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종필 노무현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한나라당: 133석(지역구 112석, 비례대표 21석)
△새천년민주당: 115석(지역구 96석, 비례대표 19석)
△자유민주연합: 17석(지역구 12석, 비례대표 5석)
△민주국민당: 2석(지역구 1석, 비례대표 1석)
△희망의한국신당: 1석(지역구 1석)
△무소속: 5석
: 총 273석(지역구 227석 비례 46석), 투표율 57.2%
새 천년 첫 선거가 열렸다. 2000년 4월 13일에 열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는 21세기를 여는 선거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전문가들은 16대 총선을 ‘한국 정치사에 매우 중요한 전기(轉機)를 마련한 선거’라 평가했다.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발행한 논문 <낙선운동이 16대 총선에 미친 영향(조진만, 2001)>은, “민주화 이후 활성화되고 성장한 시민사회가 정치권의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면서 정면으로 도전장을 냈고, 그것은 412개 시민단체들의 연합체인 총선시민연대 낙천‧낙선운동의 형태로 결집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는 한편 16대 총선의 투표율은 57.2%로, 당시 역대 최저 총선 투표율을 기록했다(현재는 2008년 제18대 총선 투표율이 46.1%로 가장 낮다). 뿐만 아니라 정세운 정치평론가는 지난 8일 “민주당의 16대 총선 패배를 시작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지지율 몰락이 시작됐다”며 “DJP 연대 역시 종지부를 찍었던 선거”라 평가했다.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스물다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2000년 제16대 총선이다.
‘대통령 회고사’는 대통령의 입을 빌려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이번엔 당시 한나라당 총재였던 이회창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도 참고했다.
2000.01.10.~24. 낙천‧낙선운동
제16대 총선을 불과 94일 앞둔 2000년 1월 10일이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유권자 심판을 위한 출마예상자 1차 정보공개 기자회견’을 개최해, 총선 부적격자 167명을 발표했다. 당시 보고서에 명시된 대상자는 아래와 같다.
△국민회의: 51명(현역 42명, 전직의원 및 공직자 9명)
△자민련: 33명(현역 28명, 전직의원 및 공직자 5명)
△한나라당: 67명(현역 59명, 전직의원 및 공직자 8명)
△기타 인사: 16명
경실련은 “2000년 총선이 ‘실질적인 정치개혁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유권자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후보자에 대한 충분한 알권리가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선정 배경을 설명했다.
후보자 정보공개 조사팀은 △80~90년대 정경유착관련 부패사건 연루돼 유죄판결 받은 자 △5공 비리나 12‧12, 5‧18 군사내란 관련자 △제15대 국회활동 중 개혁입법에 대해 반대 의사 표명하거나 입법과정에서 변질시킨 자 △각종 추태로 물의를 일으킨 자 △국회 내에서 욕설 등 저질 행위자 △지역감정 조장 발언자 △정치 불신을 심화시킨 자 △당적이탈 등 부실한 의정활동 등을 선정 대상으로 고려했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경실련의 발표에 대해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하는 불법행위’로 지적했다. 이에 경실련은 선관위의 지적을 “국민의 알권리와 국민주권주의를 침해할 뿐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친해하는 위헌적 행위”라 비판했다.
이후 12일 412개의 시민 사회 단체들은 총선 시민연대를 발족한 뒤, 24일 66명의 공천 부적격자를, 2월 2일에는 2차 공천 부적격자 42명을 발표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역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이 운동에 함께했다.
경실련은 18일 2차 정보공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2차 기자회견에는 제15대 국회의원들의 국회 본회의 출결 조사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의원 1인당 평균 결석률 18.12%과 평균 결석횟수 10.3회였다.
그중 결석 1위는 한나라당 최형우 의원(부산 연제)으로, 57회 결석해 총결석률 100%였다. 94.74% 결석률(54회)의 자민련 김복동 의원(대구 동갑)과, 82.46%(47회) 무소속 정몽준 의원(울산 동)이 뒤를 이었다.
한편 당시 국민회의 소속 노무현 전 대통령(서울 종로)은 31.58%(18회) 결석률로 32위에, 한나라당 소속 박근혜 전 대통령(대구 달성)은 29.82%(17회)로 39위에 올랐다.
한나라당 총재였던 이회창은 “주로 야당 후보를 상대로 한 낙천‧낙선운동이 확산될 게 분명했다”며 우려를 표했다.
