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 “國是 원고 이재오가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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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 “國是 원고 이재오가 도와”
  • 정세운·최신형 기자
  • 승인 2010.06.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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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 전의원"민주산악회 시작은 대구·경북"...YS 전국 조직으로 키워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정당과 국회가 해산되고 민주주의가 유린당하던 시절, 민주산악회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보루였다. 1981년 5월 1차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YS에 의해 전국적인 모임으로 탄생된 민주산악회의 첫 시발점은 사실 대구경북 민주산악회, 즉 경민산악회였다.

당시 대구경북 민주산악회를 주도했던 사람은 유성환 전 국회의원. 5공화국 헌법이 공포된 1980년 10월 27일, 유 전 의원은 대구 팔공산에서 대구경북 민주산악회 창립총회를 시도하려했지만 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결국 실패했다.

10월 1차 모임에 이어 11월 2차 모임도 실패한 대구경북 민주산악회는 그해 12월 16일 드디어 첫발을 내디디며 민주화운동의 서막을 올렸다.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난 유 전 의원은 1960년 경북도의원으로 정치권에 입문한 뒤 12대와 14대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YS와 함께 한국정치사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2000년 정치권을 뒤로 하고 야인 생활로 돌아간 그는 현재 한국정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난 5월 21일 동작구 사당동 근처 카페에서 가진 유 전 의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통일담론 등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 국시파동의 주인공 유성환 전 의원은 정치의 시작과 끝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말했다 © 시사오늘 권희정


-지난 2000년 이후 정치권을 떠나셨습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지난 1960년 경북 도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40년 동안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정착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간 돌이켜보면 자부심도 있고,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래서 남은 인생을 민족과 통일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 연구도 하고, 틈틈이 집필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정계에 있었는데, 지난날의 소회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치의 시작과 끝은 바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성공한 역사가 된 이유도 전적으로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켜냈기 때문입니다. 동구권과 일부 신생국들이 마르크스의 공산이념을 선택한 반면, 우리는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한 거죠. 물론 민주화를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 많은 민주화 운동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고초가 뒤따르기도 했지만, 민주적인 선거 절차와 의회제도 등을 향한 열망이 있었기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유 전 의원은 지난 1960년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당시 29살의 나이로 경북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신민당에 입당, YS를 정치적 스승으로 모시며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유 전 의원은 3선개헌 반대 운동 등을 하면서 유신정권하에 고초를 겪었고 1981년~1984년까지 정치활동이 규제되는 등 고된 야당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대구 중서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원내에 진입했다. 
 
1980년 10월 27일, 첫 창립총회 시도
 
-YS하면 많은 사람들은 민주산악회를 떠올립니다. 대구경북 지역의 경민산악회를 결성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1980년 당시 전두환 정권이 헌법을 개정했는데 기존의 정당을 해체한다는 조항이 있었어요. 정당해산을 하려면 헌법재판소가 반민주적인 정당을 헌법소송절차를 거쳐 강제해산토록 해야지, 어떻게 국민투표로 정당을 해산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신민당의 유지와 민주회복을 위해 산악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당시 전두환 정권하에서는 ‘민주’라는 명칭을 쓰면 잡아가니까 ‘경민’이라는 이름을 대신 썼습니다.”

민주산악회는 제5공화국 헌법부칙에 따라 기존 정당들이 해산된 이후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계열 정치인들이 만든 친목단체다. 1981년 6월 9일 공식기구로 발족된 민주산악회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고문으로, 이민우 전 총재를 회장으로 각각 추대해 주요 정치적 사건에 대한 성명서 발표, 지방조직 확대 등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근데 왜 하필 산악회입니까.
“전두환 정권의 계엄 치하에서는 정치활동이나 시위·집회 등이 모두 금지됐어요.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왜 산악회를 만들어야 하느냐고 물어 보곤 했는데, 내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산악회를 만들려면 회장도 필요하고, 고문·부회장·총무·연락부장 등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그러면 그게 신민당 같은 정치결사체하고 다른 게 뭐냐고 되물었죠. 또 위원회로 만들면 정치조직이라고 오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산악회를 결성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대구경북 민주산악회를 처음 결성한 게 언제입니까.
“1980년 10월 27일입니다. 그날은 10·26 사건과 12·12 군사 반란으로 제5공화국 헌법 전문이 개정된 날이기도 합니다. 독재정권이 헌법을 유린하는 날, 우리는 신라의 화랑도가 군사훈련을 받은 팔공산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들기로 했어요. 하지만 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10월에 이어 11월에도 창립총회를 여는데 실패했습니다."
 
