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만 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586식 정의’, 박원순법으로 작별하자
당신들이 버린 조개가 해일이 됐다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의 갑작스러운 부고(訃告)가 정치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시민들을 경악시킨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난 그의 성추행 혐의와 이를 적극적으로 감싸고 있는 여당의 행태다.
“박원순 시장은 누구보다 성인지 감수성 높은 분…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방지하기 위해 죽어” -윤준병 의원, 13일 페이스북
“성추행 피해 기정사실화는 명예훼손…(서울특별시葬 논란은) 고소 사건 정치적 쟁점화하기 위한 의도” -진성준 의원, 13일 MBC라디오
“피해자 측 기자회견, 꼭 오늘이어야 했나” -정청래 의원, 13일 YTN 라디오
“(당 차원의 성추행 의혹 대응을 묻자) 예의가 아니다. 그런 걸 이 자리에서 얘기라고 하나. 최소한 가릴 게 있다. XX자식” -이해찬 대표, 10일 취재진을 향해
이 밖에도 여권 지지자들 사이에선 피해자의 침묵을 탓하거나, 피해자의 신상 정보를 캐낸다거나, 박 시장의 사망과 관련해 음모론을 제기하거나, 마치 위인전을 작성하듯 박 시장의 과거 친(親)여성적 행보들을 나열하는 등의 ‘2차 가해’가 끊이질 않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SNS에 올라오는 저명한 진보 인사의 고별사(告別辭)들은 차마 기사에 담기 민망할 정도다. 비통한 얼굴을 한 유력가(有力家)들과 서울시민들의 조문 행렬을 보고 있자면, 피해자에겐 대한민국이 거대한 복마전(伏魔殿)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싶다.
‘박원순 사건’, 추모로 끝나면 안 된다
누군가의 칭송대로, 박원순 시장은 변호사 시절 변호인단과 함께 ‘직장 내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처음으로 재판에서 성립시킨 인물이다. 부천서 성고문 재판에서 권인숙 의원의 변호인이기도 했다. 그는 2018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폭로가 이어지자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한 원칙을 강조하면서 ‘박원순 캠프’의 자원봉사자들에게 성폭력 예방 교육을 이수시켰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받았을 땐 “(판사가) 비판받을 대목이 있지 않느냐”고 했다.
여권에선 이 같은 행보를 언급하며 ‘공과(功過)를 분리하자’, ‘고인의 명예를 지켜주자’고 한다. 그의 혐의를 과거의 업적이나 개인적 애착으로 얼버무리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무단횡단을 하면서도 쓰레기를 줍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상황에 따라 선인일 때도, 악인일 때도 있다. 1980년대 민주화를 꿈꿨던 학생들을 구속해 고문에 일조했던 모 검사는 한 사체의 화장을 막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알린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위계질서에 평생 저항했던 사람이 권력을 얻으면 아무렇지 않게 가해자의 위치에 서기도 한다. 인간이란 그렇게 모순투성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단순 추모에서 끝난다면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인가. 피해자의 안온한 일상을 건 용기는 무엇을 낳는가. 공소권이 없다고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면서 유야무야 사건을 종료시켜야만 하는가.
물론 사적 영역에서 ‘지인 박원순’을 추모할 수는 있다. 다만 공적 영역에서는 왜 고위공직자들의 성추문이 계속해서 반복되는지, 여성 피해자들은 왜 자꾸 양산되는지, 위계 성폭력을 방지하는 실질적 방안은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박 시장의 소속 정당이자 집권 여당인 민주당이 할 일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사자 명예훼손을 금한다면서, 정치적 쟁점화는 말아달라면서, 기자회견의 의도가 의심스럽다면서 길길이 날뛸 때가 아니라는 소리다.
한국 문화는 고인이 되면 ‘추모가 우선’인 엄숙한 분위기가 존재한다. 그러나 여당이 이 문화를 정략적으로 이용해 한편으로는 재보궐 선거 후보자를 낼 생각을 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박 시장 조문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정쟁유발자’라고 비난하고 있으니 적반하장이 아닌가.