새해에 들면서 여권은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합법화하려고 이를 금지한 선거법 제87조를 폐지하고 사전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 제57조도 개정해 법정 선거운동 기간 전이라도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시민단체의 정치 활동 보장이라는 미명을 달았지만 속셈은 뻔했다. 당시 대부분의 시민단체가 친진보, 친여적인 성향을 띠고 있어 주로 야당후보를 상대로 한 낙천‧낙선운동이 확산될 게 분명했다.
- 이회창 회고록 2편, 662~663쪽(e북 기준).
한편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회고록에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대신 총선 직후의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일화를 길게 담았다. 한편 이회창은 김대중의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발언을 인용하며 “기가 찼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걸음 더 앞서 나갔다. (중략) 국민들의 강력한 요구를 법으로 금지하거나 처벌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법으로 규제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는 근거로 “민주주의가 대의 민주주의에서 참여 민주주의로, 그리고 전자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큰 변혁기를 맞고 있어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을 법률로 규제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었다.
나는 대통령의 이 말을 듣고 기가 찼다. (중략) 대통령이 선거에 관해 이런 변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법체계를 바꾸도록 주도해야지, 자신이 정점에 있는 법체제를 무시하라고 위법행위를 조장하는 것은 자기모순이었다.
- 이회창 회고록 2편, 663~664쪽.
2000.01.20. 새천년민주당 창당 대회
1월 20일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새천년민주당 창당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유재건 전당 대회 의장이 김대중을 총재로 선출했다. 김대중은 회고록을 통해 신당 창당 목표를 ‘다수 여당’이라 말했다. 그는 “개혁 정책들이 수의 힘에 표류했다”며 여소야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아울러 그는 ‘민주당’에 대한 애착도 함께 드러냈다.
나는 민주당이란 이름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은 전통 민주 세력의 뿌리였기에 나는 그 이름을 다시 찾고 싶었다. 비록 불가피하게 과거 민주당을 떠나 ‘국민회의’라는 정당을 창당하여 대선 승리에 이르게 되었지만 나의 정치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민주당이었다. 그런 의견을 실무진에 전달했다. 내 뜻을 헤아려 주었는지 당명이 ‘새천년민주당’으로 결정되었다. 그런 사실을 보고받고 기뻤다.
- 김대중 자서전 2권, 232쪽.
한편 이회창은 야당의 목표로 ‘총선의 공명성 확보’를 내세웠다. 이와 더불어 김대중이 한 정파의 총재직을 맡는 것에 대한 불만도 표했다.
야당에서는 어떻게든 총선의 공명성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했고 그래야만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신년 언론 인터뷰에서 상생의 정치를 강조한 다음 “대통령이 나서면 공명선거가 깨질 수 있으므로 국가수반인 대통령은 어느 한 정파의 총재직이나 당적에서 떠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선거 중립내각을 구성할 것도 제안했다. 물론 청와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임을 알지만 총선의 공명성 확보가 시급한 야당으로서는 이렇게 해서라도 선거관리의 중요성과 중립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 이회창 회고록 2편, 658~659쪽.
그밖에도 여야는 선거를 앞두고 여러 쟁점 앞에서 입장을 달리했다. 여권에서는 지역주의 완화 및 동진정책을 이유로, △중선거구제 △1인 2표제 △이중등록제 △석패율제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이런 제도들이 나름대로 개혁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이런 전면적인 제도 개혁을 고집하는 것은 여권의 의석을 늘리려는 정략적 의도가 엿보여 한나라당은 이 시점에서의 개혁에 반대했다”고 밝혔다.
이에 김대중은 “(야당은) 사사건건 국정의 발목을 잡았다”며 “나는 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었고 때로는 분노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2000.03.10.~04.03. 총선 시민연대 낙선 대상자 명단 공개
3월 10일, 경실련의 후보자 정보공개운동 3차 기자회견에서는 김대중 정부 집권 2년 대선공약 이행률을 발표했다. 총괄 평가 결과 적극 추진 중인 공약은 29.67%였다. 반면 추진 실적이 극히 미미하거나 추진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공약은 47.43%로 높았다.
