너지, 미래가 생기죠. (사이) 경계지점이 모호하고 불투명하면 위기가 올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지향점을 갖고 양자를 모으면 강렬한 에너지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 통합이라는 화두는 차기 대선에서도 중요한 방향타 역할을 할 거로 봅니다. 잠룡 중 한 사람으로서 결심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요. 그건 옛날 생각이죠. ‘30대 때는 정도전처럼 살고 40대 때는 이성계처럼 살겠다.’ 철없을 때는 그런 마음을 먹은 적도 있어요. 근데 권력의 꼭대기부터 저 아래까지 가봤잖아요. 30대는 국정상황실장에 국회의원도 하고 40대 때는 최연소 도지사도 하고 방랑생활도 했어요. 싱크탱크에서도 있어봤고, 동계올림픽하면서 전 세계 많은 나라도 가보게 됐고…. 이제는 뭘 하겠다기보다 우리나라가 좀 더 나은 쪽으로 가는데 보탬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더 행복한 일 같아요.”
- 그래서 더욱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대권의 꿈은 없나요.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고수는 널려 있어요. 한국 정치의 큰 문제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에요. 정치를 망치고 말죠.”
- 지난 4월 21대 총선 때 원주를 갔는데요, 거기 분들이 그러길 ‘큰 정치하는 이광재를 밀어줘야 한다’고. 대망론에 기대를 거는 분들은 아쉽겠어요.
“실제 그러겠어요.(웃음) 도지사 때를 생각해 아쉬워하는 마음일 수도 있겠죠.”
지난 2010년 이광재 의원은 ‘박연차 사건’ 관련 불법 정치자금법 수사에 연루돼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상황에도 54.36%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자랑하며 최연소 강원도지사로 당선되는 저력을 보였다. 하지만 2심 판결이 나면서 취임 1개월 만에 내려와야 했다. 이 의원은 억울하다며 항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것도 있겠고, 강원도가 좀 홀대받는 느낌이 있잖아요. 도를 위해 일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아요. 큰 정치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들도 있겠지만요.”
이광재는 재작년 12월 30일 특별사면된 이래 9년 만의 정계복귀임에도 녹슬지 않은 건재함을 보였다. 이해찬 당시 대표의 설득 작업 끝에 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강원도 선거를 책임졌다. 기존보다 3석이 늘어 ‘이광재 효과’라는 말도 나왔다. 본인이 출마한 원주시갑에서는 48.6%로 당선됐다.
- 더 들어가면 말이죠. 강원도 대망론이 뜨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지역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생각인데요,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영남패권론에 있다고 보입니다. 결국 영남에서 대통령이 또 나오지 않나 싶어요.
“꼭 그런 건 아니겠죠. 우리나라는 지도자가 약하고 국민이 강한 나라에요. 전 세계적으로 4‧19, 6월 항쟁, 촛불혁명 등 이런 걸 이룬 나라가 없어요. 그런 힘으로 지역 색도 점점 얇아지고 있지 않나요. 엄밀히 따지면 지역감정이 원래부터 심했던 나라도 아니었고요.”
박정희 정권 때부터 권력 강화를 위해 지역감정을 악용한 측면이 있다고도 전해진다.
“김부겸 선배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 슬프죠. 한번은 더 극복해야 될 과제 같아요.”
- 지역을 떠나 ‘이광재 대망론’이 부상한다면 나설 의향은요.
“나보다 유능한 사람이 많잖아요. 하하.”
민주당의 친노, 친문 적자 내에서는 이광재 외에도 김경수 경남지사, 김두관 의원 등이 대선주자 후보군에 올라 있다. 이중 김경수 지사는 드루킹 댓글조작 혐의로 기소된 재판 결과에 따라 족쇄가 풀릴 경우 가장 유력한 친문 주자로 부상할 조짐이다. 하지만 본선 진출의 현실성은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 대권 생각이 없다면 말이죠. 민주당이 이낙연 VS 이재명 양강구도로 흐를 거라는 전망이 많잖아요. 양쪽 모두 ‘이광재 영입’ 경쟁이 치열할 것 같은데요. 킹메이커로 나설 생각은 없나요.
