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양심에 따라 판결한 법관에 불리한 처분’ 이유로 탄핵소추안 발의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헌정 사상 최초의 고위공직자 탄핵은 1985년에 나왔다. 1981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유태흥 대법원 판사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유태흥 판사는 1979년 10·26 사건의 주심을 맡아 김재규의 상고를 기각, 사형을 최종 확정한 인물이었다. <경향신문>은 유태흥 판사가 대법원장으로 지명되자 아래와 같은 소개 기사를 실었다.
유태흥 대법원장은 대쪽같이 소신이 뚜렷하면서도 관후한 성품의 전형적인 선비형 법관. 48년 조선변시 2회에 합격한 뒤 33년 만에 사법부 최고의 자리에 오른 유 대법원장은 현재 대법원 판사 임관서열 7위이다.
57년 대전지법 홍성지원 판사로 출발, 76년 대법원 판사에 오르기까지 대부분의 법관 생활을 형사법원 쪽에서 해와 우리나라 형사법학의 권위자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상고심 주심을 맡아 역사적 심판을 내렸고 이 사건 심리 중에는 기자들에게 이례적으로 면담을 허용, 궁금증을 풀어주기도 하는 등 폭넓은 인간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때는 비밀사항이 아닌 비밀영장은 모두 공개해버린 소신파로 정평이 났었다.
지난 60년 부인과 사별한 후 사직공원 등 서울의 명소를 산책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그는 붓글씨에도 솜씨를 보여 법원 서예전에도 빠지지 않고 출품을 한다.
83세의 노모를 모시고 있어 주위에서는 효자로 소문이 나 있다. 슬하에 2남 2녀.-1981년 4월 10일 <경향신문> 강직하면서도 전형적 선비…유태흥 대법원장
그러나 몇 년 후, 유태흥 대법원장은 일부 판사들에게 보복성 인사 조치를 내렸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여러 차례 기각한 판사,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즉심에 넘겨진 대학생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 반정부유인물을 돌린 시민단체 사무총장에게 무죄를 넘긴 판사 등이 대거 좌천성 인사발령을 받으면서다.
9월 4일에는 법관 인사에 대한 비판 글을 법률전문지에 기고한 판사가 인사발령 하루 만에 또 다시 전보되며 ‘보복 인사’ 의혹에 기름을 부었다. 해당 판사는 유태흥 대법원장의 법관 인사를 ‘문책 인사’로 규정하면서, 소신에 따라 판결을 내린 법관에 대한 문책 인사는 사법부의 자상행위라고 비판한 인물이었다.
최근 대법원이 단행한 법관 인사를 비판한 글을 법률전문지에 기고한 판사가 인사발령 하루 만에 다시 전격 전보됐다.
전보발령된 판사는 서태영 판사로, 서 판사는 지난 1일자로 단행된 대법원 정례인사 때 서울지법 동부지원에서 서울민사지법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법률신문에 실린 글이 문제가 돼 부임 하루만인 2일 오후 부산지법 울산지원으로 전출발령을 받았다. 대규모 인사가 치러진 후 법관 1명에 대해 별도의 인사를 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서 판사는 법률신문 3면에 실린 ‘인사유감’이란 제하의 글에서 “문책 인사의 원인이 된 사실이 법관의 소신에 기한 재판이라고 할 때는 그런 인사는 사법부의 자상행위요, 비인사”라고 썼다. (중략)
서 판사가 언급한 ‘문책 인사’는 최근 단행된 고법부장판사 및 일반법관에 대한 승진-전보인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6일의 고법부장판사(차관급) 인사에서는 윤석명 광주지법 수석부장판사가 벽촌인 장흥지원장으로 강등발령됐고, 윤 부장은 이 인사 1주일 후인 지난달 23일 사표를 냈었다.
윤 부장은 전임지인 광주지법에서 공안사건관련 피의자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여러 차례 기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달 26일의 후속인사에선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즉심에 넘겨진 대학생 11명에 대해 ‘범행을 입증할 증거가 불충분하고 학생들의 추상적인 구호를 유언비어로 단정할 수 없다’며 무죄판결을 내린 인천지법의 박시환 판사가 부임 3개월여 만에 강원도 영월지원으로 발령됐었다.