경실련은 “집권 2년간 공약 이행률이 기대보다 낮다”며 “대선 당시 정부와 국민과의 약속이 30% 밖에 지켜지지 않은 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같은 달 23일, 4차 기자회견에서는 1999년 제15대 국회의원 의정활동 종합평가를 발표했다. 평가는 △정량평가 △내용평가 △원외활동 등을 총합해 이뤄졌다. 평가 결과 민주당 이미경 의원이 634.77점으로 298명 중 1등을 차지했다. 한나라당 김영선(627.11), 김홍신(617.28) 의원이 뒤를 이었다.
한편 당시 민주당 의원이었던 이해찬 전 당대표는 21위(416.27)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8위(433.77)에 올랐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은 87위(278.14), 노무현 전 대통령은 211위(164.84)였다.
총선을 열흘 앞둔 4월 3일, 총선 시민연대는 국회의원 후보자 86명의 낙선운동 명단과 22명의 집중 낙선운동 명단을 발표했다. 낙선 대상자 86명 가운데 한나라당이 28명, 민주당은 16명이었다. 한편 집중 낙선 대상자로 선정된 22명은 △한나라당 9명 △민주당 7명 △자민련 4명 △민국당 2명이었다.
김 대통령의 말에 고무된 시민단체들은 주로 야당 후보를 상대로 ‘벌떼’처럼 낙천‧낙선운동을 펼쳤다. (중략) 후일담이지만 낙천‧낙선운동을 하다가 현행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던 사람들에 대해 그 후 대법원이 유죄확정 판결을 선고해 김 대통령의 견해에 따르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 이회창 회고록 2편, 666쪽.
2000.04.13. 제16대 총선
새 천년 첫 선거를 앞두고 첫 출구조사도 이뤄졌다. 당시 출구조사에서는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승리를 예상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MBC는 △민주당 127석 △한나라당 120석, KBS는 △민주당 119~138석 △한나라당 104~126석, SBS는 △민주당 126~133석 △한나라당 113~119석을 예상했다. 세 방송사 모두 자민련은 17석으로 예상했고, 적중했다. 그러나 최종 결과 한나라당 133석, 민주당 115석이었다.
김대중은 “실패했다”는 표현을 거듭 반복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4월 13일 총선이 끝났다. 출구 조사에서는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로 패했다. (중략) 나는 이번 총선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지난 2년 동안 외환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고 이것을 국민들이 평가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민심을 읽는 데 또 실패했다. 험난한 앞길을 생각하니 참담했다.
- 김대중 자서전 2권, 254쪽.
이회창은 “이번 총선은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사력을 다해 화력을 쏟아부은 선거”라며 “여권이 관권개입 시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나라당에 대한 집요하고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라 회고했다.
무엇보다도 개혁 공천의 결과가 총선에서 국민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은 나에게는 기쁨 이상의 감격이었다. 이제 파벌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당체제 정착을 자신 있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한나라당은 이번 총선의 의미를 김대중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 그리고 그들의 독주, 독선에 대한 견제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여권은 정권의 안정론을 내세웠는데 결국 국민은 우리 주장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중략)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야당이 집권당을 제치고 과반수에 4석 부족한 다수의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는 것은 아마도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 이회창 회고록 2편, 698~704쪽.
2020.04.13.~2001.09.18. 자민련과 정계개편
자민련 명예총재 김종필은 17석의 참패 이후,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김종필은 7월 22일 이회창을 만나 원내 교섭단체 요건을 20명에서 17명으로 고쳐줄 것을 요구했다. 김종필의 설명에 따르면, 두 사람의 만남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에서 비롯됐다.
자민련의 위상을 교섭단체로 바꾸려면 국회법개정이 필요했지만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은 우리를 외면하고 무시했다. 그러던 이 총재로부터 나를 만나고 싶다는 뜻밖의 연락이 왔다. 그 만남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 때문으로 기억한다. YS는 “한나라당은 자민련 교섭단체로 만들어주고 JP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었다.
- 김종필 증언록 2권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255~256쪽.
김종필 증언록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이회창은 “당의 의사를 모아 검토할 것”이라 말했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이회창은 “‘오늘은 어차피 비 때문에 골프를 못 쳤으니 다음에 기회를 갖기로 하고 그 얘기는 다음에 합시다’라고 말했다”며 “‘생각해보자’든가 ‘검토해 보겠다’는 말은 자칫 잘못 와전될 수도 있어 나는 의도적으로 말을 조심했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이회창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 김종필과 손을 잡지 않은 이유를 “교섭단체가 된 자민련은 결국 한나라당에 실이 될지언정 득은 되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사실 그동안 내가 김종필 총재를 우군화하지 못하고 김대중 대통령과의 연대를 이루게 만들어 1997년 대선에서 패배한 것에 대해 당 내외 특히 언론에서 비판이 많았다. 비판자들은 그 원인을 나의 정치적 미숙이나 아마추어리즘 심지어 협량 즉, 속 좁은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JP와 손잡는 것이 이득이라고 권하기도 했다.