-민주산악회가 1981년 6월 9일 공식기구로 발족됐다고 알고 있는데, 대구경북 민주산악회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사실 민주산악회 중 대구경북 지역의 민주산악회가 가장 먼저 결성됐습니다. 이후 YS가 민주산악회의 전국화를 이루셨고요. 민주산악회의 전국 조직화가 이뤄진 다음 계룡산에서 공주 갑사대회를 열었는데, 이민우 전 총재가 대구경북 산악회가 민주산악회의 최초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이 심했다고 하셨는데요. 탄압에 얽힌 비화는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1980년 10월 27일 결성을 앞두고 대구경북 민주산악회 회원들 모두 가택연금을 당했어요. 11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탄압해도 민주산악회 인사들의 민주화 열망을 꺽지 못하니까 심지어 기업체 고위직을 미끼로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동지들 모두 일체 응하지 않았어요. 그 후 12월 16일 비밀리에 민주화 동지들과 함께 대구경북 민주산악회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민주산악회의 태동은 대구 경북에서 시작된 경민산악회가 시발이 됐다고 유 전 의원은 밝혔다

YS “경민산악회 가치 전국화 필요”
 
-대구경북 민주산악회에 YS도 참석하셨습니까.
“그럼요. 1981년 4월 당시 1차 가택연금 상태였던 YS에게 참석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내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초청장을 보내드렸더니 가택연금이 해제되던 1981년 5월 1일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YS가 참석했을 대구경북 민주산악회 제7차대회 당시 공안당국의 감시는 없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경찰 250여명이 포위한 상태였으니까요.”
 
-팔공산 정상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팔공산에 모인 33인의 동지들에게 한편의 시 같은 연설을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저기 저 구름 밑 민족의 영산 팔공산, 영급의 세월 속 우뚝 선 팔공산. 당신 집 앞뜰에 자유민주주의의 화단이 있어. 산악동지들이 은밀히 모여 굴욕과 압제와 살상의 구릉 넘어, 자유의 님 민주의 전사 만나고저 산에 오른다, 팔공산에 오른다. 이 땅의 거산 준령을 다 오르자’라고 연설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는 사실상 민주산악회의 출발 이념이자 동기라고 할 수 있습  니다”
 
-그날 참석 당시 YS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오늘 이 민주산악회의 뜻이 전국적이어야 한다면서, 캄캄한 시대에 불빛처럼 빛나는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함께 하자고 격려해주셨습니다.”
 
-대구경북 산악회 이후 민주동지회가 전국화된 거군요.
“네, YS가 민주산악회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장시켰습니다.”
 
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 세력의 구심체 역할을 하게 된 민주산악회의 태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민주산악회의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YS가 종교집회 등에서 정치발언을 하는 등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하자 전두환 정권은 1982년 5월 31일 YS에게 2차 가택연금을 하는 등 또 다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YS를 따르던 민주계 인사들은 성명서와 유인물 등을 끊임없이 만들어 배포하는 등 군사정권에 맞섰다.
 
-민주산악회는 어떤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민주산악회에 대한 평가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역사가 평가해야 합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군정을 종식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YS가 중심이 된 민주산악회는 1987년 6월 민중항쟁의 정치결사체로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고 1992년 YS를 대통령의 당선되는데 일조했지만, 사적 선거조직이라는 비판을 받아 그해 12월 23일 해체됐다.
 
통일, 그것은 한민족의 꿈
 
-원내 활동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2대 국회 때 통일국시 발언으로 당시 정국이 급속히 냉각됐습니다. 평소 소신이었습니까.
“민족이 분단됐으면 합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통일이라는 건 우리들 마음속 응어리가 맺혀있는 꿈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나요. 그런데도 군부세력들은 독재정권의 연장을 위해, 미국의 지지를 받기 위해 국시를 반공으로 규정했어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유 전 의원은 제131회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 둘째 날인 1986년 10월 14일,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는 통일국시 발언으로 정국을 여야의 극한대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유 전 의원의 이 같은 발언은 군부독재 세력들이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는 혁명공약 제1조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틀 뒤인 10월 16일 당시 국회부의장 최영철은 집권 민정당 소속 의원들만 따로 모아놓고 경호권을 발동한 채 체포동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유 전 의원은 다음날 새벽 2시30분쯤 자택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 구속수감 돼 1심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유 전 의원은 1991년 11월 항소심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데 이어 1992년 9월 면책특권 조항을 인정받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 전 의원이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통일국시파동은 결과적으로 헌법45조(국회의원 면책특권)가 선언적 규정에서 구체적인 재판규범이 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당시 원고내용 중 국시, 인천사태평가, 삼민이념 등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시발언 원고를 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입니까.
“전두환 정권이 학생 운동하는 대학생들을 잡아가서 추궁을 했어요. 근데 삼단논법으로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삼민이념은 좌경세력들의 이념이다. 너는 삼민이념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좌경용공이다’ 뭐 이런 식으로. 그래서 내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라는 당위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학생 운동권에서 주장하는 삼민이념에 대해 소상히 알지 못했기에 이재오 당시 민통련 서울지부 부의장에게 삼민투쟁에 대해 자문을 했는데, 삼민이념이 헌법이나 형법에 위배되는 게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삼민이념에 대한 내용이 들어갔던 겁니다.”
 
