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후 생활비 부담에 다시 캥거루족으로
부모의 경제적 부담 점점 가중, 사회적 문제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명화 자유기고가)
부모의 자녀 뒷바라지는 어디까지 일까. 부모의 역할은 진정 정년이 없는 것 아닌가 싶다. 성인이 돼서도 부모와 함께 살며 경제적 지원을 받는 이른바 '캥거루족'이 늘고 더욱이 고령화되고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20대는 물론 사회활동이 왕성한 30·40대까지도 경제적 이유 등으로 부모의 품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캥거루족의 기원
캥거루족은 원래 우리나라가 IMF 관리체제 아래 있던 시절 대학가에서 유행하던 신조어였다. 당시 심각한 취업난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휴학이나 해외연수 등의 방법으로 가급적 학생 신분으로 남거나, 졸업 후에도 취업하지 못한 채 계속 부모 신세를 지고 있는 젊은이들을 총칭하여 불렀다.
심리학자들은 한때 캥거루족이 어른으로서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일종의 '피터팬 증후군'이라고 설명했다. 피터팬 증후군은 육체적으로 성숙했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신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1983년 미국의 심리학자 댄 카일러 박사가 '피터팬 신드롬'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취업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이후 분가를 하거나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청년들은 여전히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캥거루족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캥거루족은 범주가 넓어져서 취업을 해서도 고물가와 비싼 주거비 등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 영향도 크다.
전 세계적 추세
이와 같은 흐름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하고 있는 일이 아니다. 2000년을 전후해 젊은 인구들의 취업문제가 심각한 세계적 문제로 떠올랐는데, 비유하는 용어만 다를 뿐 일본을 포함하여, 미국, 영국 등 유럽 등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용어가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돈이 급할 때만 임시로 취업할 뿐 정규 취업을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프리터(freeter)라고 칭하거나 부모에게 기생하는 독신이라고 해서 '패러사이트 싱글'이라고 부른다. 초고령사회에 장기 불황을 겪은 일본은 4050 중년의 캥거루가 7080 부모에게 얹혀사는 ‘7040′ ‘8050′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다. 1990년대 경제 거품이 꺼지면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부모에게 얹혀살던 20대 캥거루족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그대로 나이 먹어 50대 캥거루가 됐다고 한다.
이들은 70~80대 노부모가 타는 연금으로 먹고산다. 부모가 세상을 뜨면 그야말로 생계 수단이 끊긴다. 캥거루 고령화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경고다. 심지어 몇 년 전 일본 도쿄에서 76세 아버지가 44세 아들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버지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농림수산성 차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아들은 캥거루족일 뿐만 아니라 게임에 빠져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였다.
일본 등 주변국들뿐만 아니라 미국, 그리고 유럽에까지 캥거루족이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처럼 부모에게 얹혀사는 3~40대를 ‘밤 보치오니’(bamboccioni·큰 아기)라 부른다. 2019년 기준, 18~34세 청년 중 무려 64.3%가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한 30대 남성이 부모에게 재정적 지원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연봉이 적어 살기 힘들다는 건데, 이탈리아 대법원은 '스스로 자립 방법을 찾으라'면서도 '부모가 매달 300유로( 40만 원)의 용돈을 지급하라'라고 했다.
황당한 판결이라고 여겨지지만 그만큼 이탈리아는 자녀들을 오래 뒷바라지하는 부모가 적지 않다고 한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유사 소송이 수십만 건에 달했다고 하니 먼 나라 이야기지만 참 개탄스럽다.
이 '큰 아기'들은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캐나다에선 직장 없이 떠돌다 집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부메랑 키즈'라고, 영국에서는 부모의 퇴직 연금을 축낸다고 하여 키퍼스(kippers)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탕기(Tanguy)', 독일의 ‘네스트 호커(Nesthocker)’ 등도 캥거루족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는 단어다.
한국의 현실
문제는 한국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부모와 함께 사는 청년 비율이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고 한다. 독립했다가 경기불황 등으로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해 원래 본가로 회귀하는 젊은이들을 뜻하는 '연어족'이나 '리터루족'이 늘어나는 탓이다. 오를 대로 올라버린 집값과 치솟은 물가 등을 혼자 오롯이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독립한 직장인 모씨(29)는 약 2년간의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마치고 최근 다시 경기도 본가로 돌아갔다. 그는 "금리가 오른 탓에 월세와 비슷한 전세 이자를 보고 자취방 이사를 포기했다"며 "차라리 본가에 들어가 돈을 아끼려고 마음먹고 자취 대신 통근을 선택했다"라고 했다.
