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현주 자유기고가)
고통 속으로 몰고 간 아버지의 대정부 질의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아픔이요 상처입니다.
경제적으로는 후진국에서 벗어나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했다고 하지만, 이 나라의 정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야당 정치인으로서 갖은 고난과 가난의 세월 30년을 보낸 우리 가정이 완전 무장을 한 전투경찰들에 의해 이중삼중으로 둘러싸이고, 상이용사와 반공연맹 사람들의 함성에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실은 분명 시대의 아픔이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지난해(1986년) 10월 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정부질의를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영남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여 법관의 꿈을 키우셨지만, 총학생회장이 되면서 인생의 방향을 정치계로 선회하셨습니다. 약관 29세 청년 시절 도의원에 당선되신 후 야당정치인으로의 고난이 시작되었고, 줄곧 국회의원의 꿈을 키우셨습니다. 마침내 제1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시어 총리를 상대로 대정부질의를 하시게 되었으니 그 기쁨과 감격을 어찌 서툰 글로써 모두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감격스럽던 국회 본회의 발언이, 후에 이토록 격심한 슬픔과 고통을 가져 줄 것이라 누가 알았을까요.
민족반역자로 몰린 철저한 반공주의자
지난 30년의 한을 푸는 날.
“아빠! 잘하세요.”
“고맙다! 아빠는 오늘 우리 민족과 나의 한을 풀거야.”
아버지는 결연한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상처와 아픔은 분단된 조국이라 하셨고, 따라서 정부는 통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국시 시비로 비약시켜 일방적으로 여론을 몰아붙였습니다. 매스컴이 얼마나 시대를 외면하고 국민의 눈을 속이는지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대정부 질의 후 아버지는 가택연금 되셨고, 우리 집은 전투경찰로 이중삼중 둘러싸였습니다. 상이용사들이 몰려와 쇠갈고리를 장대 끝에 매달아 베란다 창을 두드리자 충격과 공포로 어머니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는 상황이 며칠이나 계속되었고, 마침내 아버지는 연행되어 구속되셨습니다. 그때 울려 퍼지던 함성.
‘반공을 훼방하는 자. 처단하라.’
이는 당치도 않은 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셨습니다. 6·25사변 때 아버지는 학도의용군으로 북괴군과 싸우셨고 낙동강을 건너 후퇴하는 경찰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후방 교란의 거점이었던 가야산에서는 북괴군 잔당 소탕에 결정적인 전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무용담을 결코 입에 담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시대의 소명이었고 대한의 남아로서 당연히 해야 할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강직한 반공투사가 반공을 훼방하는 자로 매도되고, 사상으로 몰아세우는 현실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정치에 몸담으신 이래로 권력의 부정부패를 신랄히 비판하셨고 국민의 복지와 국력의 신장을 책임지는 권력자는 항상 역사 앞에, 또 국민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누가 들어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마는, 실제로 이러한 비판을 하는 정치인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정치인의 소명의식을 철저하게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권력자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권력자는 국민에게는 몸과 마음을 다해서 봉사하라.”
아버지의 이런 신랄한 비판의 소리는 특별한 사유 없이 즉시 여러 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지만 국민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심부름꾼이 군력의 압박에 굴복하고 타협한다면 이것은 변절이요 배신이라 말씀하셨고 하늘을 보아 한점의 부끄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국시시비는 이런 아버지의 입을 막으려는 하나의 억지 구실이었습니다.
여필종부
아버지, 어머니의 젊은 시절과 제 학창시절은 힘겨웠던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친구분들의 도움으로 대구 동구 불로동에 ‘성주횟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식당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늘이 도운 것인지 잠시 사이에 어머니의 손맛이 입소문을 타, 식당 안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보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가녀린 몸으로 어찌 그리 잘 해내셨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무척 대단한 일입니다. 어머니의 식당 운영으로 겨우 생활고에서 벗어나게 된 무렵, 아버지는 10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습니다.
아버지는 7대 선거 때부터 줄곧 국회의원을 꿈꾸고 계셨지만, 공천에 번번이 낙선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식당을 하며 모은 돈을 모두 내놓으셨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말입니다.
‘여필종부’ 이것이 어머니의 신조입니다. 그것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늘 아버지의 꿈을 지지해주시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날 이후 식당 문을 닫고 온 식구가 밤낮으로 뛰었습니다. 선거 철에는 동네 개가 지나가도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 선거운동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작은 틈만 보여도 비판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지만 우리는 지칠 틈도 없이 뛰어다녔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낙선. 또다시 고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산으로 갑시다.”
어머니께서 아버지를 설득하여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 부근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팔공산 바위에 올라가 소리 없이 우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나이의 아침이 오는 날을 기다리며, ‘더 코리안 타임즈’, ‘アサヒ(아사히)’ 신문을 보시며 꾸준히 공부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시내 택시 운전 기사들이 파업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월급제를 실시하라.’
경제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근로자들은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고 기업주는 돈을 버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것은 권력자의 횡포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바로 일어나 택시기사들을 면담하시고 `정당한 노동 쟁의를 범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시며 정당한 법의 심판을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전국에서 큰 호응을 받았고 곧 전국에서 노동 쟁의가 일어났습니다. 검찰에서는 시위 주동자들을 모두 구속했습니다. 김영삼 총재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이 아버지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지지하였고, 박찬종 씨를 비롯한 여러 변호사가 무료 변호에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이처럼, 어려움 속에서도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해야 한다는 의지를 꺾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거인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소년 다윗 이기다
제12대 국회의원 공천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문을 보시던 아버지께서 벌떡 일어나셨습니다.
“여보, 서울 가는 여비가 있소? 국회의원 공천을 받으러 가야겠소.”
수중에 돈이 없었던 아버지는 어머니께서 전화요금납부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팔천 원을 가지고 서울로 향하셨습니다. 며칠 후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아버지의 흥분된 목소리.
“이봐라 현주야, 아빠 신민당 공천받았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습니다. 30년 세월 동안 국회의원의 꿈을 품으신 아버지. 드디어 그 꿈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되셨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아버지에게도 아침이 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1야당의 공천을 받는데까지 26년이나 걸렸습니다.
곧 대구 중서구에서 치열한 선거전이 벌어졌습니다.
민정당 한병채, 국민당 총재 이만섭, 그리고 아버지. 거인 골리앗과 소년 다윗의 싸움에 비할 만큼, 조직과 자금에 있어 감히 경쟁이 될 수 없는 선거였습니다. 그러나 민심은 천심이라 했던가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골리앗보다 막강한 거인들을 모두 쓰러트리고 소년 다윗이 당당히 금메달을 딴 것입니다. 그것도 전국 최다 득표로 말입니다. 그날 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현주야,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나를 믿어준 국민의 뜻을, 대구시민의 뜻을 성실하게 전달하는 심부름꾼으로서 소명을 다 해야지. 하늘 아래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말이다.”
아버지가 구속되신 동안 겪은 고통을 저는 감히 ‘시대의 아픔’이라 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떳떳하고 강직하게, 그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온갖 유혹을 물리치시고 국민의 대변인이 되신 아버지께 ‘사상’이라는 너울을 씌운 죄를 누가 어떻게 치를 것입니까. 부디 이것으로 시대의 아픔이 막을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유현주, <월간 마드모아젤>, 1987
좌우명 : 행동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