-이 위원장과는 친분이 있는 사이입니까.
“형님, 동생 하는 사이죠. 지난 18대 총선 때 이 위원장이 낙선하고 한 번 만났습니다. 요즘은 이 위원장이 바쁘니까 만나지 못하고 있어요. 이 위원장은 젊은 시절부터 민중운동을 하는 등 수많은 고난과 아픔을 겪었어요. 우리가 그건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 전 의원의 대정부 질의서에 포함됐던 5·3 인천사태는 1986년 5월 3일 재야 및 학생 운동권 세력이 국민헌법제정과 헌법제정민중회의의 소집을 요구하던 시위였다. 1986년 2월 12일 당시 정국은 제도권 세력이었던 신한민주당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1000만 명 서명을 시작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사회 각 계층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광주를 중심으로 직선제 개헌 외에 ‘광주학살 책임자처벌’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대구 등에서도 다른 독자적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해 4월 29일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이 소수 학생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 역시 운동권 급진세력들을 문제 삼았다.

그러자 재야세력과 학생들은 5월 3일 신한민주당 개헌 추진위원회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 시작 전부터 격렬한 시위를 벌이며 대회를 무산시키는 등 제도권 정치세력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또 삼민이념은 1985년 4월 전국학생총연합회 산하 삼민투쟁위원회의 기본이념이다. 민족통일·민중해방·민주쟁취 구현을 목표로 삼고 활동한 이들은 85년 5월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좌경용공조직으로 낙인찍힌 뒤 각 대학 위원장들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걸었다.
 

 

▲유 전 의원은 지난 1960년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당시 29살의 나이로 경북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신민당에 입당, YS를 정치적 스승으로 모시며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 반대
 
-국시 발언 이후 공안당국의 조사과정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당시 나를 조사했던 이XX 검사가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발언이 아니었냐며 추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비롯해 당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당시 23일간 조사를 받으면서 내가 검사에게 그랬어요. 공단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한 달에 얼마 받고 일하는지 아느냐고. 이 사람들이 먼 훗날에 국가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직선제 정국에서 국시 발언으로 인해 직선제 개헌 동력이 약화됐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YS에게 주의를 몇 번 받았어요. 하지만 원내에 들어오면 통일·민족문제만큼은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발언 이후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통일’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면 구속되지 않는다며 회유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이렇게 대답했죠. ‘구속·불구속의 문제가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다. 내 관과 함께 대구 유권자 앞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YS가 화내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국회가 다른 이슈로 흘러가고 있는데, 왜 엉뚱한 문제를 들고 나왔느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발언 말고 1995년 대정부 질문에서 헌법 개정을 주장한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YS가 다음날 불러서 내가 어제 기자회견에서 개헌 불가 원칙을 밝혔는데, 왜 갑자기 개헌 이슈를 꺼냈느냐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웃음).”
 
-국가보안법으로 고초를 겪으셨는데,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개정할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폐지에는 반대합니다. 참여정부 시절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서 박물관에 보내야 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국군통수권자로서 적절한 발언은 아니라고 봅니다. 개혁을 하는데 있어 혁명적으로, 급진적인 방법은 좋지 않아요.”
 
-현재 국가보안법은 의미 없는 법 아닌가요.
“의미가 있죠. 국가보안법이 폐지된다면 우리의 선조와 선배들이 피땀 흘려 지켜온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습니다.”
 
-형법으로 대체하면 폐지해도 무방한 거 아닙니까.
“국가보안법이 형법에 들어간다고 해도 거시적으로 보면 형법보안 또는 대체입법을 하면 간첩 하나 잡을 수 없는 허수아비 법이 될 수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때문에 고초를 겪으셨는데도 국가보안법 존속을 주장하는 겁니까.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면 개혁이고 존속을 주장하면 수구라는 식의 사고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국가보안법의 합리적인 부분은 좀 더 강화하고, 비합리적인 부분은 개정해야지, 무조건적인 폐지를 강행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비합리적인 부분이라면 불고지죄를 말하는 겁니까.
“네, 불고지죄 같은 거죠. 그건 사실 우리나라 문화와는 맞지 안 맞는 부분이 있잖아요.”
 
DJ의 햇볕정책은 실패한 정책
 
-통일문제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한 거 같은데, 지난 정부 때의 햇볕정책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다니면서 대북관계에 대한 논문을 썼어요. 논문의 핵심이 관계·교섭이 중심이 된 대북관계였어요. 햇볕정책을 보면 북한의 자유민주화를 위해 남북경협자금이 필요하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식의 남북관계에는 반대합니다. 왜냐면 북한의 자유민주화는 그들 스스로 김정일식 독재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지, 돈을 주면서 관계를 맺는다고 북한이 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DJ가 북한에 8조원이라는 천문학적 돈을 줬지만 결국 남북관계가 개선됐습니까.”
 