“난 노무현 대통령 한 사람만 사랑한 것으로 충분해요.(웃음)”
- 그럼 중립을 지키겠다?
“민주당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성공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쓰여야겠죠.”
2. 경계인의 일침
“혁명보다 어려운 게 개혁”
-by 이광재
‘노무현이면 충분하다’는 말에 이 대목이 궁금했다. 그는 과거 신한국당(현 국민의힘)의 15대 대선 후보 경선 때 YS 상도동계 좌장인 김덕룡(DR) 후보를 도운 바 있다. 9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15대 총선의 정치1번지 종로에서 낙선 후다. ‘노무현 캠프’에 있던 이광재 의원은 신한국당(현 국민의힘)내 9룡 중 한명인 DR을 찾아가 그와 함께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두 사람의 인연은 통일민주당 때부터다. YS가 통일민주당 총재였고, 정치 신인이던 노 전 대통령은 같은 당 13대 초선의원이었다. 상도동계 DR은 물론 88년부터 노무현 비서관으로 정치를 시작한 이광재도 통일민주당에서 다함께 한솥밥을 먹던 때다. 3당 합당을 계기로 나뉘긴 했지만 96년 DR의 대선 경선을 계기로 다시 함께하게 된 것.
- 어찌 됐든 영남당이었던 신한국당에서는 DR을 통해 호남 대통령을 만들려고 해봤고 거꾸로 호남당이던 민주당에서는 영남대통령을 만들려고도 해 본거네요. 나름으로 얻은 승리 방정식들이 있을 듯싶어요.
“DR한테 간 것은 대선의 메커니즘을 배우기 위해서였어요. 어떻게 대선이 돌아가는가를 배웠죠.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는 이걸 배웠죠. 그분의 일관된 주장이기도 했는데 ‘정치인이 자기 연설문을 스스로 쓸 수 없으면 지도자가 되지 못한다’는 거였어요. 두 번째는 ‘지도자와 평범한 사람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근데 평범한 사람은 실천하지 않는 거고 지도자는 자기 목숨을 걸고 결단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노통은 연설문도 스스로 쓰고 정치 목숨을 걸고 신념을 위해 싸웠잖아요. 정치공학보다 정면승부라는 게 역시 정치에서는 중요한 것 같아요.”
- 근데 한 번은 성공했고 한 번은 실패했단 말이죠.
“혁명보다 어려운 게 개혁이에요. 모든 걸 다 부수는 게 오히려 쉽지요. 그쪽(신한국당)에 일종의 개혁적 블록이 잘 형성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렵더라고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대선 후보는 군사정권 출신의 구보수 민정계의 지지를 받던 이회창 대표에게로 돌아갔다. 이후 신한국당은 꼬마민주당 잔류파들과 통합했고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대선주자는 이회창, 총재는 조순으로 막을 올렸다. 그는 조순 총재의 비서실에 몸담은 적도 있었지만 한나라당과의 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DR에 따르면 개혁적 성향의 이광재 의원이 이회창 체제에서 버티기란 어려웠을 거라는 추측이다.
- 만약 이회창 체제 대신 개혁보수였던 민주계가 이겼다면 어땠을까요.
“DR이 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 왜요.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구조더라고. 영국 정당사 중 보수당인 토리당에 빗댄 유명한 말이 있어요. ‘토리스럽다’는 표현이죠. 진보 쪽 얘기에 ‘그래 맞아’ 수긍하면서도 ‘근데 나라는 보수가 이끄는 거야’ 자부심을 갖는 모습을 나타내죠.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는 그런 배포가 없어요.”
뒤이어 베트남전 영웅이자 주월 한국군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의 6‧25 일화를 들려줬다. 그는 국가 정책을 이끌어온 50인을 만나 고견을 듣고 <대한민국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펴낸 바 있다.