(중략)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이것은 나의 아마추어리즘이나 협량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내각제 개헌을 표방해 충청권의 자민련 기반으로 권력 핵심에 진입하는 것이 1997년 DJP연대 당시의 김종필 총재의 집념이었다면, 지금은 17석의 자민련을 어떻게든 원내교섭단체로 만들어 3당체제의 1각을 이루겠다는 것이 김종필 총재의 집념이라고 보았다.
만일 그의 소망대로 자민련이 교섭단체가 된다면 민주당, 한나라당과 더불어 원내 3당체제를 형성해 민주당과의 협상에서 힘을 얻게 되고, 한나라당과의 관계에서는 당내의 불만세력 또는 비주류세력을 유인하는 매우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정치 9단인 김종필 총재에게는 정치수단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꽃놀이패가 마련되는 것이다. 나는 교섭단체가 된 자민련은 결국 한나라당에 실이 될지언정 득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 이회창 회고록 2편, 746~749쪽.
결국 국회법 개정안은 민주당 주도로 상임위에서 통과됐으나, 본회의에는 한나라당의 반대로 상정되지 않았다. 이에 김종필은 다시금 DJP 공조를 회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1997년 DJP연대 이후 16대 총선에서 내각제 약속을 파기한 민주당에 연대 파기를 선언한 바 있었다.
2001년 1월 두 사람은 공조 재가동에 합의했으나, 그해 8월 민족통일대축전 행사를 주관한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입장차로 와해됐다.
당시 행사에서 남측 대표단 일부가 김일성 생가에서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자’는 행태에 한나라당은 국무위원 해임안을 제출했다. 김종필 역시 김대중에게 “임 장관을 왜 데리고 있느냐”라며 자진사퇴를 유도했으나, 김대중은 “그 사람 잘하고 있다. 사퇴시킬 이유 없다”고 거부해 입장차가 커졌다.
결국 자진사퇴가 아닌 국회 해임건의안 통과가 됐고, 자민련과 한나라당의 표결 공조에 따라 DJP 공조가 와해됐다. 이후 김종필은 9월 18일 이회창과 양당 간 정책 공조를 약속했다.
16대 총선과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
2000년 새 천년의 첫 선거는 성장한 시민단체들의 활발한 요구와 함께 치러졌다. 이들의 요구는 곧 ‘정치권의 변화와 개혁’이었다. 실제로 총선 시민연대가 발표한 86명의 낙선 대상자 가운데 59명(68.6%), 22명의 집중 낙선 대상자 중엔 15명(68.2%)이 제16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이렇듯 활발한 시민운동과 유권자들의 높은 관심에도 불구, 제16대 총선 투표율은 당시 역대 최저 총선 투표율(57.2%)을 기록했다. 이에 선거법 위반을 불사하면서까지 낙선운동을 한 총선연대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주장도 일부 제기됐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총선연대의 부정적 캠페인이 유권자의 정치 불신과 냉소주의를 부추겨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총선연대 책임론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한국정치학회보에 실린 <총선연대의 낙선운동이 16대 총선 투표율을 낮추었나?(조기숙‧김선웅, 2002)> 논문은, “오히려 낙선대상 후보가 출마한 지역은 낙선대상 후보가 없는 지역에 비해 전국 평균 약 2% 가량 투표율이 더 높았다”며 “낙선운동이 유권자의 정치참여의식을 향상시킨 것”이라 해석했다.
한편 낙선운동을 통해 정치권 물갈이와 함께 유권자들의 참정권 의식도 확대됐으나, 한계도 존재한다. 안문석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2000년 4월 국회보를 통해 “유감스럽게도 이번 선거에서도 ‘지역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무소속 호남 당선자들이 모두 여당 입당을 공언하고 있고, 영남 쪽에서도 모든 의석이 특정 정당의 몫으로 돌아갔다”면서도, “몇몇 지역에서 보여 준 몇몇 후보의 선전은 지역주의 타파의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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