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문재인 정부의 ‘캠코더(캠프·코드·더민주당) 인사’, 박근혜 정부의 ‘수첩 인사’, 이명박 정부의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출신), 강부자(강남의 부동산 자산가) 내각’ 등 역대 정부들이 모두 ‘인사 참사’를 겪었다. 이런 참사가 되풀이되는 이유는 인재풀이 특정 세력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마다 반복된 인사 참사를 막는 길은 탕평책(蕩平策)이다. 탕평책을 시행하면 인재풀이 넓어지면서 인사 참사를 막을 수 있다.”
지난달 4월 23일, 정두언 전 의원은 한 방송에서 김기식 금감원장 사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했다. 야당과 여당에서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이야말로 역대 정권에서 반복된 참사를 방지하는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소리다.
사실 탕평책은 인사 관련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언급되는 진부한 소재다. 정치권이 탕평책의 필요성을 염불 외듯 되뇌는 이유는 간단하다. 귀에 좋은 소리, 즉 듣기에는 그럴 듯한 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때론 ‘탕평’이라는 구호만 외치면 금방이라도 여야갈등의 폐해가 사라질 것처럼 말하곤 한다.
정조실록 18권(정조 8년 12월 8일) 기록에 따르면, 일찍이 정조는 다음과 같은 말로 탕평정치의 정당성을 설파한 바 있다.
“일찍이 숙종조[肅廟朝]에 있어서 당파의 습성이 점점 고질화 되어 수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상의 뜻에서 혹은 이쪽이 저쪽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오로지 이쪽을 등용하였고, 혹은 저쪽이 이쪽보다 낫다고 생각되면 다시 저쪽을 등용하였다. 우리 선왕조 초기에는 싸우기만을 서로 일삼고, 엉겨 붙은 감정을 풀기 어려웠었다. 선대왕(영조)이 보존하고 감화시키는 교화로서 탕평책(蕩平策)을 세우는 정사를 행하여서 후손들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나에게 남겨 주었다. 오직 나의 고심도 또한 여기에 있다.”
영조가 시작한 탕평책으로 인해 많은 사대부들이 붕당 간 다툼에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 전 의원의 주장대로 탕평책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사에서도 정답이 될 수 있을까? 또, 탕평책만 제대로 시행된다면 인사 참사는 전부 해결되는 것일까?
상처뿐인 남경필의 탕평 정치… 양당의 배신과 유권자의 반감
인재 등용에 있어 탕평 정치를 시행했던 남경필 경기지사의 사례를 찾아보면 답은 나온다.
남경필 지사는 지난 2014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경기도지사로 당선됐다. 남 지사는 야권 출신의 이기우 전 열린우리당 의원을 사회통합부지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사회·보건·복지 등의 인사권을 부여하는 등 탕평책의 일환인 ‘여야 대연정(大聯政)’을 시작했다. 이후 연정을 본인만의 ‘정치 브랜드’로 만들어 적극 홍보하기도 했다.
“내가 도입한 ‘연정’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연정을 해야 한 사람에게 집중됐던 정치권력을 여러 명과 공유하고 보수·진보의 낡은 프레임을 뛰어넘어 상생·화합의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 (중략) 연정 성공비결의 핵심은 권력을 나누는 것이다. 인사권과 예산권을 주는 것과 안 주는 것의 차이다. 나눌 때 진정한 협력이 가능하다. 그러면 도지사로서 권력과 권위는 오히려 더 커진다. 도지사부터 낮은 자세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 내가 2014년 도지사가 되고 가장 먼저 한 게 기득권 내려놓기였다. 경기도 연정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 남경필 지사, 작년 2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브랜드는 시중에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듯하다.
그는 작년 바른정당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경선에서 연정 성과를 강조했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결국 유승민 의원이 후보로 결정됐다. 이때 그의 낙선 요인으로 당 장악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됐다. 5선 의원이라는 중량감에 비해 당내 세력 기반은 턱없이 약했으며, 보수와 진보 사이의 어중간한 ‘회색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 한국당과의 보수 적자 싸움에서 질 확률이 높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이 같은 결정에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등용했던 ‘대탕평’ 인사도 한몫 했다는 지적이다. 당시 당선에 기여했던 당내 인사들보다 그와 각을 세우던 야당 인사를 우선 등용하는 등, 그가 차기 대권 이미지를 우선시하느라 제대로 된 논공행상(論功行賞) 절차는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당내에선 ‘이적 행위’라는 말까지 나왔다. 한국당 소속 박종희 전 의원은 “남 지사의 (지지율) 부진은 탈당에 따른 배신정치, 민주당과의 연정으로 인한 이적행위 등으로 보수층 유권자들의 투표 포기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설상가상으로 남 지사가 바른정당을 탈당해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자마자, 민주당 경기도의회 의원들은 즉각 기자회견을 열고 “남 지사와의 연정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며 남 지사가 여태껏 공들여온 연정을 전면에서 파괴하고 나섰다.
당시 민주당 박승원 대표는 “경기도 연정은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상태에서 당사자 간 정치적 합의에 기초해서 추진해왔기 때문에 연정 주체 간의 약속과 책임이 바탕이 되어야 유지될 수 있다”며 “민생은 뒷전인 채 정치공학적인 판단에 따라, 입·탈당을 반복하는 남경필 지사는 책임 있는 정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연정의 두 주체였던 한국당과 민주당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심지어 그의 연정 실험은 유권자들에게도 그리 후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MBC가 여론조사기관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지난 3일 발표한 6·13지방선거 광역단체장 선거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는 50.9%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남경필 후보의 15.5%를 3배 이상 앞섰다(19세 이상 경기 거주 성인 남녀 801명 대상, 4/30~5/1 이틀간 유무선 전화면접 방식,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4~3.5%p).
그의 연정에는 매년 1조가 넘는 ‘연정 예산’이 따랐다. 특히 지난 2016년 9월 ‘경기도 민생연합정치 합의문’에서는 연정 관련 예산으로 1조 6천억 원 가량이 편성됐다. 한국당의 ‘일하는 청년 시리즈’와 ‘광역버스 준공영제 사업’, 민주당의 ‘무상급식 사업’과 ‘일하는 청년통장’이 물물교환하듯 도 사업으로 모두 채택되며 비용이 배로 뛰었기 때문이다. 대연정 실험이 유권자들에게 후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다.
요컨대 현실 정치 속 탕평책은 당내 세력화와 득표율로 이어지지 않는, 실효성 없는 정책이라는 결론이다.
정 전 의원을 비롯해 정치인들의 한결같은 ‘탕평책 사랑’에는 인사 갈등을 쉽고 빠르게 눈 앞에서 없애버리고 싶다는 평면적인 생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정된 권력이 있고 인간에게 권력 욕구가 있는 한, 갈등은 필연적인 존재다. 그리고 정치란 이런 갈등을 다루는 기술이다. 능력 있는 정치인이란, 결국 인사 갈등이 필연적 현상임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또 기계적인 인사 분배로 갈등을 일시에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관리'라는 실효성 있는 목표를 취하는 사람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상적인 탕평 정치는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현실정치를 개선하기 위한 근본적 해결책이라고 할 수 없으며, 인사 구조의 민주화, 선거 문화, 정치인의 리더십 등 정치문화와 환경적 요인이 함께 발전해야 그 실효성이 극대화될 수 있을 테다. 영조와 정조가 보여준 탕평론의 메시지도 이젠 현실정치에서 찾아야 한다. '연정과 탕평 인사라면 만사형통'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끝내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대해 토론하고 논쟁할 때다.
* 본 기사에 인용된 여론조사의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http://www.nesdc.go.kr)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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