채 장군의 일화도 그 안에 담겼다.
“채명신 장군을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6‧25전쟁 일화를 들려줬는데 이분이 유격전에서 김일성 오른팔인 길원팔을 체포한 거예요. 가만히 얘길 들어보니까 적장이지만 참 아까운 인재인 거야. ‘인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싶으면 남한 가서 만들자.’ 설득을 한 거죠. 근데 길원팔이 소원을 말하는 거예요. ‘김일성 장군이 준 총으로 자결하게 해 달라’ ‘애가 둘이 있는데 남한에 데려가서 키워 달라’ 이 두 가지였어요. 채 장군이 길원팔의 소원을 들어주고 애 둘을 데리고 왔는데 한 명은 죽고 남은 아이를 가족으로 키웠어요. 그 소년이 자라 지금은 서울대 교수를 하고 있죠.
채 장군처럼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보수가 아닌가요?”
상대 당이지만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지금은 오로지 권력만을 가지려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어야 정치잖아요. 보수는 권력과 정치가 분리된 상태예요. 권력은 무엇을 하는 힘, 정치란 무엇을 할 건가 결정하는 능력이잖아요. 근데 보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결정 없이 권력만 쥐려는 모습이죠. 바로 그 행위 때문에 국민들과 멀어진 거잖아요. 국민들은 내 삶을 지켜달라는데 그 절규에 답하는 정치는 정작 실종됐어요. 그래도 정치의 위대함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것도 사실이니까. 영원히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신화처럼 허망함과 위대함 사이에서도 잘 살아내야겠죠.”
- 어찌됐든 DR이 됐다면 그 당에 계속 남아 있을 여지가 있었을까요.
“불가하죠. 노통이랑 같이 있어야죠. 나는 노무현 사람이니까.”
- 근데 노무현 대통령하고는 어떻게 알게 된 건가요.
“88년도였는데 연세대학교 선배 소개로 막 당선된 노무현 국회의원을 만나게 됐죠. 코리아나 호텔에서였어요. ‘나는 정치에 대해 잘 모른다. 나를 역사발전의 도구로 써 달라.’ 무슨 인연인지는 알 수 없는데 그 말이 내 가슴을 뛰게 했어요. 이후 노통은 비서실 구성의 전권을 나한테 줬죠. 스물세 살의 내게 말이죠.(웃음)”
3. 盧 대통령 만들기의 전말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만들어야겠다”
-by 이광재
얘기는 그와 노무현의 얘기로 넘어갔다.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보궐 선거를 통해 얻은 종로 지역구를 재도전해도 좋으련만 노무현 당시 후보는 부산 북강서로 발길을 틀었다. 민주당 간판 붙이고 출마하기에는 여전히 불리한 지역구였다.
그렇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호남에서도 콩이면 부산서도 콩입니다. 부산서도 팥이면 호남에서도 팥입니다. 영호남, 이렇게 갈라져야 되겠습니까” 사자후를 터트리며 좌중의 마음을 뒤집어 놨다. 선거 결과로 보면 낙선했지만 의미 있는 행보였다. 바위에 계란치기여도 계속해서 달려드는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왜 계속 떨어지는데 도전하는 거냐. 의문은 감동이 됐고 ‘바보 노무현’을 사랑하는 정치 팬덤 현상이 생겨났다.
본격 대선주자로 발돋움하는 결정적 발판이 됐다. 대중적 시각에서 보면 그렇지만 물밑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을 이광재 의원의 입장에서는 또 다를 것으로 짐작됐다.
- 제일 궁금한 게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는 언제부터 시작한 건가요.
