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전학련 의장으로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주요 인물로 꼽혀
87년 6월 항쟁의 과제는 정치적 주도세력의 성장
광복 100주년, 평화통일과 포용국가 비전 완성해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처음엔 한국투쟁사를 풀어보려고 했다. 그 줄기를 통해 대한민국 주류 이동의 역사를 조명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데스크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아마 못할 거다.” 그러면서 준 아이템이 6월 항쟁 되짚기였다. 부연하면 당대의 직간접 주역들을 만나 그들이 경험하고, 기억하고 평가하는 6월항쟁의 ‘썰’을 연재 순으로 담아내자는 거였다.
근데 왜 6월항쟁부터일까. 초기 기획자(정세운)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변곡점.’ 현대사 민주화 발전의 가장 큰 변곡점이 87년 6월항쟁이라는 얘기였다. “그 전까지는 권위주의 독재의 시대였다. 6월항쟁을 통해 비로소 시민사회의 힘으로 군부 퇴진 및 직선제를 쟁취했다.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의 대변환을 이뤘다. 특히 6월항쟁까지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 폭발적 대전환)가 돼준 것은 ‘선거’였다. 85년 12대 총선이었다. ‘박종철 고문’ 등 화약고로서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렇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전두환 폭압 정치 아래에서 돌풍을 일으킨 YS(김영삼)의 신민당 12대 총선 승리가 전면적으로 판을 바꾼 계기였다. 선거를 통해 민심을 확인한 것. 그것이 태풍의 눈이 돼 정치권, 재야, 학생, 시민을 묶는 동력이 됐다.”
이 기획 아래 6월항쟁 되짚기는 추진됐다. 인터뷰에 앞서 공통 질문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성했다. △6월항쟁의 도화선으로 보는 것은 △6월항쟁 전후 무엇을 했나 △6월항쟁의 역사적 의미 △6월항쟁의 한계와 과제 등이다. 누군가는 ‘그럴 때가 있었지’로 추억하고, 또 누군가는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회의적 시각을 보낼 수도 있겠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작가의 소설 제목이었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떠오른다.
그런데 ‘서울의 봄’은 오긴 온 걸까. 더 거슬러 반짝하고 사라졌던, 그리고 꽤 오랜 시간 늦춰졌던 봄. 오긴 왔는데, 혹자의 말대로 진짜 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주저리주저리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6월항쟁 되짚기’가 내일의 시대정신을 가늠할 성장 판이기를 바란다.<편집자 주>
87년 6월항쟁에 앞서
미 문화원 점거 그때
‘아뿔싸.’ 곱상하게 화장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아니다. 너무 짙게 해서일까. “실례합니다.” 불심 검문조가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소속을 묻는데, “예…?” 그만 남자 목소리가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1985년 6월 7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지지하는 토론회를 막 마치고 나설 때였다. 앞서 5월 23일 낮부터 72시간동안 함운경(21, 서울대 물리학과 4학년)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비롯해 73명의 서울권 학생들은 미 문화원을 점거했다.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광주학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검문조에 걸린 자는 직접적으로 문화원 점거 농성 조는 아니었다. 그러나 ‘함운경’과 함께 핵심 관련자로 지목됐던 인물이었다. 기껏 여장을 했건만, 목소리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들킨 순간 양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다음 날 여자도 남자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으로 긴급 체포된 이의 이름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같은 시기 서울권 대학을 다닌 원모(남) 씨는 5대 일간지 탑을 장식한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그 즉시 구속 수감된 김민석(21) 서울대 총학생회장 겸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의장이었다. 지금은 한 통신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원 씨의 눈으로 볼 때 그 시절 ‘김민석’은 전국 대학가의 단연스타였다. “민석이? 당시 끝내줬지. 언변도 기가 막혔어.” 얼마 안 있어 ‘김민석’은 미 문화원 점거 농성 가담자들과 함께 재판장에 서게 된다. 이들을 변호한 단체는 YS와 DJ가 발족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였다. 사무실은 점거 농성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는 지근거리의 미 문화원 건물 맞은편에 있었다. 당시 민추협의 인권옹호추진위원장은 박찬종 변호사였다. 훗날 박 변호사는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재판 과정을 한편의 소설처럼 현장감 있고도 짜임새 있게 다룬 <광주에서 양키까지>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다. 