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유승민 국민의힘 대선 경선 예비후보가 정홍원 선거관리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유 후보는 8월 31일 국회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경선준비위원회와 최고위원회가 이미 확정한 경선 룰을 자기 멋대로 뜯어고쳐서 역선택 방지조항을 넣으려고 한다”며 “그런 식으로 경선 판을 깨겠다면 그냥 사퇴하라”고 말했다.
유 후보 캠프에서 대변인을 맡고 있는 김웅 의원도 8월 30일 YTN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에 출연해 “정 위원장은 윤석열 후보를 미리 만났고, 윤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도 표명을 했다. 또 경선준비위원회가 어렵사리 만들어놨던 결론을 다 뒤집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며 “이 정도로 공정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면 정 위원장은 용퇴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유 후보 측이 정 위원장 사퇴를 촉구하는 건 ‘공정성’에 대한 의심 때문이다. 유 후보는 8월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윤 후보가 정 위원장을 8월초 만났다고 한다”면서 “정 위원장께서는 대선후보 경선 여론조사에 ‘역선택 방지 조항’이라는 걸 넣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가졌다는 얘기가 파다하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유 후보는 또 8월 31일 기자회견이 끝난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정 위원장과) 만났다고 후보가 시인하지 않았느냐”며 “그런 왕래도 있는 데다 정 위원장의 언론 인터뷰를 보니 윤 후보를 지지하는 것 같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것 자체가 처음부터 불공정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요컨대, 유 후보 측은 윤 후보가 정 위원장을 사전에 만난 것과 정 위원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윤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한 것을 근거로 선거관리위원회가 ‘윤 후보만을 위한 경선 룰을 만들려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얼핏 보면 정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한 유 후보의 말이 옳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후 상황을 따져보면 유 후보의 말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우선 윤 후보가 정 위원장을 만난 시점은 8월 5일이고, 정 위원장이 선거관리위원장으로 선임된 날짜는 8월 23일이다. 유 후보 말대로라면, 윤 후보는 무려 18일 전에 미리 정 위원장의 선임 사실을 예측하고 찾아가 교감했다는 뜻이 된다.
더욱이 국민의힘 당헌·당규에 따르면, 선거관리위원장은 최고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당대표가 위촉한다. 정 위원장은 이준석 대표가 선임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윤석열 후보가 미리 만나 경선 룰 조정에 대해 교감한 인물을 이 대표가 선관위원장으로 임명했다는 유 후보 측의 논리에 공감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정 위원장이 윤 후보를 지지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유 후보의 말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유 후보가 언급한 기사는 <월간조선> 8월호에 실린 ‘정통보수원로 2人 20대 大選을 이야기하다 - 정홍원 前 국무총리·김용갑 前 총무처장관’으로, 이 기사에서 정 위원장이 윤 후보에 대해 평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윤석열 전 총장은 검찰총장을 하면서 정권의 비리도 많이 보고 탄압도 받았기 때문에 정권교체에 대한 절박함이 있으리라 봅니다. 또 언행을 보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의지가 강한 것도 장점이죠. 하지만 과거 행적에서 입장 정리를 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 그 부분을 어찌 풀어나갈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윤석열·최재형·김동연) 세 사람 모두 검증을 마치지 않은 상태입니다. 검증 과정을 거쳐서 대한민국을 지키고 유지·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아까 얘기한 기초 소양과 링컨 리더십을 갖고 있거나 앞으로 가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지하려 합니다. 완벽한 사람이야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제일 절박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줄 사람이면 됩니다.
정치라는 게 추잡한 면이 있지요. 그렇게 뒤에서 연기를 피우거나 살짝살짝 총질을 해서 상처를 내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음모라는 게 입을 거치면서 계속 커지는 건데 의혹이 있으면 당당하게 내놓고 공론화하든지 해야죠. 그리고 개인 비리 얘기도 나오지만요, 만약 자신의 개인 비리가 심각하다면 후보로 나서겠습니까? 본인이 제일 잘 알 텐데. 실격 사유가 될 것 같으면 처음부터 나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발언을 ‘윤 후보를 지지하는 것 같이 이야기를 했다’고 볼 수 있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정 위원장이 이 인터뷰를 가진 시점은 7월 말이었다. 선관위원장으로 거론조차 되지 않던 시점이다. 만약 선관위원장이 되기 전 한 말이 공정성을 훼손한다는 논리라면, 이준석 대표 역시도 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음은 이 대표가 당대표로 취임하기 석 달여 전인 3월 6일 <매일신문 프레스18> 유튜브 채널에서 최훈민 기자·유재일 시사평론가와 나눈 대화 내용이다.
최훈민 기자 “윤석열이 너(이준석) 와라 하면 어떡할 거야.”
이준석 대표 “난 대통령 만들어야 될 사람이 있다니까요? 유승민.”
유재일 평론가 “유승민계가 김종인 없이 국민의힘 당권 잡을 수 있어요?”
이준석 “내가 (당권) 잡을 거야. 유승민계가 잡는 게 아니라.”
유 후보의 논리대로라면, 유 후보를 지지하는 이 대표가 대표 자리에 오른 것 자체가 불공정했다는 말이 된다. 나아가 이 대표가 구성한 경선준비위원회가 결정하고 최고위원회에서 추인한 경선 룰은 ‘유승민 후보만을 위한 경선 룰’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정 위원장이 윤 후보를 만나고 언론 인터뷰에서 윤 후보를 언급했다고 해서 ‘불공정’하다는 유 후보 주장에 따를 경우, 유 후보와 가까운 관계에 있고 언론 인터뷰에서 ‘유승민을 대통령 만들겠다’고 공언한 이 대표도 사퇴해야 할 인물이 돼버린다.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경선 룰을 둘러싼 후보 간 갈등은 있을 수밖에 없고,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큰 정치인’이라면, 논리적 비약과 말장난으로 지지를 호소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눈앞의 이익을 위해 억지를 부리기보다, 합리적 언행과 국민을 위한 공약으로 자웅을 겨루는 ‘대선 후보’들의 모습을 기대한다.
좌우명 : 인생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