“92년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결심한 이유가 있어요. 14대 대선 때는 민주당 후보였던 DJ(김대중) 캠프 기획실에 있었거든요. 선거 당일 경상도 쪽 개표를 하는데 YS(김영삼) 표가 너무 많은 거야. 나로서는 굉장한 충격이었어요. DJ는 정계은퇴 선언 후 외국에 갔고 그때부터 생각한 게 ‘노무현 대통령 만들어야 겠다’, ‘이 갈라진 나라를 하나로 만들어야겠다.’ 다음해 노통이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선출돼요. 그 무렵만 해도 완전 계파 선거였거든요. 대선에 나가려면 정책과 사람이 필요한데 우리는 현역 계보도 없고 돈도 없고 원외니까 다가오는 지방선거를 활용했죠. 시기를 잘 계산해 전국의 기초위원, 광역위원들, 조직부장, 여성부장 등을 대상으로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만든 거예요.”
지방자치실무연구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꿈인 참여와 자치, 분권과 시민이 주인이 되자는 공동체를 모토로 93년 개소했다. 이광재 의원은 연구소에서 기획실장을 맡았다. ‘안희정‧김병준‧여택수‧이강철‧염동연‧황이수’ 등도 함께했다. 사무실이 여의도 금강빌딩에 위치해 ‘금강팀’으로도 불렸다.
- 그렇게 보니 물밑 세가 굉장했군요.
“노통은 세력이 없었던 게 아니에요. 세가 없다는 사람들은 잘 모르고서 하는 얘기죠.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그 시절 호감도는 압도적으로 1위였어요. 현역 중심의 세는 없었지만 이미 2001년 대의원 2000명 이상이 모여 있었어요. 우린 상당히 자신이 있었어요.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국민경선제까지 도입돼 우리로서는 바닥 조직 관리하기가 훨씬 수월했지요.”
- 기억으로는 당 내 경쟁자였던 이인제 후보 쪽으로 사람들이 몰렸단 말이죠.
“(이인제 전 의원 얘기에 뭔가가 기억났는지) 한번은 이인제 후보가 사무실을 크게 얻었다는 거예요. 우리 참모진 중 한 명이 그러대요. ‘이인제 후보가 100평짜릴 얻었답니다.’ 내가 ‘몇 평이라고? 야 더 큰 걸로 얻어라’주문했죠. ‘돈이 없는데요.’ ‘일단 월세로 가자.’ 그래서 금강빌딩 한층을 통째로 빌려 엘리베이터 앞까지 다 쓰게 됐어요. 근데 막상 사무실 안에는 7명만 출근했었죠. 하하하.”
경선 후보 간 신경전이 대단했음이 엿보였다. 2002년 이인제 후보, 한화갑 후보와 경쟁했던 노무현 후보는 완전국민경선 흥행의 기세를 몰아 그해 4월 16대 당 공식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 95년 때로 다시 돌아가 질문하고 싶습니다. 박재호 의원 얘기론 ‘대권 아니라 서울시장 아니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하는데 요 실제 서울시장에 나가려고 했던 게 맞나요.
“95년 서울시장 선거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조순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 캠프의 기획실장 이었어요. 조순 선배는 연세가 있고, 노통은 젊고 대중성이 있으니 러닝메이트(정무부시장)를 하게 되면 차기 서울시장은 노통이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이런 생각을 전하자 조순 선배도 좋다고 해서 노통을 만났죠. ‘이렇게 가는 거 어떻겠습니까.’ ‘괜찮은 생각인데? 하루만 더 생각해 보자.’ 근데 다음날 만나서는 ‘야, 나는 부산시장 갈란다. 그 자리가 매력적이긴 한데, 제2의 도시에 민주당 후보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민주주의라는 게 이기든 지든 집을 수 있는 판은 만들어져야 하는 거잖아. 떨어지더라도 나는 가겠다’, 하더라고요.”
95년 치러진 6‧27 첫 동시지방선거에서 조순 서울시장 후보가 당선됐다면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낙선했다.
- 이길 수도 있었는데 DJ가 지역등권론을 들고 나와 진거라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여러 얘기들은 있기 마련이죠. 탈당 권유도 많았어요. 그때마다 노통은 출마의 이유가 지역주의 극복인데 탈당해 부산시장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어요. 그런 것들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구석이죠.”