그 속에서 박 변호사는 해당 사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85년의 한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어떤 시대 상황이 집약된 재판을 역사적 재판이라 부른다면 미 문화원 농성 사건 재판은 바로 그런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다. 이 사건의 의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질 것이고 언젠가는 1980년대 전반기와 후반기를 획하는 분수령 같은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될 것이다. 이 사건은 12대 2·12 총선과 함께 85년 국정 지표를 바꾼 계기가 됐다. 정권의 가장 아픈 상처를 건드렸다. 사람이든 정권이든 부끄러운 곳이 찔리면 화들짝 놀라는 것이다. 금기로 되어 온 광주사태(참고로 광주민주화운동이란 지칭은 김영삼 문민정부 때 공식화 됐다.)란 말을 다시 한 번 들추어내 국회에서 매스컴에서 그리고 일반 국민들의 입에서 회자되도록 했다. 73명의 학생들이 맨손으로 72시간 점거했다는 것 자체는 사소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급박하게 연쇄반응을 일으킴으로써 한 시대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국회에서의 광주 사태 논의, 삼민투 등 대학 내 학생운동 자체에 대한 일체 수사, 첫 공판에서의 소란, 그 직후 있었던 법무부장관 서울대 총장 민정당 원내총무의 전격 교체, 학원 안정법의 등장, 학원대책 강경론으로 급선회, 이들 일련의 사태들이 미국 문화원 농성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법정에서 주동 학생들은 이 점거를 ‘선도택’이라고 했다. 어떤 사안의 본질에 돌입함으로써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제기하자는 것이다.”
-박찬종의 <광주에서 양키까지> 중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87년 6월 항쟁을 일으킨 나비효과의 한 축과도 같다. 故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인 10·26 사태 이후 서울의 봄이 왔지만, 군부는 민심을 역행했다. 그 역류의 발화점 또한 잔인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힘으로 누르며 억지 독재를 강행한 것이다. 하지만 늦출 수는 있어도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끝까지 막지는 못했다. GDP 1인당 4000달러 이상이 되면 민주화가 싹 튼다는 말이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중산층이 성장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포화상태에 있었다. 끓는 물 100도씨로 치면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12대 총선에서 확인된 민심은 은폐되고 함구돼왔던 광주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의 불씨를 살려냈다. 학생들의 미 문화원 점거 농성을 통해 국제적으로 이슈화됐고, 확산됐다. 수세에 몰린 정권은 학원 탄압으로 대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독재의 댐은 붕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억압할수록 저항의 물줄기는 작은 틈바구니마저 뚫고 터져 나왔다. 전국적으로 번진 데모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故박종철 고문 사건,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이를 기어이 막으려다 생긴 부조리에서 비롯됐다. 처음엔 지켜보던 넥타이 부대들이 움직였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거리로 쏟아진 일반 시민들의 함성이 하나 둘, 그러다 일약 정국을 집어삼켰다. 체육관 선거로 불린 간접 선거가 직선제로, 이를 만천하게 공표한 6·29 선언으로 이어졌다. 시민의 승리, 독재의 패배였다.
그 시각 ‘김민석’은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연루자들과 감옥 안에 있었다. ‘이대로 있을 수 없다. 역사적 현장을 목도해야 한다.’ 어렵사리 접한 바깥소식에 ‘김민석’은 동지들과 함께 탈옥까지 모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건 어찌어찌 하겠는데,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결정적 약점이었다. 결국 성공을 못했다는 웃픈 뒷얘기도 전해졌다. 이는 지난 15일 여의도 한 커피숍에서 만난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전 의원과의 인터뷰에서 알게 된 내용이다. 어느덧 50대가 된 그는 당시를 어떻게 소회할까. 하지만 관련 얘기를 차근차근 풀어내자니, 어딘지 조금 막막한 감이 없지 않아 보였다. 그날은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원장직에서 물러난 직후였다. 정리할 것도 많고, 만날 사람들도 많은 듯 보였다. 또한 그의 시선은 이미 내년 21대 총선을 향해 있었다. 지역구였던 영등포을 출마 준비에 일찌감치 돌입한 듯했다. 앞날을 도모하는데 분주한 모습이었다. 2%부족한 듯, 약간은 산만한 듯, 그러나 무거운 역사적 주제를 특유의 학원 추억담으로 승화시킨 김 전 의원. ‘6월항쟁 되짚기’ 첫 인물과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양심상 안 할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책무”
- 6월항쟁 주역으로 무엇을 했나. 그 전에 궁금한 게 82년 서울대 입학 후 학생운동을 하고 총학생회장을 했다. 왜 학생운동을 하게 됐나.
