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6세와 프랑스 대혁명’, ‘사상의 순교자인 볼테르와 똘레랑스’, 위기의 인문학 시대에 인문학 예찬론자를 만났다. 단편적인 사고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성찰과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제도권 정치권의 변화를 꿈꾸는 이충범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YS정권 시절 최연소 ‘청와대 사정비서관’이자 문민정부의 신경제론의 바탕이 된 ‘영소사이어티(Young Society)’의 멤버였다. 조선시대 문신인 기은(耆隱) 박문수가 지방 탐관오리를 일벌백계로 다스린 암행어사의 상징이었다면, 이 변호사는 문민정부 시절 공직사회와 토착비리 등을 근절한 사정수사의 상징이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이 변호사는 사정비서관 시절 과다수임료 문제로 불명예 퇴진했고 이후 제도권 정치권의 벽을 실감하며 오랜 정치적 유배생활을 감내했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이 자신의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민심의 심판을 받겠다고 고백하는 이 변호사. 과연 그의 도전은 축배의 잔이 될까, 아니면 독배의 잔이 될까.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온 지난 15일,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한 연구실에서 가진 이 변호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가 짊어진 고난의 십자가를 들어볼 수 있었다.
-YS정권 당시 청와대 사정비서관 이후 너무 오랫동안 야인으로 지낸 것 같습니다. 시계바늘이 2011년을 향해 가고 있는데, 요즘 근황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좀 오래했죠(웃음). 문민정부 시절엔 YS의 아들인 김현철 소장과 중학교 선후배 관계라는 민감성 때문에 정치에 전혀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2000년 16대 총선 때 한나라당 후보로 충북 진천·괴산·음성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2년 뒤인 2002년 8·8 재보선에서 경기 하남지역에 공천을 신청했는데, 당내 두 번의 여론조사에서 1등을 하고도 5등한 분에게 공천이 돌아갔죠. 또 2004년 17대 총선 당시 하남에 재도전했지만 여의도 입성에 실패했고 18대 총선 땐 ‘친박계 학살’로 인해 참여정부 시절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분한테 공천이 돌아갔습니다. 18대 총선 이전엔 야인이었는데, 그 후로는 한나라당 하남시 당협위원장까지 뺏겨 낭인이 됐습니다(웃음).”
지난 1957년 충청북도 음성에서 출생한 이 변호사는 서울 중대 부속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했고 1985년 제2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 변호사는 정해구락부(정해복지)를 만들어 동료 변호사들과 무료 법률상담 등 봉사활동을 통해 어렵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했다. 이후 1993년 청와대 사정비서관을 시작으로 한국변론 이사장,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이사장, 미래포럼 집행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정치입문과정을 보면 YS와 김현철 소장의 역할이 컸던 것 같습니다. 당시 상황을 회고하신다면.
“YS정권 시절 청와대 사정비서관으로 임명된 내막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그전에 언질 같은 것도 전혀 없었거든요. 지금도 가끔 김현철 소장과의 친분 때문에 사정비서관에 발탁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건 오해입니다. 김 소장이 중학교 후배였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돌았지만, 김 소장과는 선후배 관계라기보다 1992년 대선을 함께 치르며 문민정부의 탄생에 기여한 정치적 동지관계죠. 중대 부중 3년 후배인 김 소장이 1989년 추석 쯤 정해복지로 찾아와 대뜸 통일민주당 회보를 내려고한다며 편집부가 있는지 물어봤어요. 그러면서 YS가 통일민주당 동작을 지구당위원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고 말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치권에 입문할 준비가 되지 않아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영소사이어티로 YS와 본격적인 인연”
-그럼 언제부터 YS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었습니까.
“1992년 대선 때 YS의 대권전략과 집권 이후의 개혁 방향 등을 연구한 ‘영소사이어티’라고 하는 정책개발연구단체가 계기가 됐습니다. 국가발전을 위한 새판 짜기를 주제로 30∼40대 박사급 전문가 50여명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정책을 연구했는데, 당시엔 순수한 젊은 열정이 정말 넘쳤던 거 같아요. 그 당시 YS도 대선 기간 중 영소사이어티 간담회에 참석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이후에 청와대 사정비서관에 발탁된 거죠.”
-영소사이어티가 김현철 소장의 사조직이었다는 말도 있던데요. 사실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김 소장은 당시 YS의 심부름만 했을 뿐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고 상당히 예의바르게 행동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현재 김현철 소장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아무 네트워크도 없습니다. 청와대 사정비서관에서 물러난 뒤 김 소장과 교류를 하지 않다가 1997년 한보사건으로 그가 구속된 이후 내가 면회를 갔죠. 그 땐 후배였기에 수의를 입고 나오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지금은 그냥 자연인으로 각자 살고 있죠(웃음).”