- 하지만 노 대통령이 97년 통추(국민통합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할 때를 보면 말이죠. 제정구 의원 중심의 독자 후보론이 부상하자 DJ가 있는 새정치국민회의로 들어갔잖아요. 지역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며 DJ를 맹렬히 비판했던 것이 무색해졌어요.
“한창 논쟁이 많았던 것은 알아요. 정권교체가 우선이라고 본 거죠.”
4. 실세의 정의
“권력이란 하루살이가 불 사이의 거리를 끝없이 왕복하는 것”
-by 이광재
참여정부 초기 이광재 의원하면, 권력의 핵심부로 지목되곤 했다. ‘노무현 사단’내 386그룹의 젊은 참모진이자 동지였고 최측근으로서 오랫동안 곁을 지켜온 점이 부각됐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다.
- 이광재하면 ‘좌희정 우광재’의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잖아요. 그런데 같은 정당에 몸담았으면서도 둘이 동시에 잘 나간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왜인가요.
“(고개를 저으며) 아니죠.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했을 땐 같이 잘 나갔잖아요.”
- 그 후에는 없지 않았나요.
“언젠간 함께 잘 나갈 때가 있겠죠.”
노무현의 참모로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온 두 사람은 꼬마민주당 시절부터 같이했다. 참여정부 당시 친기업 vs 반기업 행보를 놓고 갈등을 빚은 적도 있었지만 각별한 관계를 형성해온 경쟁자이자 파트너였다. 2017년 장미 대선 때는 지방자치연구소 금강팀 멤버들과 함께 안희정 대선후보 캠프에서 돕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을 지켜본 적이 있는 DR에 따르면 ‘이광재는 뜻하는 바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안희정은 원칙을 따지는 사람’이라고 한 바 있다.
- 참여정부 시절 실세라는 말 참 많이 들었지요?
“과장된 측면이 좀 있죠.”
- 근데 과연 실세가 뭘까요. 뭐라고 생각하나요.
“권력이란 게 말이죠. 고등학생 때 읽은 책인데요. 한 사람이 랍비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물어요. 랍비가 답하기를 ‘인생이란 하루살이가 불 사이의 거리를 끝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오.’ 가까이 가면 타 죽고 멀리 가면 얼어 죽고…. 불이란 권력 명예 돈을 말하죠. 미국 학자가 또 이런 말을 해요. 정치란 무엇이냐, ‘양파껍질을 까는 것과도 같은 것.’ 뭔가 있는 줄 알았는데 까도, 까도 계속 양파인 거지.(웃음)”
- 그래서요.
“측근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어떤 회사도 커질수록 비밀이 많아질 수밖에 없잖아요. 조직 경영 특성상 한 사람이 9명 이상을 끌고 갈 수가 없거든요. 역사상으로 보면 장자방처럼 사는 게 제일 훌륭한 것 같아요. 전쟁에 나가지 않으면서 천리 밖 너머의 전쟁을 이기잖아요. 보통 측근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가 모시는 사람을 객관화시키고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을 계속 채워서 스스로 멀어지는 거죠.”
- 참여정부 때는 그게 잘 지켜졌다고 보나요.
“난 일찍 도망 왔잖아요. ‘이광재가 노무현의 눈과 귀를 가린다’는 얘기가 나오는 순간 사표를 썼죠. 노통은 사표 수리 안 한다, (권양숙)여사님은 울고. 그래도 안 돌아온다, 하고 떠났죠.”
이광재는 2003년 2월 청와대 비서실 국정상황실장에 임명됐지만 구설수에 오르자 “저 개인 때문에 대통령께 누가 될 수 없다”며 그해 10월 청와대를 나왔다.
당시는 문재인 대통령도 청와대 비서실에 몸담을 때다. 초대 국정상황실장이 이광재였다면 노 대통령과 20년 지기 친구였던 문 대통령은 초대 민정수석을 역임 중이었다.
- 노무현 vs 문재인 두 리더십을 비교해 준다면요.