피해 여성들의 침묵 강요한 정치사
누구보다 직장 내 성범죄를 잘 알고 있었을 인권변호사의 말로가 비극으로 끝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까진 그래도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행비서 성폭행 사건으로 논란을 일으킨 안희정 전 지사는 1심 무죄 판결을 받았고, 대통령 조화가 놓인 모친상 빈소에서 거물 정치인들의 조문 행렬을 받았다. SNS에 ‘상쾌하다’는 글을 올려 ‘2차 가해’로 검찰에 송치됐던 그의 아들 안정균 씨는 보란 듯 민주당의 이후삼 의원실의 인턴 비서로, 최근 강준현 의원실의 비서로 고용됐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하며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침묵했다.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 줍고 있다.”
진보정당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유시민 당시 개혁국민정당 집행위원의 말을 떠올린다. 유 위원은 2002년 대선 후보 단일화 시기 정당 내부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을 이렇게 짓밟았다. 그는 당 게시판에 친히 납시어 “여성회의가 당이 아니라 여성들의 ‘권익’만을 중시하는 것 같다”면서 “당이 먼저인지 여성이 먼저인지 모르겠다”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
대의를 위해 약간의 희생은 무시하자는 말, 그것도 여성이 입은 성적 피해에 대해 침묵하자는 뻔뻔한 소리를 당당하게도 했다.
이는 보수보다 상대적으로 도덕적 결벽을 따지고, 인권을 우선시한다는 진보가 ‘집권만 하면’, 여권(女權)도 향상된다는 시혜적 인식에 기대고 있다. 이 같은 1980년대 식 ‘조직보위론’이 아직까지 민주당에 남아, 피해자들을 끝없이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실제 오거돈 전 부산시장 성추행 피해자는 “4·15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사퇴할 경우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오 시장 측의 요구로 피해 사실 공론화 시기를 조율해야 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선의(善意)로, 혹은 누군가의 욕심으로 지켜낸 진보의 승리는 결국 누가 훼손하고 있나. ‘공소권 없음’으로 종료된 이번 사건을 두고 ‘아직 밝혀진 게 없다’느니, ‘무죄 추정의 원칙’ 등을 운운하면서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괴롭히는 인간들이 아닌가.
박 시장의 영결식에선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장면이 상영됐다.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나라의 역사를 근본부터 바꾼 촛불항쟁은 서울시장이 그 인프라를 마련하고 지켜줬기에 세계사에서 드문 평화 혁명으로 성공했다”면서 그를 ‘민주주의의 아이콘’으로 떠받들었다. 이 같은 추모사는 진보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이어졌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을 외치면서 위계로 약자를 괴롭히고 또 피해 사실에 집단적으로 침묵하는 것이 그들의 정의(正義)라면 동의할 수 없다. 언제까지 친일 청산, 박근혜 탄핵, 보수 몰아내기에 급급해 집단 내 성추행에 대해선 ‘지켜보자’고 침묵할 것인가.
진중권 전 교수도 지난 11일 SNS에 “나를 포함해 운동권, 그렇게 숭고하고 거룩하지 않고 우리들도 어느새 잡놈이 됐다. 이제는 운동권이 도덕, 윤리, 명예를 모두 팽개쳤다”면서 “운동권들도 권력화, 속물이 됐기에 (중략) 그 막강한 권력으로 부하직원들 성추행까지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집권만 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586식 정의’, 종말을 고할 때다
그동안 진보의 편에 섰던 여성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성범죄 논란이 있을 때마다 ‘나중에’, ‘집권하면’이란 전제조건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친(親)페미니즘 성향을 공표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으니, 늦었지만 3년차인 지금부터라도 ‘그 때’를 실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인의 죽음 이후에도 세상을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이제는 법을 개정해야 한다.
검찰사건사무규칙 제69조에 따르면, 피의자가 사망할 경우 검사는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불기소 처분하게 돼 있다. 그러나 그대로 사건이 종결되면 유족 측이 ‘밝혀진 바 없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된다. 이는 남은 피해자를 평생토록 괴롭힐 수밖에 없다. 용기를 내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했던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자, 가해자의 마지막 불가역적 가해이기도 하다.
법 개정을 통해 가해자 사망으로 수사가 중단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은 조사와 판결은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절차가 돼야 한다. 2차 가해를 막고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일명 ‘박원순법’이라는 법 개정 절차가 필요하다. 정부 여당은 그렇게 지난 세월을 속죄해야 한다.
다시금 한 발언을 소환한다. 해일이 밀려오기 전에 조개 먼저 줍자. 이젠 좀 주울 때다. 당신들이 버린 조개가 벌써 해일이 됐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