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종희 기자]
유성환 전 의원이 4월 19일 펴낸 자서전 <최후진술>은 지난 1986년 통일국시 사건을 주로 다루고 있다. 수갑을 차고 있는 유 전 의원의 침통한 표정을 담고 있는 책 표지를 넘기면 이기택 전 의원이 유 전 의원을 위해 직접 쓴 통일국시(統一國是) 휘호가 눈길을 끈다. 그 아래에 '이 나라의 국시는 통일이다 라고 주장한 유성환 이야기'라는 문구가 이 책의 중심 내용이 통일국시 사건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책에는 통일국시 사건 외에도 1931년 생인 저자가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겪은 처절한 삶이 그려져 있다. 아픔 많았던 우리 과거 정치사는 물론 힘없는 민중들의 애환이 숨쉬고 있는 듯 하다.
초등학교를 전체 졸업생 중 2등으로 졸업했으면서도 요리집 아들이라는 일종의 '계급차별'로 자신이 가고 싶은 중학교에 갈 수 없었던 저자는 "나는 집에서 '베개'가 축축하도록 눈물을 흘렸다"고 썼다. 이런 그가 성주중학교 2학년 때 억울한 누명을 받고 체험한 전기고문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듯 전율을 일으키며 탄식을 일으킨다."개구리를 전기에 갖다 대면 개구리가 사지를 직선으로 뻗는 것과 똑같았다. 나는 정말 겁에 질렸다. 5시에서 11시까지 때리고 전기 고문하고…."
"나는 전기고문이 심할 때 나의 '뇌'가 파괴된다고 생각하면서 김태욱 형사에게 '아저씨 전기고문하지 말고 작대기로 때려주이소'라고 호소했다. 공부해서 성공해야한다는 어린 생각에 머리를 전기고문으로 다치면 안된다는 판단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저자가 5·16 쿠데타 직후에 겪은 고통도 눈길을 끈다. 1962년 2월말 국토건설단에 입단하게 된 그는 모진 노동에 각혈을 하며 쓰러지게 된다. 사실상 죽음 직전에까지 이른 저자는 당시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썼다.
"각혈을 하면서 상식 밖의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허약하니 각혈하는 피를 다시 먹어보면 어떻게 될까? 마이싱 주사를 매일 맞으니까 피가 응고되고 각혈을 할 때마다 피뭉치가 올라오니 그냥 먹으면 어떨까? 그 피속에 영양분이 있는데…' 나는 내 병이 깊고 치료 불가능한 병이라 규정하고 피를 마시면 죽을 수 있다고 판단, 南양(저자의 부인)과 의논 없이 올라오는 피 뭉치를 되려 꿀꺽 위장으로 보냈다. 나는 사와 생을 결단하는 모험을 강행했다. 이게 왠일인가. 전신이 소름끼치는, 그리고 전신에서 품어내는 반작용의 반응이 나왔다. 토할 것 같았다. 거부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사람의 피를 먹어서는 안 되는구나…' 나는 南양에게 말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6년 6월, 영장도 없이 모기관에 강제연행되어 고문 받은 얘기도 가슴을 저리게 한다.
"신문이 시작된 지 20~30분도 안되어 '당신은 안 되겠어.'하고 나를 지하실로 데려갔다. 고문용 통통한 막대기를 갖고 오더니 대뜸 내 하복부를 찔렀다. 중학교 2학년 때 김태욱 씨가 하던 고문방식과 비슷했다. 하복부를 쑤시니 남성으로서 자연히 남근이 다칠까 긴장이 되었다. 고문 작대기는 계속 내 복부와 몸뚱이에 뼈 아픈 통증을 가해왔다. 그래도 안 되니까 증기를 뿜어대는 뜨거운 스팀 앞에 나를 앉혔다. 그 때 나는 고혈압으로 고생할 때였다. 온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쉬기가 어려웠다."
1983년 전두환 정권의 공작과 음모로 화원교도소에 끌려간 일도 눈길을 끈다.
"화원교도소에 수감된 지 며칠 안 되어 미결수인데도 내 머리를 깎고 지문을 받고는 족문(발가락)까지 받아서 나는 놀랐다. 그리고는 발가벗기고 몸의 상처라는 상처는 다 카메라에 담았다. 중범죄인 다루 듯하고 잡범들이 있는 방에 가두었다. 낮에 검찰 조사를 받을 때, 점심을 먹을 때도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이런 저자는 1984년 12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그는 1986년 10월 14일 오랜 세월 가슴에 담아온 통일국시 소신을 국회 본회의장에서 펼친다.
