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서 野 ‘반독재’ ‘군정종식’ 강조
민주화 이후 ‘개인 이미지’ 부각 경쟁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김자영 기자]
때론 백 마디 말보다 한마디 문장의 파급력이 클 수 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economy, stupid)’. 이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치권에 회자되는 캐치프레이즈다. 빌 클린턴은 이 문구로 조지 H.W. 부시 행정부 말 불경기를 파고들었고, 결국 공화당 재집권을 막았다.
국내에선 1956년 3대 대선에서 민주당이 들고나온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대표적이다. 이승만과 자유당으로부터 돌아선 민심은 이 구호에 열광했다. 당시 폭발적 반응에 놀란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등 슬로건을 뒤늦게 내걸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잘 만든 슬로건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비전, 가치관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정신까지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일례로 ‘저녁이 있는 삶’은 한 문장만으로 유권자들이 처한 현실적 문제, 그들의 바람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전예현 우석대 대학원 객원교수는 5일 <시사오늘>과의 대화에서 “잘 만들어진 슬로건은 그 효과가 크다. ‘저녁이 있는 삶’과 같은 슬로건의 경우 지금까지 회자된다. 사람들의 귀에 들어오는 동시에 당의 복지 정책 지향점을 명확히 드러낸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 슬로건으로 자주 보이는 것은 거리 현수막인데, 긍정적 문구보다 상대에 대한 비방성 문구가 자주 나타난다”며 우려를 표했다.
정당은 짧은 시간에 간결한 문장으로 유권자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키고자 한다. 4·10 총선이 석 달도 남지 않은 가운데, 각 당이 어떤 구호를 들고나올지 궁금해진다. <시사오늘>은 역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대 양당을 중심으로 어떤 슬로건이 등장했는지 살펴봤다.
1960~1980년대, 이승만·박정희 대항해 독재와의 싸움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첫 선거인 5대 민의원 선거(1960년 7월 29일)에선 자유당이 몰락하고 민주당 신·구파가 각축전을 벌였다. 민주당은 ‘독재와 싸운 정당 마음놓고 찍어주자’ ‘정치적 안정 위에 경제 개혁 이룩하자’ 등 구호를 사용해 ‘반독재’를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당시 상황을 1960년 7월 1일 자 기사에서 “민주당은 주로 과거 반독재 투쟁의 공로를 자과하고 혁신정당들이 내세운 정책의 실천 능력은 오히려 민주당 편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하고, 5대 대선(1963년 10월) 한 달 후인 1963년 11월 26일에 6대 총선이 치러졌다. 야당인 민정·민주·국민·자민당은 공동 선거구호로 ‘못 믿겠다 대통령, 야당을 국회로’ ‘공화당이 표 달라고? 어림없다 내 한 표’를 합의하기도 했다. 당시 민주공화당은 여당 프리미엄을 강조하며 지역 발전을 약속했다고 한다. 당시 김대중이 민주당 후보로 목포에 출마했는데, 경쟁자인 공화당 차문석 후보는 ‘야당으로 병든 목포, 여당으로 재건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했다.
7대 총선은 6대 대선 이후 한달 만인 1967년 6월 8일에 열렸다. 여당인 공화당은 ‘박 대통령 일하도록 밀어주자’는 구호를 사용해 유권자들에 원내 안정세력 확보를 호소했다. 제1야당 신민당은 ‘단일야당 밀어주어 일당독재 막아내자’를 내걸었다.
1973년 9대 총선은 유신 헌법이 선포되고 치러졌다. 박정희가 99.92% 득표율로 8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였다. 여권은 유신정우회를 통해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우선 확보했다. 신민당은 ‘신민당에 내 표 던져 민주주의 살려내자’ ‘변함없는 전통야당 신민당 밀어주자’ ‘민권지킨 제일야당 신민당 뽑아주자’ 등 구호를 내걸었다.