-맹목적으로 통일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경제적인 지원을 하는 게 훗날을 위해 좋지 않나요.
“경제적 지원을 해줘야지 통일이 가까워지는 건 아닙니다. 통일문제는 워낙 큰 문제기 때문에 국제정서상 가능성이 있을 때 본격적으로 논의될 거라고 봐요.”
 
-최근 천안함 사태는 어떻게 보십니까.
“군함이라는 건 영토로 간주되기 때문에 북한이 천안함을 침몰시틴 것은 국토에 대한 폭격이고 주권에 대한 정면 공격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대응은 어떤가요. 야당 의원들의 성명서 등을 보면 앞날이 걱정됩니다. 감히 천안함 용사 영정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터넷을 중심으로 천안함 조작설 등이 떠도는데 가치가 혼돈되고 사고방식을 견제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봐요.”
 
-2010년은 6월 항쟁 23주년 되는 해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6월 항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기폭제이자 우리시대 개혁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6월 항쟁으로 인해 독재정권의 억압에서 벗어나 개인의 가치가 존중받는 시대로 전환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정당, 파벌 등을 떠나서 6월 항쟁은 우리 모두에게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 에서 전국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과 이한열의 최루탄 사망 사건 등이 도화선이 돼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로 번졌다. 이후 전두환 정권은 수많은 시위대열에 합류한 학생·재야인사·시민사회단체 등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받아들였다.
 
-1987년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는 세력간 이념논쟁 같은 건 없었습니까.
“그때는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어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가 계속되다보니 군정종식이 하나의 목표가 됐었지, 극한 이념 투쟁은 없었습니다.”
 
민주화에 헌신한 YS는 우리시대 큰 어른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한 정치적 결사체 중 민주동지회가 가장 큰 조직이었습니까.
“그럼요. 민주동지회의 세력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죠. 물론 거기에는 YS라는 큰 정치인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 YS계로서 활동을 했는데, YS는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일관된 사상을 갖고 있고, 신념이 강한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민정부에 대한 평가도 역사가 하겠지만, 군정을 종식시켰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은 오늘 한 발언이 10년 뒤에도 변하지 않아야 해요. 그러 면에서 보면 김 전 대통령은 평생 민주주의 하나만 위해 살았다고 볼 수 있어요.”
 
-1997년 당시 대선을 앞두고 이인제 의원의 지지의사를 밝히며 함께 탈당했습니다. 그 이후 정치권에서 멀어지셨는데요. YS의 지시가 있었습니까.
“그런 건 없었습니다. 탈당하게 된 이유가 당시 여당 일부 사람들이 경상북도 구미에서 YS화형식을 했어요. 이회창 당시 총재가 즉각 중지하고 그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수습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게 하나의 이유가 됐죠.”
 
-정치원로로서 현재 정치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나는 정치원로도 아니고, 현 정치권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이 있지만, 정직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항상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구도 고착은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내무위원회 소속이었을 당시 김정렬 국무총리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소학교 다닐 때 역사책을 보면 신라·고구려·백제로 나눠져 있어 무의식적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지역분할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산 너머 있는 사람들은 다른 민족인줄 알았고, 미국도 남북 전쟁을 하는 등 같은 민족끼리 갈라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석을 달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지역감정은 우리 모두 극복해야 될 과제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최근에는 정의라든지, 그런 추상적인 관념에는 무관심한 행태가 일반적인데요. 요즘 세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가하십니까.
“정의라는 진리를 찾아내야지, 그렇지 않으면 가치가 유린당하고 멸시당하는 등 혼돈의 시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치의 다양성은 결국 자유 같은 추상적 가치에서 나오거든요.”
 
-원내 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예전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당시 내가 내무위원회 소속이었는데, 당시 사회적 혼란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한 나라의 대통령이면 국민들을 위로하면서 함께 있어야 하는데, 농구장 가서 웃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청와대를 비판했더니 당시 상임위원장이 앉아서 말하라고 제지를 했어요. 그래서 내가 유성환은 앉으나 서나 마찬가지라고 맞받아쳤더니 야당의원뿐 아니라 여당의원들도 막 웃었어요. 야당의원만 웃어야 되는데(웃음).”
 
-이명박 정부 출범 3년차 중반을 넘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작년 나로호 1차 발사를 앞두고 언론이나 국민들의 관심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하지만 나로호 발사가 실패한 뒤 사람들의 관심이 서서히 식을 때쯤 이 대통령이 나로호에 참여한 과학자들을 불러 용기를 줬어요. 그런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디 있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지도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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