“양심상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원래 과격한 사람도 아니고, 처음부터 운동을 하려했던 것도 아니다. 대학생 형들이 있어서, 학생운동을 하면 졸업하기도, 사회 진출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고 피하고 그랬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양심상의 책무랄까. 결국 하게 됐다.”
박찬종 변호사의 책 <광주에서 양키까지>에 따르면 김 전 의원의 집은 대대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며 부유했다. 부모 모두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결혼 후에는 학원을 경영했다. 칠삭둥이로 태어난 김 전 의원은 삼형제 중 막내였다. 세 형제 모두 아이큐 150이상으로 수재였다. 김 전 의원의 대입예비고사 성적은 전국 석차 100등 이내였다. 82년 3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 직접적으로 서클 활동하거나, 선배들이 이끌어줬다거나 어떤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거나, 분노했다던가. 그런 생생한 계기는 없었나.
“에피소드 하나 얘기하면 일학년 하반기였는데, 종로에서의 가두시위가 있었다. 일본역사 왜곡 반대 시위였다. 구경은 하고 싶고, 데모는 하면 안 될 것 같고. 어정쩡하게 따라가다 데모를 딱 시작하게 된 거다. 처음엔 제일 뒷줄이었는데, 앞으로 가다가 길이 막혀서 뒤로, 뒤로 하다 보니 어느 틈에 제일 앞줄이 돼 있더라. 그런데 그게 좋은 거다. 도망가기도 좋고. 앞도 잘 보이고(웃음). 우연적 계기로 시위대 앞에 서게도 되고 구호도 외치고…, 크게는 학내 일들을 보면서 피할 수가 없었다. 이후 관련 공부도 하고, 데모도 하고, 서클 활동도 하게 됐다. 그러다 삼학년 말 되면서 학생회장까지 하게 됐다.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할 생각도 전혀 없었는데, 분위기가 그렇게 됐다.”
- 인물도 되고, 대중 연설도 잘했을 것 같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것 참 모르겠다.”
김 전 의원은 82년 서울대 입학 후 과학회인 사회발전연구회에서 서클 활동을 했다. 이후 84년 9월 사회학과 학생회장을 거쳐 85년 4월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됐다. 학생자치화 등을 공약으로 내건 김 전 의원은 투표율 70%에서 약 45%의 득표율로 당선됐다고 한다. 그런 뒤 4월 17일 전국총학생회 연합을 결성해 전학련 의장을 맡았다.
- 학생회장 연설할 때 주로 뭐라고 했나.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연설이 있나.
“학생회장 당선 때 프랑스 혁명 당시의 일화를 얘기한 적이 있다. 루이 14세가 일기를 매일 쓴다. 그런데 일기에 ‘아무 일이 없다’고 쓴 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었다. 지금의 세상도 이렇게 변해갈 것이다. 그렇게 말했던 생각이 난다. 그때 가장 큰 대학가 이슈가 광주였다. 광주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필요하다. 그런 것이 가장 큰 이슈였다.”
“우리는 왜 미 문화원에 들어갔는가?
총회장으로서 일종의 엄호가 내 역할”
- 미 문화원 점거의 계기는?
“당시만 해도 광주민주화운동은 금기였다. 그때는 광주 사태라고 했다.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 의혹 등을 문제 제기하자는 뜻에서 기획된 거였다. 미 문화원 농성 점거팀의 책임자는 함운경이었다. 같은 서울대 동기였다. 한나라당 가서 국회의원 했던 연대 출신의 정태근이라든가, 성대 고진화 등이 있다. 73명의 서울권 학생들이 점거에 참여했다. 전학련 의장이자, 총학생회장이었던 나는 점거 현장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내 역할은 학우들이 점거 농성장으로 들어간 후 총회장으로서 일종의 엄호도 하고, 기자회견도 하고 후속 지원을 하는 거였다. 그러자 ‘미 문화원 배후조정’을 했다며 구속이 된 거였다.”
1985년 5월 23일 낮 12시‘함운경’을 비롯해 73명의 학생들은 미 문화원을 기습 점거해 2층 도서관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들 73명은 전학련과 삼민투(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소속으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등이 속해 있었다.