1978년 12월 12일 10대 총선. 신민당이 ‘신민 위에 서민 있고 공화 위에 재벌있다’는 구호를 사용해 선관위로부터 제재를 받는 해프닝도 있었다. 공화당은 ‘공화당 다시 밀어 쉬지 말고 전진하자’고 해 안정론에 의지했다. 이때부터는 후보자 개인마다 다른 선거 구호를 선보이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직선제 개헌 이후, 후보 개별 슬로건 도드라져
‘민주투사’ ‘군정종식’ 저물고 ‘새시대 새인물’ 강조
1987년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으로 민주화 시대가 새로 열렸다. 김영삼·김대중 양김은 분열했고, 노태우 정부가 들어섰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지역주의로 넘어갔다. <조선일보>는 1988년 4월 9일 자 기사에서 “(1985년) 2·12 총선 때까지만 해도 주종을 이루던 ‘민주화’ ‘민주투사’ ‘군정종식’ 등의 용어는 거의 사라지고 당명 표기도 그 크기 등이 현저하게 작아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거리에 나붙은 이런 홍보물 등에 나타난 슬로건이나 캐치프레이즈, 선전 문구 등을 훑어보면 과거와 크게 다른 새로운 조류가 형성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중략)
여야를 막론하고 새시대, 새정치, 새인물, 새바람 등 이른바 ‘새’자 돌림형 캐치프레이즈가 대유행이다. 순천의 윤상철 민정후보는 ‘새 술은 새 부대에, 새 순천은 새 인물로’를 내세우고 있고, 서울 중구의 정대철 후보(평민)는 ‘가자 새 시대를, 정대철과 함께’, 조병득 후보(민정·대전 동구을)는 ‘보통사람 시대 새 일꾼 조병득’이다. (중략)
야당 후보들은 대통령 선거를 반성의 기점으로 삼는 경향이 강하다. 대표적인 예는 서울 동작갑의 서청원 후보(민주). 그는 ‘반성 속의 새출발’을 구호로 하고 있다. 서울 서초을의 김덕룡 후보(민주) 역시 ‘새로 시작하겠읍니다’, 김형래 후보(민주·서초갑)는 ‘새출발’이다.
- 1988년 4월 9일 자 <조선일보> ‘13대 총선 선전 구호가 달라졌다 정당 이미지 퇴색…개인 부각 경쟁’
3당 합당 이후 치러진 14대 총선은 거대 여당과 김대중·이기택의 민주당,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 경쟁했다. 여당은 안정, 야당은 여당 견제를 말했다. 그중 1992년 3월 13일 자 <한겨레> 기사가 재밌다. 해당 보도는 YS 측근 최형우에 대해 “과거 자신의 선거 팸플릿에 직설적인 표현을 가장 많이 사용했던 부산 동래을 선거구 최형우(56) 의원의 이미지 변신 노력은 보는 이들을 더욱 놀라게 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최 의원은 4년 전 선거구에 뿌린 팸플릿 표지에 자신을 ‘학살 정권의 도전자’라고 자임했으나 이번에는 ‘부산의 자존심 동래의 긍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13대 때 최 후보는 ‘민주를 능욕한 자 그 누구며 국민을 살해한 자 그 누구냐’는 제목의 팸플릿에서 “이 시대의 흉악정권과 대치하며 민주의 보도를 치켜든 최형우 동지는 드디어 민주도살범 앞에 당당히 선다”는 자신의 부총재 추대위원회 이름의 출사표를 실은 바 있다.
그러나 오늘의 최 후보 팸플릿 표지는 “부산을 7000만의 관문으로 키우겠습니다” “정직한 정치인이 되겠습니다”는 제목으로 각종 개발공약이 화려하게 나열돼 몰라보게 달라질 내일의 ‘분홍빛 부산과 동래’를 만화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 1992년 3월 13일 자 <한겨레> ‘민자당 민주계 후보의 선거구호’
탄핵 여파 속 2004년, 열린우리당 ‘민생 안정, 민주 수호’
민주노동당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17대 총선을 앞두고 최대 화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민생 안정, 민주 수호’를 외쳤다. 민주당의 경우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아 위기에 처했는데, ’민주당을 살립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고 민주당 대표 정치인들의 얼굴(신익희·조병옥·박순천·장면·정일형·김대중)을 포스터에 담았다.
한나라당의 슬로건은 ‘파란나라 희망나라 New 한나라’ ‘함께가요! 희망 대한민국’ 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을 내걸어 주목받았으며, 10석 쾌거를 얻었다.