3년 차 직장인 모씨(28)는 자취 8개월 만에 자취 '포기 선언'을 했다. "자취해보니 월세, 관리비, 인터넷 요금 등 공과금과 생활비까지 월급이 줄줄 세서 돈을 전혀 모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부모님과 함께 살면 자취하는 것보다는 돈을 쉽게 모을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수도권 외곽으로 밀려나는가 하면 신혼집을 구하지 못해 결혼을 미루는 경우도 속출하는 일은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다. 결혼을 앞두고 신혼집 때문에 머리를 싸매는 자녀들과 싼 전월셋집을 찾아 수도권 곳곳을 헤매는 자녀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는 것은 성인 자녀를 둔 가정이면 공통 애로사항이다.
이에 오를 대로 올라버린 전셋값과 치솟은 물가로 '독립'을 포기하고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청년세대가 늘면서 부모들은 품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식들에, 돌아오는 자식까지 경제적 부담은 점점 가중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캥거루족의 분포
한국 보건사회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50세 미만 성인 10명 중 3명이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같이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20~30대뿐 아니라 40대에서도 미혼자 2명 중 1명은 부모와 동거 중이었다. 만혼(晩婚)·비혼(非婚) 풍조가 퍼지고 취업난과 주거비 부담 등이 겹쳐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한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무분별한 투자로 빚더미에 앉은 MZ세대가 늘어난 것도 캥거루족 증가를 부추기고 있다. 이는 다른 연령대와 달리 30대 이하 젊은층이 주식과 코인에 대거 투자한 것이 악영향을 미친 결과다.
이런 상황에서 월세를 포함한 생활물가가 급격히 오르자 독립을 포기하고 캥거루족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 활력을 높이지 못하면 청년 세대의 경제적 부담을 부모 세대가 지는 상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전문가의 진단이 나왔다.
여기에 기혼인데도 부모 집에 얹혀사는 신캥거루족, 특히 결혼 후 독립했다가 전세난과 육아 문제 같은 어려움으로 다시 부모 집으로 들어오는 리터루족, 결혼하여 주거는 따로 하더라도 경제적 지원을 계속 받는 자녀들도 적지 않다.
취업난·주거비 부담…만혼 비혼 증가해
자녀가 부모로부터 주거 독립을 하는 계기는 결혼(36.4%), 진학(28.0%), 직장 관련(20.9%) 순이었다.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은 “20대부터 40대까지 부모 곁을 못 떠나는 건 결혼이 늦어지거나 아예 결혼을 안 하는 데 따른 영향이 크다”면서 “부모 집을 떠나는 것이 특정 연령대에 정해져 있다기보다 취업, 결혼 등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캥거루족의 증가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렇게 독립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닐까 한다. 우리 사회에서 부모 도움 없이 30대에 결혼해서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현실이다. 실제로 30대의 통상적 독립은 결혼인데 혼인 건수가 줄어드는 이유로 55%가 내 집 마련과 결혼비용 증가라고 한다.
이에 반해 직장이 없거나 결혼을 안 하면 거의 절반이 부모에 얹혀산다. 그저 자립이 좀 늦어지는 게 아니고, 영원히 독립 못 하는 중장년 캥거루다. 일본의 '7040′ ‘8050′ 문제가 우리에게도 현실로 닥쳐오는 듯하다. 마흔 넘어서도 '캥거루족' 생활을 하는 고령화 현상이고 보면 이제는 그들이 '영원히 독립 없는 중장년 캥거루권'에 편입된 게 아닌가 싶어 미래가 암울하다.
자립하지 못한 성인이 증가하는 건 그만큼 국가경쟁력이 감소한다는 말도 된다. 캥거루족은 그냥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국가 생존의 문제다.
사회적 대책은 있나
캥거루 양산의 주범인 청년 주거난에 대해 전문가들도 제도와 정책 차원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봤다. 한국 보건사회 연구원은 "성인이 된 후에도 부모와의 동거가 지속되고 비동거 부모에게 계속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특질이 아니라 제도와 정책의 문제 차원에서 더욱 심화한 연구를 통해 설명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제도와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같은 청년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서울시와 서울 주택도시공사(SH)가 역세권 청년 주택 공공임대 사업을 진행 중이다. 공공임대는 주변 시세의 30% 수준의 임대료만 지불하면 되기에 청년들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공급이 많지 않은 데다가 경제적 자격기준이 넓어, 청년들 사이에서는 ‘주거 로또’로 불리고 있다.
끝으로, 캥거루족이 나이를 먹는 만큼 캥거루족이 의존하는 부모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캥거루족의 노후화가 경제 침체를 의미하는 경고등이라고 진단한다. 자립하지 못한 성인이 증가하면 저출산이 가중되고 노동인구는 감소하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사회 불안을 조장할 수도 있어, 초고령사회에서 캥거루족의 증가세, 중년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정명화는…
1958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해 경남 진주여자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 문과대 문헌정보학과 학사, 고려대 대학원 심리학 임상심리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