“노무현 대통령은 사상가적인 측면이 있죠. 이상적이고 과감하고 솔직해요. 문재인 대통령은 침착하고 에러를 범하지 않고 집념이 강한 분이죠. 젠틀하고 참을성이 대단해요. 어쨌든 두 분은 본인들이 하고자 하는 건 대부분 한 거예요. 노통이 추진한 ‘돈 안 쓰는 정치개혁’은 수천억 판을 정리해 버린, 길이 남을 일이죠. 한미 FTA도 결국은 반대 무릅쓰고 했고, 용산 미군기지도 반환했고, 세종도시와 혁신도시도 다 했잖아요.”
- 노무현 하면 지역주의 극복이 모토인데 그건 실패했잖아요.
“당장 이루진 못했어도 어젠다는 남겼잖아요. 다음 시대의 과제가 된 거죠. 한 대통령이 5년 안에 그렇게 많은 일을 못해요. 큰 몇 개를 하는 거죠.”
-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요. 아쉬운 점은요.
“국가 목표를 세울 때 내각 자체를 폭넓게 구성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처음엔 너무 학자들이 많았어.”
- 조언해 줄 점은요.
“올 연말 공수처법과 공정경제3법이 마무리되잖아요. 정부가 드라이브 걸어온 권력기관 개혁과 경제 개혁은 역사의 한 단원으로 마감해야죠. 앞으로는 남북문제와 뉴딜 정책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아요.”
- 내년 재보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데요 여당의 유불리로 볼 때 어떻게 전망하나요.
“나라가 사느냐 마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이에요. 위기의식을 가질 때죠. 64조 원을 4차 추경에 넣었는데 만 원권으로 쌓으면 8000m 에베레스트 산이 80개나 돼요. 누가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 그렇긴 한데 국민이 봤을 때는 여야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것 같아요.
“국민이 킹메이커가 돼야겠죠. 50% 여론은 국민이 끌고 가잖아요. 국민께 맡겨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국민경선도 하는 거 아닌가.”
- 민주당만 하더라도 흔히 ‘문빠’라고 하잖아요. 당내 영향이 커 건전한 후보가 나오기 어려워 보인단 말이죠.
“항상 태풍이 불어야 진정한 선장이 누구인지 알게 돼요. 위기가 오는 만큼 새 지도자에 대해 기대하는 시기도 올 거라고 생각해요.”
-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인 강금실 변호사도 잘 알잖아요. 내년 재보선 서울시장 하마평에 오르내리던데요. 가능성 있나요.
“모르겠어요. (잠시 생각하다) 하려고 하겠어요?”
5. 3개의 당에 ‘주목’
“미래로 안 가면 길이 없다”
- by 이광재
“자네는 정치하지 않고 사업을 했으면 거부가 됐을 거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이광재 의원 집에 찾아갔을 당시 했던 말이라고 어디에서 말한 바 있다. 시대 흐름을 꿰뚫는 통찰력과 선견지명, 전략과 기획, 아이디어를 짜고 실행해내는데 능해 그런 말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치에서 멀어졌을 때도 유구한 세계 역사를 거울삼아 미래 구상에 전념해왔던 그다. 노 대통령과 함께 공부한 시간을 토대로 대학에서 흥망사를 강의했고,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 이끄는 싱크탱크 '여시재' 원장을 역임했다. 다시 원내 입성해서는 동북아 신경제시대 구상 프로젝트를 담은 ‘나비 프로젝트’ 정책을 구상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미래전환 K-뉴딜위원회 총괄본부장으로서 문재인 정부가 역점으로 추진 중인 한국형 뉴딜 펀드를 주도할 적임자로 꼽히고 있다.