-사정비서관 낙마 당시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까.
“청와대 사정비서관에 임명되기 전 변호사 시절에 맡았던 청구주택 사건이 원인이 됐는데, 당시 8대 신문이 대대적인 보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은 이후에 ‘미안하다 앞으로 정치를 할 텐데 그때 도와주겠다’는 말로 갈음하며 하루 만에 잠잠해졌죠. 그 당시엔 거대 언론과 싸울 정신적 여유나 자신도 없었습니다.”
청구주택 사건은 지난 1987년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92번지에 ‘청구주택’이 900여세대의 직장조합주택 아파트를 건축·분양하면서 직장인이 아닌 일반인에게 서류를 조작하는 속칭 ‘딱지’를 만들어 매매한 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딱지를 구입한 341명의 입주자 전원에게 100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고 벌금을 낸 입주자들이 청구주택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변호사는 341명의 딱지 입주자 중 변호사 수임료를 낸 209명으로부터 사건 수임을 의뢰받고 1992년 7월부터 6개월간 300여 페이지가 넘는 사건 정리서를 만들 정도로 이 사건에 매달렸다. 같은 해 12월 말 청구주택으로부터 20억 원의 합의금을 이끌어 냈지만 청구주택은 입주자 341명 전원에 대한 합의금을, 변호사 수임료를 낸 209명은 소송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만 합의금을 달라고 주장해 결국 합의금 수령이 지연됐다. 그러던 중 1993년 3월, 이 변호사는 청와대 사정비서관으로 임명됐다.
-YS정권 시절 사정비서관을 했는데, 최근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이나 청와대 대포폰 논란 등을 보는 견해나 남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도 민간인 인권침해나 정치보복의 차원에서 전방위수사에 활용됐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비상대책회의 등을 하면 YS는 당시 김덕 안기부장을 제외시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전까지 안기부장이나 검찰총장의 힘이 얼마나 셌습니까. 문민정부 시절에 청와대 사정비서관이 사찰이나 불법도청 등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영소사이어티 멤버들은 20여년이 흐른 지금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김무성 당시 청와대 사정비서관은 친박계에서 친이계로, 고려대 학생회장 출신인 김영춘 청사단 단장은 YS정권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에서 민주당으로 말을 갈아탔는데, 당시 멤버들의 활동을 보면 남다른 감회에 젖을 것 같습니다.
“다들 일취월장하고 나만 공부를 하고 있네요(웃음). 문민정부 시절엔 개혁에 앞장섰다가 이후 정치적 행보가잘 풀리지 않았지만, 모든 고통은 나를 성숙하게 하더라고요. 오히려 지금은 내가 서있는 위치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충범, 당연히 친박”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천될 당시를 되돌아보신다면, 어떻습니까.
“당시 경기도에서 친박계 인사가 공천된 지역은 겨우 2∼3군데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낙천됐죠. 박근혜 전 대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라고.”
친박계 대학살로 표현되는 18대 총선은 친박계에겐 그야말로 시련과 고난의 시절이었다. 한나라당은 18대 총선을 앞두고 총11명의 공천심사위원 중 친박계는 강창희 당시 인재영입위원장밖에 없었을 정도로 친이계가 공심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이규택·김무성·한선교·유기준·엄호성·김기춘·이해봉·김용갑·송영선 등 친박계 현역의원들은 대거 낙천됐고 이충범 변호사 등 당시 원외인사들도 일시에 잘려 나갔다. 한나라당 공천 발표 직후인 2008년 3월 23일 박근혜 전 대표는 국회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친박계 학살 공천과 관련, “한마디로 정당정치를 뒤로 후퇴시킨, 무원칙한 공천의 결정체”라며 “당을 더 개혁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개혁돼 있는 것조차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시켰다.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라고 강재섭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당시 대거 낙천한 친박계 인사들은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를 구성했지만, 이 변호사는 18대 불출마와 함께 한나라당 잔류를 선택했다.
-지금도 친박계라고 생각합니까.
“네, 당연히 친박계죠.”
-YS에 의해서 정치에 입문했는데, 친박은 좀 안 맞는 거 아닙니까.
“2007년 대선 당시 박근혜·이명박 후보가 있었는데,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뭐랄까, 공정하게 뽑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 전 대표를 두고 ‘유신의 딸’이라는 비판을 하지만, 그건 정말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봐요.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후보에서 박 전 대표가 패배한 뒤 경선 승복 연설을 통해 ‘저 박근혜, 경선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오늘부터 저는 당원의 본분으로 돌아가서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백의종군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정말 좋은 분하고 정치를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충범은 여전히 친박입니다(웃음).”
