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똘레랑스’란 말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2000년대 초중반. 대학생들은 입버릇처럼 똘레랑스를 외쳤다. 토론이 격해져 감정이 상할 때쯤이면 선배들은 ‘똘레랑스, 똘레랑스’라고 되뇌며 웃었다. 그러면 당사자들은 최소한 서로를 존중하는 ‘척’이라도 했다. 지성인(知性人)이라면 응당 그래야 했던 시대였다.
똘레랑스(tolerance). 관용(寬容). 서로를 인정하자는 뜻이다. 나와 남은 다르다. 외모든 생각이든 반드시 다른 점이 있다. 각자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상대를 존중하는 것.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00년대 초중반 대학가를 강타했던 ‘똘레랑스 열풍’은 사상적 진화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똘레랑스라는 말이 사라졌다. 사라지다 못해 조롱의 대상이 됐다. 상대는 나를 속여 영혼을 앗아가려는 ‘악마’인데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냐는 논리다. 심지어 존중하는 ‘척’하는 것조차 ‘배신’이 되는 시대다. “악마와 타협하려 하는 걸 보니 너도 악마가 틀림없구나.”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SNS 같은 뉴미디어의 발달 탓일 수도 있고, 삶이 팍팍해져서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정치인’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정치는 이견(異見)을 조정하는 행위다. 즉, 구성원 간 갈등이 격화됐다는 건 정치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치인은 치열히 논쟁해야 한다. 그게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의 의무다. 그러나 ‘선’은 지켜야 한다. 상대도 선의(善意)를 지닌 우리 사회의 구성원임을 인정해야 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해선 안 된다. 그게 똘레랑스 정신이다.
지금은 어떤가. 권력 획득을 위해선 상대를 국민의 주적(主敵)으로 만들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다. 선거만 이기면 반대 진영을 파렴치한으로 몰아도 그만이라는 자세다. 정치인들에게서 ‘방법론이 다를 뿐 상대도 국가를 생각하는 정치적 파트너’로 생각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선을 넘다 못해 선이 없는 듯 행동한다.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도 다를 바 없다. 각 진영을 대표하는 ‘스피커’들은 유튜브에 둥지를 틀고 상대 진영을 향해 비아냥과 조소를 내뱉는다. 상대가 하는 일에는 반드시 ‘흑막’이 있고 ‘음모’가 있다는 투다. 이러니 국민이 생각이 다른 상대를 존중할 리 없다. 악마를 숭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어떻게 한 지붕 아래 살겠는가.
지난 18일.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 홍세화 씨가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책을 통해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한국 사회에 설파한 인물이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똘레랑스란 종교가 다르든 사상이 다르든 피부 빛깔이 다르든 출생지가 다르든, 나와 다른 남을 그 자체로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인정해준다는 것.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상대는 나라를 망치려 드는 ‘간첩’이며 썩어빠진 적폐(積弊)라고 믿는 시대. 그래서 반드시 절멸(絶滅)시켜야 한다고 믿는 시대. 다시 한 번 ‘똘레랑스 열풍’이 불어 닥치길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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