그 시기 외부로 알려진 ‘미 문화원 농성학생 성명서’에 서는 이런 글이 있다. ‘우리는 왜 미 문화원에 들어갔는가’를 머리말에 적은 이 성명서는 박 변호사의 <광주에서 양키까지> 에필로그에 수록돼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들이 당시 미국에 대해 어떤 불신을 갖고 있었는지가 성명서를 통해 일부 담겨져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한국의 독재 세력이 광주민중을 암살하기 위해 무장특수부대와 정규사단을 동원하기로 했을 때 대한국군의 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던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은 이를 승인하고 본국으로 업무 협의차 떠난 것이 나중에 알려져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 각오한 일이었나.
“그때는 학생회장을 한다 치면, 감옥에 들어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얼마나 도망 다니다, 잡히느냐가 관건이었던 때다.”
“여장 하고 도망치다 불심검문에 걸려
국제적 이슈 사건이라 고문은 피해가”
- 수배 당시의 일화 같은 것이 있나.
“학생회장 되기 전부터 안기부에서 예의주시하는 인물이었다. 되고 나서부터는 큰 집회나 시위를 주도하다보니 피해 다니기 바빴다. 광주 5·18을 기리는 행사를 앞두고는 내가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일주일씩이나 유치장에 가둬둔 적도 있었다. 시위를 주도할까봐 미리 막고 보자는 식이었다. 또 한 번은 서울대병원에다 집어넣었다. 학교에 못 가게 하려는 의도였다.”
박 변호사의 <광주에서 양키까지>에서도 안기부의 방해공작이 기술돼 있다. 책에 의하면, 85년 5월 17일 서울대에서 열린 대동제 개막에 앞서 김 전 의원은 세 차례나 납치를 당했다. 영장 없이 연행돼 19일 아침까지 전경들에 의해 에워싸여져 있었다. 5월 9일엔 교문 앞에서 경찰에 끌려가 즉심 7일 선고를 받았다. 5월 16일 새벽에 경찰들이 서울대 병원으로 강제 입원시켰다. 낮 두시쯤이 돼서야 서울대 학생회 간부들의 도움으로 환자복을 입은 채 병원을 탈출, 5·17 행사를 주도할 수 있었다.
-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으로 도망 다니다 어떤 일로 붙잡히게 된 건가.
“서울대에서 행사를 하고 나올 때였다. 보통은 산을 타고 빠져나왔는데, 경찰들이 학교를 쭉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에 여장으로 변장을 하고 검문 밖을 나올 생각이었다. 용케 잘 빠져나왔는데 하필 불심검문조가 맨 마지막에 말을 시키는 거다. 근데 여장은 어떻게 하겠는데, 남자 목소리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겠더라. 상황이 어정쩡하게 되다가, 눈치가 이상하니까 바로 덮치더라.”
- 요즘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과 유시민 노무현 재단 이사장 간 학생운동 당시의 구속 기간 합수부진술서를 둘러싸고 진실 공방전이 뜨거웠다. 김 전 의원 때는 학생운동권들끼리 연락책이라든가 이런 것은 어떻게 했는지?
“주요 지도부들을 만날 때는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장소로 옮겨 다녔다. 방을 얻어 같이 지내기도 하고, 그러다가 조금 느낌이 이상하다 싶으면 쫙 해산하기도 하고 그랬다. 보안이랄까. 이런 걸 조심하는 시절이었다.”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엄청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구속됐을 무렵 슬퍼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 당시 연애는 하고 있었나.
“대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 한창 청춘의 나이에 몇 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 같다.
“대학교 때 나와 연애를 하던 그 친구도 뒤늦게 학생운동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구속이 됐었다. 서로 면회를 갈 수가 없었다.”
- 잡히고 나서 고문에 대한 걱정도 엄습했을 것 같은데.
“다행히 우리는 운이 좋았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는 워낙 국제적 관심을 받은 사건이었다. 협박은 있었어도 직접적 고문이나 이런 것은 없었다. 또 나는 늦게 구속된 경우였다. 집중도 많이 받아 정권에서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등 이래저래 운이 좋았었다.”