-상도동계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물론 큰 테두리 안에선 그렇게 생각을 하죠. 보다 정확히 말하면 상도동계라기보다 YS계라고 생각합니다. 상도동계가 되려면 문민정부 시절 정치에 참여를 하면서 동지로서 역할을 했어야 했는데, 정치참여를 못했잖아요. 하지만 넓게 보면 YS의 사람이죠. 문민정부 시절 국정에 참여했으니까요.”
-정치인생에 있어 잊지 못할 정치인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YS죠. YS에 의해 문민정부 개혁에 참여할 수 있었고 최연소 사정비서관을 통해 지방 토착비리 세력을 감찰해 공직사회와 사회 기강 확립에 기여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 YS는 큰 어른 아닙니까. 대정치인의 모습을 통해 정치를, 인간미를, 그리고 정책적 마인드를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 YS를 만난 것 자체가 큰 인연이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친박계 대학살 재연되면 박근혜 탈당해야”
-계파는 한국정치에 있어 실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지만, 극복대상이라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정치는 논리가 아닌 힘과 동물의 세계입니다. 계파정치에 대해 어느 정도는 용인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친박계 힘이 강해지길 원하는 거고.”
-대의제는 자유·무기속 위임이고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기관입니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상대적으로 정당기속이 강합니다. 유권자들의 표결권을 침해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서 계파정치를 인정한다는 얘기지, 국회의원이 되면 국민의 뜻에 따라서 소신 있는 행보를 걸어야죠. 언뜻 논리모순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국회의원은 당연히 계파의 이익보단 국민에 대한 의무이행이 우선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금 현재 50여명의 찬박계 의원이 있습니다. 2012년 또다시 친박계 학살 공천이 자행될 가능성이 크지 않나요.
“글쎄요. 만일 친박계 살생부 공천이 재연되면 박근혜 전 대표가 독자노선을 걸을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박 전 대표가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2008년에도 한나라당을 탈당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있었을 겁니다.”
-박근혜 전 대표는 2002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실패했습니다. 탈당하면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땐 무슨 해프닝처럼 일이 끝났습니다. 박 전 대표가 당시엔 세력이나 경험도 부족했고...”
-박근혜 전 대표가 탈당하면 50여명의 친박계 의원들이 동조할거라고 생각합니까.
“그렇다고 봅니다. 이충범 역시 합류할 의사가 있습니다. 친이계의 학살공천에고 불구하고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에 잔류하는 순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무너질 거라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친이계 측이 친박계를 옥죄지 않겠습니까.
“18대 총선 공천처럼 친박계 대학살이 일어날 가능성보다 다른 참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참사를 막기 위해 청와대와 친이계는 개헌을 무조건 하려고 할 겁니다. 아니면 야당에게 정권을 뺏길 테니까요.”
“개헌, 연방제 통한 분권화 아니면 의미 없다”
-이명박 정권 임기가 2년여 남았는데, 개헌이 가능할까요. 개인적으로 어떤 개헌안을 찬성하십니까.
“정치권과 언론 안팎에서 대통령제·내각제·이원집정부제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연방제를 통한 분권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개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현재의 중앙집권제 국가구조를 어떻게 지방으로 이양하느냐가 관건인 셈이죠. 현재의 중앙집권제, 즉 서울중심의 국가구조 폐해를 시정하지 않으면 국가 전체의 에너지와 힘의 결집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갈등만 한층 높아질 겁니다. 외교·국방 등 국가적 사무를 제외한 나머지 교육·문화·경찰·지역경제 등의 사무를 과감하게 지방으로 이양해 자치입법권을 강화하고 지방재정을 자율화해야 합니다.”
-연방제를 통한 분권화의 방법적 대안은 있습니까.
“물론 있죠. 바로 통합광역시가 그 대안입니다. 단지 행정의 편의를 위한 통합시는 민주주의나 지방자치에 역행할 뿐입니다. 광역시를 만들어야 연방제의 기초는 물론, 통일 이후 북한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고려시대 이후 중앙집권 구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현실은 어떤가요. 지방은 죽고 서울만 살지 않습니까. 통합광역시로의 새로운 행정구역 개편만이 지역주민의 삶의 질과 지방 경쟁력을 제고시킬 수 있습니다.”
-성남·용인·광주·하남시를 하나로 묶는 통합광역시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추진하는 이유는 간단하죠. 미국의 휴스턴, 13개 위성도시를 포함한 캐나다 벤쿠버, 일보 오사카 등에서 보듯이 인구 200만 명의 인구가 도시권을 형성해야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당광역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경쟁력이 있는 성남시의 중심시가지를 중심으로 용인과 광주, 하남시를 아우르는 통합적 공간구성의 재편성이 필요합니다. 이들 4개시가 통합되면 인구가 217만 명으로 늘어나 서울, 부산, 대구, 인천에 이어 5대 도시로 도약하게 됩니다. 또 지역내총생산(GRDP)의 경우도 2006년 기준으로 24조8796억 원으로 역시 전국 5위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또 다른 장점은 무엇입니까.