- 한국형 뉴딜 펀드에 대한 얘기 좀 해주시죠. K-뉴딜을 처음 제안한 기획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코로나 이후 문명은 한반도가 이끌 가능성이 높다.’ 난 그렇게 봐요. 한반도야말로 융합의 시대를 이끌 최적화된 나라라고 보는 거죠. 왜 기회가 온다고 보냐면 진나라 경우 농경 문명과 유목 문명을 섞어 중국을 만든 거거든요. 그리스라는 나라도 돌덩이밖에 없었는데 메소포타미아라는 거대한 문명의 변두리에 있으면서 결국 혁신을 이뤄 그리스 문명을 만들었잖아요. 네덜란드도 경상남북도만한 크기 밖에 안 되는데 거기서 주식회사란 제도와 증권 거래소를 만들면서 자본주의를 태동시켰고요.
한반도를 보면 동양과 서양을 융합할 수 있는 디지털 세상과 기후변화, 수명 백세시대를 준비할 만한 잠재력이 있거든요. 세계적인 의료보험 시스템과 엘리트 의사들이 갖춰져 있어요. 5G망을 27조원 들여 전국에 다 깔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5G와 AI 융합 등 디지털 뉴딜, 스마트 그린 등을 잘 준비한다면 새로운 문명에 필적할만한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해요.”
- 그 방편이 K-뉴딜인건가요.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대량 투자가 불가피하잖아요. 당장 5G망 전국 작업도 2년 간 27조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들어가요. 문제는 국가 예산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거죠. 정부 1년 예산은 500조 원밖에 안 된단 말이죠. 그런가 하면 우리가 갖고 있는 금융 자산은 1경 8000조 원인데도 금리는 0.5%밖에 안 되잖아요. 수익을 내기 어려운 거죠. 바로 이 점에 착안한 거죠. 정부는 세제 인센티브를 줘 민간투자를 유치해 미래로 가고 국민은 펀드를 통해 이익을 거두자는 것. 쉽게 말해 국민 세금을 마중물로 쓰고 세제 혜택을 통해 투자를 이끄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나라가 코로나 이후 경제 위기인 V자 계곡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해요. K-뉴딜은 일종의 징검다리인 셈이죠. 국민이 대출받아 주식을 투자하는 시대의 해법이기도 하고요.”
- 관련해 요즘 빚투(빚내서 투자), 영끌(영혼을 끌어 모아 투자)하자는 신조어가 생길 만큼 붐이잖아요. 투자 시대가 불가피하다는 전제 하에서 장기투자로 유도하고 또 이를 통해 양극화 해소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보는 건가요.
“나는 이렇게 봅니다. 우리 사회 중산층이 급격히 붕괴되고 있어요. 연세되신 분들은 노후 준비가 안 돼 있고 젊은 층은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면서 일자리가 불안해지게 됐죠. 투자라도 해야 하는데 부동산도 돈이 많아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 주식에 의미를 두고 몰리는 거거든요. 지금 동학개미운동 분석한 거 보면 2030외에도 3040대의 셀러리맨과 여성 가정주부들이 많더라는 거예요. 그런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뉴딜 펀드를 통해 이분들이 안전하게 투자해 수익을 내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과거 박정희 정권에서 추진한 일반 이율보다 높은 25% 재형저축 경우도 기업 투자를 이끌고 경제를 돌아가게 한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K-뉴딜은 중산층을 복원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이 의원은 BTS 공모주 등 우량 공모주에도 일반 투자자들이 참여 기회를 늘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청약제도 개선안을 마련하는 등 투자의 양극화 해소에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뉴딜펀드 경우 관제펀드라는 비판도 있잖아요.
“공적자금을 갖다가 국민 세금을 밀어 넣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요. 반시장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봐요.”
- 지금 한 얘기들은 상당히 공감합니다만 민간 기업 투자를 활성화하려면 노동법 등 제도 개선을 해야지 않나요.
“한국만의 고민은 아니죠.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세계의 플랫폼 노동자 시대를 맞아 새로운 도전 속에 있는 것만은 분명해요. 분명한 것은 저비용 사회를 만들어야 우리 사회가 생존이 가능해진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마을의 역할이 중요해질 거예요. 재택 근로 형태가 높아지는 플랫폼 노동자이자 자영업 특성도 있는 이중적 의미가 되면서 기존에 회사가 공급하던 사무실이나 기기 등을 새롭게 공유하는 시대가 오거든요.