“당 대표 경선을 통해 탄핵 정국 탈출에 성공한(?) 한나라당의 슬로건은 '파란나라 희망나라 New 한나라'와 '함께 가요! 희망 대한민국'. 두 번째 슬로건은 '희망'역, '인재'역 등을 화두로 한 삼성의 기업광고와 비슷하다. (중략)
푸른색의 이성적인 이미지와 경제정당으로서의 자신감을 슬로건에 담아, '차떼기당'이라는 부패 이미지를 없애겠다는 거다. (중략)
탄핵정국에서 최고의 수혜를 입은 우리당은 ‘민주수호’와 ‘바꿔보자’가 화두다. ‘4·15총선! 열린우리당이 희망입니다'가 주요 캐치프레이즈. 국민의 뜻을 저버린 의회를 심판하려면, 총선에서 제대로 투표하자는 말이다.”
- 2004년 3월 29일 자 <아이뉴스24> ‘캐치프레이즈로 보는 각 당 총선전략’
한나라당 ‘경제부터 일자리부터! 실천의 힘’
통합민주당 ‘서민과 중산층이 잘 사는 나라’
18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 1년 차에 치러졌다. 통상 여당의 허니문 기간이라 불리는 때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에서 ‘실천하는 경제 대통령’을 내건 만큼 ‘경제’와 ‘실천’을 강조했다. 메인 슬로건은 ‘경제부터 일자리부터! 실천의 힘 한나라당’이었다.
통합민주당은 ‘서민과 중산층이 잘 사는 나라’를 총선 목표로 정하고 ‘민생제일주의’ ‘보편적 복지’ ‘양성평등’ ‘지속가능 발전’ ‘특권과 부패 청산’ 등을 전략으로 내걸었다.
새누리당 12년만 당명 변경…“새로운 변화를 국민과 함께”
민주통합당 ‘99% 시민’ 강조…재벌특권vs민생서민 심판구도
새누리당은 총선 약 2개월 전에 당명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이명박 정부가 레임덕을 맞은 상황에서 박근혜 비대위 체제가 들어서며, 당 색에 파란색뿐 아니라 빨간색이 더해지는 등 큰 변화가 있었던 만큼 ’변화’를 강조했다. ‘새로운 변화를 국민과 함께’를 슬로건으로 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했다.
민주통합당은 ‘끝까지, 99% 국민 편에 서겠습니다’라는 문구로 ‘서민의 정당’임을 강조했다. 한명숙 당시 민주통합당 대표는 19대 총선에 대해 “재벌특권경제를 계속할 것인지 민생서민경제로 방향을 바꿀 것인지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며 ‘정권심판’을 주장했다.
20대 총선, 새누리당 ‘뛰어라 국회야’
민주당 ‘문제는 경제다, 정답은 투표다’
20대 총선은 박근혜 정부 4년 차에 치러졌다. 새누리당은 ‘뛰어라 국회야’ ‘잠자는 국회에서 일하는 국회로’를 택했다. ‘일하는 국회’를 강조하고 ‘발목 잡는 야당 심판’을 내건 것이다. 김무성 당시 대표최고위원이 한강대교를 뛰는 영상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더불어민주당은 잃어버린 8년 경제 실패 심판을 통한 서민과 중산층의 경제주권 회복을 총선 기조로 정했다. 김종인 비대위는 ‘문제는 경제다, 정답은 투표다’, 부슬로건으로 ‘4월 13일은 털린 지갑을 되찾는 날’을 내걸었다. 김종인 당시 비대위 대표는 “이명박 정부의 대기업 프렌들리 정책도, 박근혜 정부 경제정책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며 경제 문제를 지적했다.
국민의당은 ‘문제는 정치다, 이제는 3번이다’를 메인 슬로건으로, ‘1번과 2번에겐 기회가 많았다. 여기서 멈추면 미래가 없다’를 서브슬로건으로 ‘거대 양당 심판론’을 강조했다.
코로나 정국 속 민주당 ‘국민을 지킵니다’
미래통합당 ‘힘내라 대한민국, 바꿔야 산다’
21대 총선.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을 지킵니다, 더불어민주당’을 택했다. 20대 총선은 코로나 위기 속에 치러졌다. 민주당은 본래 ‘일하는 민주당’ 슬로건을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후에 ‘코로나 전쟁 반드시 승리합니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당시 해외에서 대한민국의 코로나 대응능력 일명 K-방역에 긍정적 평가를 보냈다.
미래통합당은 ‘힘내라 대한민국, 바꿔야 산다’로 정권심판을 강조했다. 부슬로건은 당명에서 딴 ‘새로운 미래, 새로운 통합’이었다. 정의당은 ‘원칙을 지킵니다, 당신을 지킵니다’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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