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마쳤을 때 이미 ‘번아웃’… “영혼까지 모아 <기생충> 제작”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솔직하게 그리는 것이 당연한 생각
독립영화와 메인 스트림과의 다이내믹한 충돌이 있을 것으로 낙관해
“<기생충>이 영화 자체로서 오래 기억되길”… 본연의 업무로 복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기범 기자]
“마틴 스콜세지 감독님께 오늘 아침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수고했고 조금만 쉬고 빨리 일하라 하시더군요”
낮은 톤이지만 늘 차분함과 위트를 잊지 않는 목소리는 세계적 거장이 된 봉준호 감독 특유의 자신감으로 다가왔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란 자신의 신조를 드러내는 듯했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웨스틴 조선호텔에서는 영화 <기생충>으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개 부문을 석권한 봉준호 감독과 출연진 및 제작진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지난 9일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봉 감독이 귀국 후 가진 첫 번째 공식 행사였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배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 박명훈 등과 제작자인 곽신애 바른손이앤에이 대표, 한진원 작가, 이하준 미술감독, 양진모 편집감독이 참석했다.
이번 행사는 수많은 미디어가 운집해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국제장편영화상·각본상을 수상한 <기생충> 주역들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 영화 <기생충>은 동시대 한국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은 세계인의 관심과 성원을 이끌어 낸 ‘오스카 캠페인’에 대한 봉 감독의 소회로 시작됐다.
봉 감독은 정작 영화 촬영 기간보다도 길었던 오스카 캠페인을 통해 인터뷰 600회 이상, 관객과의 대화 100회 이상을 치렀다고 밝혔다.
봉 감독은 “2017년 영화<옥자>를 마쳤을 때 이미 ‘번아웃(burnout syndrome)’ 판정을 받았다”며 “<기생충>이 너무 찍고 싶어 영혼까지 긁어모아 작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촬영 기간보다 더 긴 오스카 캠페인 기간을 다 소화했다”며 “곽 대표님과 <기생충>을 처음 얘기한 게 2015년 초다. 참 긴 세월인데 행복하게 마무리된 것 같아 기쁘다”고 전했다.
아울러 “좀 쉬어볼까 했는데 스콜세지 감독님이 쉬지 말라고 하셨다”는 유머 섞인 뒷얘기와 함께 자신이 존경하는 또 다른 거장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했다.
이날 기자들의 질문 요지는 단연 ‘왜 전 세계인이 <기생충>에 열광했을까’였다.
이에 대해 봉 감독은 “빈부격차를 다룬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라며 “<기생충>은 동시대 한국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이고 우리 배우들이 현실에 기반한 분위기를 잘 연기해줘서 폭발력을 가진 게 아닐까”라고 했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 세계인들이 호응하는지는 시간을 두고 분석해 봐야 한다”며 “그러나 그것은 평론가를 비롯한 업계 전문가들의 몫이고 나는 다음 작품을 준비해야 한다”며 자신의 차기작에 대해 암시했다.
미국 <CNN> 기자가 “한국사회 불균형을 다룬 영화에 한국관객이 지지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봉 감독은 “이 영화엔 코미디적인 부분도 있지만 빈부격차가 드러나는 씁쓸하고 쓰라린 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부터 엔딩까지 그런 부분을 정면 돌파해야 하는, 그러려고 만든 영화”라며 “관객이 불편하고 싫어하실 수 있지만 달콤한 장식으로 영화를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솔직하게 그리려고 한 게 대중적 측면에서 위험할 수 있어도 그게 우리가 당연히 가져야 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 한국영화산업, 리스크와 모험 두려워 말고 더 도전적인 영화 껴안아야
봉 감독은 이번 아카데미 수상을 계기로 현재 한국영화산업 불균형을 해소하자는 의견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일명 ‘포스트 봉준호법’에 대한 의견을 묻자 봉 감독은 “요즘 젊은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같은 시나리오, <기생충>과 같은 똑같은 시나리오를 가져왔을 때 과연 영화가 투자를 받을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이어 “냉정하게 질문하면 1999년에 내가 데뷔한 이후 영화계에 눈부신 발전이 있었지만 동시에 젊은 감독들이 모험적인 시도를 하기엔 더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면서 “1980~90년대 붐을 이룬 홍콩영화산업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한국영화산업이 리스크와 모험을 두려워 말고 더 도전적인 영화를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최근 나오는 훌륭한 독립영화들을 보면 많은 재능들이 꽃피고 있기 때문에 메인 스트림과 다이내믹한 충돌이 있을 거라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며 낙관론을 피력했다.
요사이 정치권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봉준호 생가 건립론’에 대해선 봉 감독은 “저도 기사를 봤는데, 이런 이야기는 제가 죽은 이후에 해 주셨으면 좋겠다”며 “이 모든 게 다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봉 감독은 “여기 있는 배우들의 멋지고 아름다운 연기, 촬영팀 등 모든 스태프가 장인정신으로 만들어낸 장면 하나하나, 거기에 들어간 나의 고민들”이란 말로 방점을 찍었다.
여기에 “기생충이 영화사적 사건처럼 기억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지만 사실 영화 자체로서 오래 기억되길 바란다”며 자신의 소감을 마무리했다.
자신은 다시 충실한 창작자로서 본연의 업무로 돌아갈 것을 표현한 대목이었다.
한편, 오는 26일엔 <기생충> 흑백판이 개봉해 또 다른 모습으로 그 기세를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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