지금도 주변을 가만히 보면 집과 상과, 사무실이 섞인 주상복합이 늘고 있잖아요. 공유 사무실인 위워크을 비롯해 위쿡, 위스테이 등이 생기는 현상도 그런 흐름에서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결국 언제 어디서든지 일 할 수 있고 집과 오피스와 보육‧문화시설이 패키지화된 스마트한 미래 도시를 빠른 시일 안에 장착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언택트 시대를 준비할 수가 있게 돼요.
또 이것은 귀농귀촌과도 연결돼요. 요즘도 1년에 40만 명이 귀농귀촌을 하거든요. 문제는 100세 시대를 맞아 정년 후에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거죠. 근데 언택트 시대가 되면서 굳이 대도시 안 가도 속초나 강원도 등에서 일할 수가 있잖아요. 대도시와 농촌의 구분도 중요치 않게 되는 거죠.”
- 그게 평소 강조해온 국민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보는 건지요.
“나는 그렇게 봐요. 바야흐로 GDP가 삶의 질로 전환돼야 하는 시대예요. 여시재에 있을 때 쭉 연구를 해봤는데 유엔의 행복지수, OECD 삶의 지수, WHO의 건강지수 등을 전부 다 합치면 공통점이 나오더라고요. 일과 소득, 주거, 교육, 의료, 문화가 건강한 관계를 이루고 있을 때라는 거죠. 그래서 나는 경제성장률 등 지표보다 인간 삶의 지표를 갖고 정치를 해나갈 때 국민이 행복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기에 앞으로는 3개의 당(堂)에 주목해야 한다고 봐요.”
- 3개의 당?
“경로당(복지), 식당(민생), 서당(교육)요. 우리가 이 당도 좋고 저 당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건 밥 먹여주는 식당이잖아요.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는 말처럼 먹고 사는 문제가 안정돼야 국민 마음도 편안한 거 아니겠어요. 또 하나는 서당, 즉 교육이 중요하잖아요. 부모면 누구나 자신의 자녀들이 자기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데 강력한 사다리는 바로 교육이지요. 이는 국력과도 연결이 돼요. 국력은 경제력과 기술력에서 나오고 기술력은 결국 교육 혁명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은 경로당. 노후 불안만큼 슬픈 건 없잖아요. 그래서 노후 복지. 이 세 개야말로 정치를 GDP가 아닌 삶의 질로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예요.”
6. 고수의 내공
“일을 통해 세상 바꾸고 싶으면 날 찍어라”
-by 이광재
중국의 무협 영화 등을 보면 강호의 고수가 나타나 손가락으로 물방울을 튕기면 멀리 서 있는 병사마저 날아가는 장면 등을 볼 수 있다. 국가 전략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니 강호의 고수처럼 보였다. 인터뷰는 후반부로 치달았고 겸사겸사 마무리하며 물었다.
- 선거에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잖아요. 지역구 관리의 신으로도 불리고요. 비결은 뭔가요.
“내가 국회의원 하는 동안 지역구 경조사 열 번도 안 갔을 걸요? 다들 나보고 떨어질 거라고 그랬어. 시골서 정치를 어떻게 그렇게 하냐고. 대신 나는 마을회관에 가서 자고 거기 분들과 얘기하면서 마을 발전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가요. 먹고사는 것을 고민하는 동네에 가서 그분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 해결해나가는 거죠. 나는 운명은 바꾸려고 노력하는 자들에 의해 바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지금도 나는 조직 관리를 거의 안 해요. 일 중심으로 해요. 난 일을 좋아해요. 일을 통해 세상 바꾸고 싶으면 날 찍으면 돼요. 하하하.”
- 대한민국이 잘 살려면 리더로 나서야 겠어요.
“마음에 잡초를 뿌리지 말아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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