대학생들의 반미 감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사건과 관련해 미국도 예의주시했다고 한다. 박 변호사의 책에 따르면 미국의 여론도 학생들을 이해했으며, 반미 감정 확산을 우려했다. 이에 미 하원의원 31명은 전두환 정권에 편지를 보내 민주화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미 지도층은 이를 통해 “김대중 씨와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과 고문 행위를 중단하고 언론의 자유를 회복시켜 2월 (12대)선거에 나타난 민주화를 향한 결실을 보존할 것”을 촉구했다.
이 가운데 재판 기간 김 전 의원은 논리 정연하고 거침없는 언변으로 스타로 떠올랐다. 어떤 말들이 좌중의 감탄을 자아냈는지, 책 <광주에서 양키까지>의 일부를 옮기면 이렇다.
김민석 : “최루탄이 먼저냐, 돌이 먼저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여기서 따지고 싶은 본질적인 문제는 시위가 필연적이란 겁니다.”
재판장 : “학생 시위가 불안을 야기할 정도인가.”
김민석 : “그 불안은 사회의 불안이 아니라 집권층의 불안일 뿐입니다. 이 정권은 처음엔 폭도들에 의한 폭거였다고 하다가, 이제는 모든 국민의 아픔이라고 호도하고 있습니다. 폭도라고 매도한 저들이 이제는 사망자 숫자가 문제인 듯 1백91명밖에 안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는 1백억 원을 사기한 자가 나는 10억 원밖에 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광주 사태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도 책임을 모호하게 하는 주장입니다. 국민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지만, 책임의 질에는 차등이 있어야 합니다. 가해자는 학살의 책임을, 기성 정치인은 분열하여 그런 사태를 자초한 책임을, 국민들은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재판장 : “광주사태 현장에 없었으면서 어떻게 진상을 아는 것처럼 하는가.”
김민석 : “3·1운동은 꼭 참가한 사람만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87년 6월항쟁 소식에 탈옥 결심
역사적 현장에 함께 있고 싶었다”
- 감옥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고충이 말이 아니었을 것 같다.
“당시 나는 서대문구치소, 안양, 청주 등을 거치면서 살았다. 내내 독방에 있었다. 한 3년 정도 있었다. 감옥 안에서는 일단 밥을 빨리 먹어야 했다. 8시간 안에 세끼를 다 먹는 형식이었다. 아침 8시에 먹고, 점심 12시에 먹고, 오후 4시에 먹어야 되니까, 8시간 안에 3끼를 다 먹는 거였다. 그 안에서는 당연히 신문을 읽거나, TV나 라디오도 접하지 못했다. 책도 모두 검열한 뒤 반입할 수 있었다. 잠자리도 편치 못했다. 교도소 맨바닥에 송판을 깔고, 얇은 담요를 깔고 겨울을 나던 때였다. 자고 일어나면 담요 바로 밑에 물이 축축하게 스며드는 환경이었다. 그런데서 이삼년 있고 나면 아무리 젊고 혈기왕성한 때여도 골병이 들게 되더라. 출옥 후에 상당 기간, 거의 십여 년 이상 허리나 어깨가 많이 아팠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도 동시에 인생 공부를 하게 되더라. 세상은 어디나 똑같다는 것을 배웠다. 엄혹한 시절이지만 교도관들과 정도 들었다. 세상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고, 몰래 참기름도 갖다 줘 그걸로 밥도 비벼 먹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단식 농성하면서 옆방 애들하고 큰 소리로 주고받으며 ‘밥 다시 먹게 되면 뭐 먹고 싶다’ 얘기도 하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런 재미도 있었다. 이 세상이란 게 어디나 인간관계가 있고, 정이 통 하는구나. 그런대로 살 만하구나. 이런 걸 느끼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추억만이 생각나는 것 같다. 그때 감옥 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 삼십년 만에 다시 만나 보기도 했다.”
- 감옥 안에서 87년 6월항쟁 소식을 듣고 탈옥도 모의했다고 하던데.