“생각해보세요. 국내 최대 주거여건 및 미래형 첨단도시의 여건을 갖춘 성남시의 브랜드 가치와 광주시의 개발 잠재력, 그리고 하남시의 청정수변 공간, 용인시의 연구시설 기능 및 관광·휴양 기능이 더해지면 미래형 도시로의 발전은 필연적입니다. 또 도시기능과 시설을 강화해 지식산업의 집적을 유도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되면 자족도시권 형성이 가능하게 됩니다. 결국 서울 집중형 단핵공간구조를 개편해 수도권 내 균형발전과 서울 의존도를 완화할 수 있습니다.”
-주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물론 추진과정에서 성남·용인·광주·하남시민들의 반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기존의 성남·광주·하남 통 합보다 더 갈등이 심해질 수 있겠죠. 주민들과의 충분한 토론과 공청회 등을 통해 자족 가능한 국제 수준의 글로벌 도시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실제 지난 4월 26일 성남·광주·하남의 통합을 골자로 하는 <지방자치단체 통합 및 지원 특례법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 안건에서 제외돼 3개시의 통합이 최종 무산됐다. 이로써 이 대통령의 지난 2009년 8·15경 경축사 직후, 행정안전부에 의해 추진돼 온 행정구역 자율 통합은 경남 마산·창원·진해시, 단 1개 지역에 그치게 됐다. 하남시는 전국 자치단체 가운데 첫 번째로 행정구역 자율 통합을 선언했지만, 밀실행정과 졸속추진 논란에 휩싸이면서 주민과 시민사회단체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與野 무상급식 대립은 포퓰리즘”
-최근 정치권의 최대 화두는 복지입니다. 무상급식 등으로 보편적 복지와 잔여적 복지 등에 대한 논쟁이 한창인데, 어떻게 보십니까.
“무상급식은 나쁠 것 없다고 봐요. 하지만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무상급식에 대한 논쟁은 양쪽 다 포퓰리즘에 빠졌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서로 색안경을 끼면서 적용 대상을 획일적으로 규율하고 논의하니까 합의의 진전 없이 평행선만 달리게 되는 거죠.”
-복지와 세금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한나라당 내 감세, 증세 논쟁과 재정건전성 강화 등에 대한 견해를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그것 역시 포퓰리즘입니다. 감세논쟁을 보면 감세를 하면 부자에게 유리하고 증세를 하면 서민에게 유리하다, 딱 여기까지입니다. 논의가 더 이상 나가지 못합니다. 너무나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정책은 우선순위가 중요한데, 정치인들이 서민생활 대책을 최우선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정책을 양극단으로 가르고 논쟁할 뿐입니다.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소사이어티의 경우 영국의 대처나 미국의 레이건 정부 등 신자유주의 노선을 롤 모델로 삼아 결국 YS의 신경제라는 세계화와 기반을 둔 경제정책을 탄생시켰습니다. 한미 FTA 등을 비롯해 세계화는 지금도 정치권의 화두인데, 어떻게 보십니까.
“신자유주의에 대해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YS가 당시 세계화를 외친 것은 ‘세계흐름에 동참하자’는 것이었죠. 그 당시엔 세계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더 컸습니다. 만약 YS가 ‘우리의 고유한 것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면, 국민들이 찬성했을까요.”
-YS의 신경제라고 하는 건 세계화, 시장화, 노동의 유연성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YS의 신경제론이 유효하다고 보십니까.
“유효하다고 봅니다.”
-청와대 사정비서관 이후 한나라당 등에서 정치활동을 했습니다. 정치인 이충범은 어디까지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국가와 사회를 변화시켜야겠다는 희망사항은 있었지만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했으니까 정치인으로선 성공하지 못했죠(웃음). 2008년 한나라당 총선 공천을 받지 못했을 때 너무나도 많이 아프더라고요. 앞으로 희망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한10여 년 동안 공부를 많이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었고 이젠 그간 공부하면서 배웠던 것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쓸 차례인 것 같습니다.”
-이젠 마지막 질문입니다. 인생전반을 보면 ‘정해복지’가 대부분 차지하고 있더라고요. 정해복지에 대한, 그리고 복지에 대한 애착이 클 것 같습니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20여 년간 활동했습니다. 탁아소·청소년사업·저소득층·농촌무료진료·해외봉사 등을 통해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며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베트남 호치민시 근교 투덕 지역에 위치한 베-한 정해기술학교를 설립한 것입니다. 한인 2∼3세 및 전쟁고아·장애인·불우 청소년 등에게 전문 직종에 맞는 기술교육을 실시해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게 가장 보람된 일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