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이준석 돌풍’은 헌정 사상 최연소(만36세) 원내교섭단체 대표의 탄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준석 국민의힘 신임 대표가 당대표 경선 과정에서 던진 화두는 이제 막 논의의 테이블에 올랐다. 지금부터는 ‘이준석 돌풍’을 가능케 했던 공정이라는 화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시간이다.
이 대표가 경선 과정에서 주장했던 핵심 공약 중 하나는 ‘할당제 폐지’였다. 특히 20대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할당제를 불공정한 것으로 봤고, 그 ‘선봉장’ 격이었던 이 대표는 젊은 남성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이로 인해 이 대표는 ‘여성혐오’라는 의심을 받아야 했지만, 할당제 반대를 단순히 여성혐오로 낙인찍는 건 진실과 거리가 있을뿐더러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선 20대 남성들이 왜 여성 할당제를 문제 삼고 있는지 살펴보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산하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최종숙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3월 ‘20대 남성 현상 다시 보기’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2017년부터 20세 이상 전국 성인남녀 1012명을 대상으로 젠더 의식을 조사한 이 논문에 따르면, 20대 남성은 20대 여성 다음으로 성평등 의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이들의 성평등 의식은 30대 여성보다도 높았다.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보면, 여성 할당제가 ‘역차별’이라는 20대 남성들의 주장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20대 남성의 머릿속에는 ‘여자라서 안 돼’ 따위의 성차별적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어머니와 누나·여동생의 희생 위에서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권을 누렸던 기성세대들의 부채의식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20대 남성들이 여성 할당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그 어떤 세대보다 평등한 젠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 할당제가 ‘세상이 바뀐 것을 모르는 중년 남성들이 자신들의 부채의식을 해소하기 위해 젊은 남성들을 희생시키는 무용(無用)한 제도’라는 20대 남성들의 주장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20대 남성들이 여성 할당제를 반대하는, 그리고 이준석 대표가 이 제도의 폐지를 외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20대 남성들과 이준석 대표를 단순히 ‘여성혐오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건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치적 프레이밍에 가깝다.
그렇다면 정말 여성 할당제는 불필요하고, 공정을 해치는 악(惡)일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20대 남성들의 말처럼, 여전히 많은 중년 남성들은 ‘바뀐 세상’에 걸맞은 젠더 의식을 내면화하지 못하고 있다.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개최한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세미나에서 발표된 자료를 보면, 우리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50대 남성들은 여전히 ‘전통적 남성성’에 대한 편견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50대 남성들은 ‘남자는 일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항목에 52.5%가, ‘가족의 생계 책임은 남자’라는 항목에 70.8%가 동의했다. 반면 ‘집안일 관련 정보를 자주 찾아본다’는 항목에는 16.2%,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면 이직을 고려한다’는 항목에는 27.2%만이 동의했다. 20대 남성들과 달리, 50대 남성들은 아직도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강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문제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마주치는 ‘기득권층’이 전통적 남성상·여성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진 중년 남성들이라는 데 있다. 여성 할당제는 바로 이런 중년 남성들이 ‘편견 없이’ 신입사원을 선발하고 승진자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즉 여성 할당제는 아직까지도 성평등 의식을 내면화하지 못한 중년 남성들이 입사자·승진자 등을 결정할 때 ‘무의식적 성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인 셈이다.
다만 정치권이 성평등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편의주의적으로 할당제를 활용해 온 건 아닌지 반성할 필요는 있다. 어떤 분야에 도입해야 제도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지, 어느 정도 비율이 ‘억울한 피해자’를 최소화할 수 있는 수준인지 등의 논의는 도외시한 채 ‘표’를 얻기 위한 기계적 비율 조정에만 목맨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20대 남성들에 대한 이해와 설득 과정 없이, 교조주의적으로 그들을 윽박질러온 건 아닌지도 돌아봐야 한다. 할당제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을 ‘여성혐오주의자’로 낙인찍는 건 갈등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음은 물론, 오히려 반작용만 증폭시킨다. 부디 이번에는 ‘할당제 유지 또는 폐지’에 국한된 정치적이고 감정적인 싸움이 아니라,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폭넓은 논의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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