"총리, 우리나라의 국시가 반공입니까? 반공을 국시로 해두고, 올림픽 때 동구 공산권이 참가하겠습니까?('무슨소리야' 하는 이 있음) 나는 반공정책은 오히려 더 발전시켜야 된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강대국들의 한반도 현상고착 정책에 많은 국민들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분단국에 있어서의 통일 또는 민족이라는 용어는 이데올로기(Ideology)로까지 승화되어야 합니다. 먹고, 자고, 걷는 것, 국군이 존재하는 것 모두가 통일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용어는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그 위에 있어야 합니다.('적화통일이야?' 하는 이 있음)('확실히 얘기해' 하는 이 있음) 통일원의 예산이 아세안게임 선수 후원비보다 적은 것은, 사실상 통일을 기피하는 것 아닙니까? 국가의 모든 정책, 사회기풍, 모든 역량을 통일에 집중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화해는 통일입니다."
유 전 의원은 '반공정책은 오히려 더 발전시키고'라고 분명히 전제했음에도 그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소위 '빨갱이'로 매도 당했다.
학도의용군 출신자를 용공주의자로 왜곡한 시대의 아픔
책에는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이던 고(故)김동영 전 의원이 유 의원을 위해 한 발언이 소개돼 있다.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 지금 본의원은 텅빈 유성환 의원의 의석을 바라보면서 영등포 교도소에 수갑이 채워진 채 끌려간 것은 유 의원이 아니라 이 나라 민주주의 본산인 국회 그 자체라는 생각에 통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난 10월 16일 밤 우리 당 소속 유성환 의원에 대한 체포 동의안을 여당 단독으로 불법 처리함으로써 대한민국 의회민주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조종이 울렸습니다."
이밖에도 장기욱 전 의원이 국회에서 '국시사건'의 본질과 체포과정에 있어 적법절차를 밟지 않은 점을 통렬히 지적한 의사진행 발언도 소개돼 있다.
유 전 의원은 법원에서 최후진술을 한다.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사법부가 만일,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행정부의 시녀로 돌아갈 때는 그 나라가 패망했음을 역사는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에 대한 이 재판은 이 유성환 개인에 대한 신상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헌법과 헌정에 대한 재판이올시다. 나는 재판부에서 우리 헌정사에 길이길이 빛나는 당당한 그러한 재판이 시종 이룩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국회 의장단에게 간단하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구속된 지 6개월이 가까웠습니다. 그 엄동설한, 나의 발과 귀가 동상에 걸릴 때까지 고생을 해도 내가 소속하고 있는 입법부 국회의장단 비서 한 사람 면회 온 일이 없습니다. 내가 인정에 굶주려서 이런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올시다. 정치는 전쟁이 아니올시다."
책에는 유 전 의원의 딸 유현주 씨가 통일국시 발언과 관련해 모 월간지에 기고한 글도 올려져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상처와 아픔은 분단된 조국이라 하셨고, 따라서 정부는 통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국시 시비로 비약시켜 일방적으로 여론을 몰아붙였습니다. 매스컴이 얼마나 시대를 외면하고 국민의 눈을 속이는지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대정부 질의 후 아버지는 가택연금 되셨고, 우리 집은 전투경찰로 이중삼중 둘러 싸였습니다. 상이용사들이 몰려와 쇠갈고리를 장대 끝에 매달아 베란다 창을 두드리자 충격과 공포로 어머니께서 쓰러졌습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는 상황이 며칠이나 계속되었고, 마침내 아버지는 연행되어 구속되셨습니다. 그 때 울려 퍼지던 함성. '반공을 훼방하는 자, 처단하라.'
이는 당치도 않은 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셨습니다. 6·25 사변 때 아버지는 학도의용군으로 북괴군과 싸우셨고 낙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경찰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후방 교란의 거점이었던 가야산에서는 북괴군 잔당 소탕에 결정적인 전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무용담을 결코 입에 담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시대의 소명이었고 대한의 남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강직한 반공투사가 반공을 훼방하는 자로 매도되고, 사상으로 몰아세우는 현실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유 전 의원의 책을 다 읽고 나면 정치학 박사 이윤기 교수의 추천글이 더욱 가슴속 깊게 다가온다."여기 한 없이 울부짖는 한 인간이 있다. 그의 울부짖음은 애절하고 처절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분노의 절규였다. 그의 외침은 전 생애에 일관되고 마침내 통일국시로 연결되어 한국 헌정사에 한 장을 장식했다. 그러기에 그의 울부짖음은 한편의 드라마였고 역사의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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