역시 집회에서 반정부유인물을 돌린 전국기독교농민총연합회 사무총장에게 즉심에서 ‘유인물 내용이 유언비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무죄선고를 한 서울형사지법 조수현 판사도 박 판사와 같은 후속인사에서 충남강경지원으로 전보발령 됐었다. (후략)-1985년 9월 4일 <조선일보> 법관인사 비판 글 쓴 판사, 발령 하루 만에 다시 전출
이러자 신민당은 유태흥 대법원장이 권력에 영합하는 판결을 한 법관을 우대하고, 소신에 따라 판결한 법관에게는 보복 인사를 한 것이 위헌이라며 국회에 탄핵소추결의안을 제출했다. 당시 헌법 제104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 제107조 제1항은 ‘법관은 탄핵 또는 형벌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감봉 또는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는데, 유태흥 대법원장이 이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신민당은 18일 유태흥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결의안을 박용만 의원 등 소속 의원 102명의 발의로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정식으로 발의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중략)
신민당은 이날 제출한 탄핵소추결의안에서 “유태흥 대법원장은 위헌적 행위가 지나쳐 법조계는 물론 대다수 국민으로부터 이미 신뢰와 존엄을 상실했고, 권력의 시녀인 허상에 불과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신민당은 “유 대법원장은 권력에 영합해 판결을 한 법관을 우대하는 인사조치를 해왔다”고 전제, “법관 심판의 독립에 관한 헌법 104조 및 ‘법관의 신분 보장’을 규정한 헌법 107조를 근원적으로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신민당은 유 대법원장이 학생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한 인천지법 박시환 판사, 서울형사지법 조수현 판사 등 2명을 좌천 발령했고, 공안사건의 영장을 기각한 고법부장판사 1명과 부당인사 내용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판사 등 2명에 대해 보복 인사를 단행했다고 이 결의안에서 주장했다.
헌법상 대법원장 탄핵소추결의안은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동의로 발의되며, 재적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헌법위원회에 소추된다.-1985년 10월 19일 <조선일보> 신민, 대법원장 탄핵안 제출
물론 탄핵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이 과반 의석(총 276석 중 148석)을 갖고 있었기 때문. 대법원장 탄핵에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필요했으니, 민정당이 반대하면 통과가 불가능한 구조였다.
민정당은 “신민당 측이 제기한 유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사유는 사법부 내부 문제로서 근본적으로 인사권자의 재량이 맡길 일”이라며 당론으로 탄핵소추안을 부결시키기로 했고, 실제로도 유태흥 대법원장의 탄핵소추안은 찬성 95표, 반대 146표로 부결된다. 이후 유태흥 대법원장은 임기 5년을 모두 채우고 1986년 4월 15일자로 퇴임했다.
21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된 유태흥 대법원장 탄핵소추결의안에 대한 표결 결과는 재석 247명 중 가95·부146·기권5·무효1표로 집계됐다.
이 표결에 국민당은 기권했으며 탄핵소추결의안을 제안한 신민당에서는 소속의원 99명이 투표에 참가했으나 ‘가’표는 95표밖에 나오지 않았다.1985년 10월 22일 <동아일보> 대법원장 탄핵안 가 95·부 146표
한편 유태흥 대법원장은 탄핵안 부결 후 50여 일이 지난 12월 9일, 임기 마지막 전국 법원장회의에서 법관 인사 파동에 대한 공식적 견해를 밝혔다. 인사 배경을 잘 알지 못하는 언론이 과장보도를 했고, 이것이 일부 재야 법조인과 정치인들의 오해를 낳음으로써 대법원장 탄핵이라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전략) 유 대법원장은 이날 훈시에서 “99%에 해당하는 대다수 훌륭한 법관의 명예와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1% 미만의 극소수의 훌륭하지 못한 법관을 징계 또는 전보조치 등을 통해 반성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은 인사권자의 권한 행사라기보다 오히려 직책상의 의무 이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면서 “이는 소위 법관 신분 보장의 원칙과는 그 각도와 평면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난 9월 초순 어느 날 갑자기 인사 배경을 잘 알지도 못한 신문들이 법관 인사가 마치 법관 신분 보장의 원칙에 위배라도 된 듯이 과장보도했다”고 주장했다.
유 대법원장은 이어 “이 같은 언론의 보도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만큼이나 위력을 발휘, 일반 독자들을 현혹시켰고 일부 재야법조와 일부 정치인의 오해까지 낳게 해 마침내는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법원장 탄핵 발의라는 사태까지 벌어졌다”며 인사 파동의 여파를 언론 탓으로 돌리기도.
유 대법원장은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다가 오얏도둑으로 몰린 격이 됐으나 그때 그곳에서 비뚤어진 갓을 바로 잡아 고쳐 쓴 처사를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사법부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 나에게 부과된 책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유 대법원장은 끝으로 “다만 일시적이나마 사법부 전체의 위신과 명예를 손상시킨 점이 마음에 걸린다”면서 “친애하는 800여 법관과 7000여 직원 여러분께 대단히 미안스럽게 생각하며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말로 훈시를 매듭지었다.1985년 12월 9일 <동아일보> ‘법관인사파동’ 유 대법원장의 변 “잘 알지도 못하는 언론이…”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