“사실 우리로서는 6월 항쟁이 올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더구나 감옥 안에서는 알기 어려웠다. 그러다 어머니와 지인들이 전해준 바깥소식에 너무 궁금해 가슴이 뛰고 한없이 벅찼다. 이 역사적 현장을 나가서 구경해봐야겠다. 탈옥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래서 함께 있던 친구들과 운동 시간을 이용해 탈옥을 모의했다. 우리는 꽤 진지했다. 감옥 구조를 막 분석해서 몇 개의 담을 뛰어넘어야 하는지, 그 다음엔 차를 또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문제는 차 운전할 줄 아는 놈이 한 놈도 없다는 거였다. 그때는 다들 어릴 때니까(웃음). 어쨌든 그렇게 탈옥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만큼 현장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6월항쟁의 정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었나.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구속돼 있던 학생들이나 가족들이 와서 면회를 해준 얘기들에 의존해야 했다. 그리고 ‘통방’이라고 하는데, 서로 방 안에서 이웃한 사람들끼리 소리를 질러 얘기하는, 그걸 통해서 정보를 접하곤 했다.”
“더 이상 군정 용납하기 어려웠던
국민의 민주적 역량이 낳은 성과”
- 6월항쟁의 역사적 맥락의 도화선은 어떻게 보나.
“박정희 유신 독재가 80년으로 끝났어야 됐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결국은 또 광주에서 피로 짓밟지 않았나. 그렇게 전두환 노태우가 지속됐다. 하지만 국민의 민주적 역량이 많이 성장했고, 85년 총선을 통해서 그 같은 민심이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예컨대 미 문화원 사건에 대한 여론의 반향이 컸던 것도 국민들 의식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여러 조건이 갖춰져 6월항쟁으로 이어진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직접적 도화선은 박종철 사건이 크지 않았겠나.”
- 역사적으로 6월 항쟁에 대해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다. 해방 이후 4·19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쌓여왔던 민주역량이 더 이상 군정을 용납하지 않은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그런 역사적 회귀를 막을 만큼의 민주적 역량이 꽃을 피웠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돼줬다고 생각한다.”
- 당시의 한계로 보는 것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6월항쟁을 통해 전두환 정권의 연장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후 대선에서 야권단일화에 실패해 이기지 못했던 것이 한계였다. 결국은 민주화를 직접적으로 끌고 갈만한 정치적 주도세력의 성장이 취약했던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민주주의는 결국 태생적으로 그것을 끝까지 성공시킬 수 있는 주도적인 정치 세력의 성장이 담보가 돼야 되는 데 있다. 그런 교훈을 남겼다고 본다.”
- 6월항쟁이 남긴 과제에 대해 말한다면. 민주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도 앞으로의 시대정신에 대해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3·1운동 이후 백 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과제가 있다. 6월항쟁 전후 우리의 역사는 평화로운 통일과, 포용국가라고 부르는 함께 잘 사는 나라를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완성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한편으로 모든 사람이 자기를 완성하며 살 수 있는 사회이다. 그러려면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적으로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민주주의와 평화, 사회적 복지 등 적어도 광복 100년이 되는 2045년까지는 우리가 완성해야한다고 생각한다.”
- DJ 수혈론의 대표 영입 인물이자 30대 기수론으로 차세대 잠룡으로도 꼽히는 등 일찌감치 정치적 스타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같은 86그룹의 정치적 등용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요즘 운동권 출신들이 정치 주류로 떠오른 것을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86그룹이 역사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운명과도 같다. 생물학적 나이로 봐도 현실적으로 한 십년은 우리 세대가 이 사회에서 중추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할 때다. 그중에서 과연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이 나올 거냐. 그건 가봐야 알겠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4·19세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대통령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86그룹 역시 십년 정도는 지켜봐야 될 일이다. 또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30대 때 정치를 할 때는 나 혼자였다. 그야말로 외로운 섬과도 같았다. 그만큼 워낙 빨리 국회에 입문을 했다.(김 전 의원은 15대와 16대 영등포을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30대 후반에 집권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나갈 정도였다. 우리 동세대 중 가장 이른 출마였다. 십년, 이십년 빠른 출발이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비춰보면, 정치에 다시 복귀한 지금이 매우 뜻 깊다. 정치라는 것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럿이 함께 하는 거 아닌가. 동시대의 고민을 함께 했던 동년배들도 많이 있고 후배들도 있어 즐겁다. 더불어 할 수 있는 집단력도 생기는 것 같다. 혼자 했던 그때보다는 본격적으로 일을 해볼 수 있겠다, 그런 자신감도 붙고 있다.”
김 전 의원은 미소가 많은 사람이었다. 때때로 곤란한 질문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6월항쟁 되짚기와 단박 인터뷰를 나눠 진행했는데, 어느 틈에 한 시간 가까운 대화는 훌쩍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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