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조서영 기자]
인간의 역사(歷史)란 ‘경험의 기록(記錄)’이다.
밥을 먹고 친구와 커피 한 잔의 수다를 떠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거나 군부를 움직이는 등 정치의 흐름을 바꾼 중대한 것까지. 인간의 경험은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적인 경험들은 사인(私人)의 기억 속에 묻혀 영원히 잠든다. 일부만 공적 기록, 즉 역사로 선별돼 후세에 전달될 뿐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는 공란(空欄)이 많다. 이 빈칸을 채우고 싶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인(私人)의 기억, 그의 회고록을 들여다본다. 물론 사적 기록 속엔 수많은 오류들이 있다. 다만 〈시사오늘〉은 완벽하게 순수한 기록이란 없다는 판단 하에, 정치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역대 대통령 및 총리의 회고(回顧)를 재구성하고 한 사건을 다각도로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 ‘대통령 회고사’는 〈시사오늘〉이 대통령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다. 우리의 첫 번째 재생은 현재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자유한국당 심재철 의원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다.
1980.09.17
“김대중, 사형. 문익환, 20년. 이문영…….”
오전 10시의 육군본부 대법정. 문응식 재판장은 침착한 어조로 피고인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김대중 피고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경련이 일었다. 이름을 불린 다른 피고인들 역시 굳은 표정이었다.
김대중 대표에게 적용된 죄목은 5개. 내란음모, 국가보안법위반, 반공법위반, 외환관리법위반, 반공법위반. 재판부는 공소 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하며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문철익·이문영·예춘호·고은태·김상현·이신범·조성우·이해찬·이석표·송기원·설훈·심재철 등 나란히 선 12명의 피고인에게도 징역20년에서 5년 형이 선고됐다. (중앙일보 1980.09.17. 종합1면 기사 발췌)
9월 17일 선고 공판이 열렸다. (중략)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살고 싶었다. 나는 제발 사형만은 면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법정에서도 속으로 기도했다. 재판장의 입 모양을 뚫어지게 보았다.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었고, 입술이 앞쪽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 징역이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었다. 재판관의 입이 찢어졌다. 김대중, 사형.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424페이지 中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왜 사형수가 됐을까. 그는 왜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됐을까. 시계는 거꾸로 돌아 폭력으로 얼룩진 밤, 1980년 5월 17일 밤으로 돌아간다. 시작은 역사의 그날,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바로 전날 밤이다.
1980.05.17. 늦은 밤
밤 10시, 김대중 당시 야당 총재 저택의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승희 경호원이 문을 열었다. 집으로 총마다 검을 꽂은 40여 명의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계엄사 일입니다. 잠깐 가셔야겠습니다.”
“총은 겨누지 말라”며 군인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아내를 뒤로한 채, 김대중은 무력하게 끌려가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혔다. 동시에 미리 작성해 두었던 계엄사령부의 ‘김대중 체포문’이 발표됐다.
당시 김영상·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민주진영은 대통령 후보직을 놓고 서로 각축을 벌이는 중이었다. 신민당 내부 계파 갈등이 격렬한 수준에 이르러 1978년 ‘신민당 각목 전당대회 사건’이 발발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군부를 정리하고 정권을 잡아야 할 민주 세력이 양분된 것이다.
사실 1980년 당시에는 군부를 중심으로 김대중에 대한 비토세력이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김대중에 대한 그들의 거부반응을 볼 때, 만약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쿠데타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와 김대중의 단결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김대중을 설득해 보기도 했다.
-김영삼 자서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04페이지 中
당시 상황에 대해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요컨대 최규하 전 대통령이 ‘3金(김영삼·김대중·김종필)’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있었기에, 10·26 사건과 5·17 비상계엄 조치 등 ‘서울의 봄’이 아니었더라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권력에서 멀어졌을 것이라는 소리다.
김종필 씨도 군 출신이기는 하지만 최 대통령은 이미 이른바 ‘3김 씨’에 대해서는 크게 실망하고 있었고 따라서 5·17조치가 아니더라도 후임 대통령 후보로는 일찌감치 제쳐놓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최 대통령은 3김 씨가 유신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창출해나갈 능력 있는 대안세력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임 성명 발표 직전에 국무위원, 국보위위원 앞에서 피력한 술회에서 최 대통령은 1980년 봄의 정치적 혼란과 극렬했던 학원소요가 일어난 데 대한 책임이 이들 정치 지도자에게 있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전두환 회고록 <혼돈의 시대(1979-1980)> 1권 591페이지 中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80년 5월초부터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국회해산 △비상대책 기구설치 △예비검속 대상자 △권력형 부정부패척결 대상자 △정치활동 금지 대상자 등을 물밑에서 준비 중이었다.
이때 김대중이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라는 범국민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전두환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에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선포 직전 김대중 등 37명을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김종필 등 9명을 권력을 통한 부정축재혐의로 체포하고, 18일 새벽 무장한 제33사단 병력으로 국회를 점거해 사실상의 헌정중단 사태인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5·17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군부에 의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군사 작전이었다. 신군부는 5월 17일 오후 9시 50분 비상국무회의를 열어 이날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미리 작성해 둔 명단에 따라 정치인과 재야 인사들을 급습해 체포·연행했다. 나와 김종락 형님은 이후락·김치열·김진만·오원철·장동운·이세호 등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란 죄목으로 연행됐다. 김대중과 예춘호·문익환·김동길·인명진·고은·리영희는 사회 혼란 조성과 학생·노조 소요 관련 배후조종 혐의로 끌려갔다. 김영삼은 자택에 연금됐다. 신군부는 이어 모든 정치·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국회의사당을 병력으로 봉쇄했다. 국회는 사실상 해산되었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가 3권을 장악했다.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증언록> 93페이지 中
나는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혔다. 창졸간에 잡혀 와 조사를 받으려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들은 내게 태어나서 최근까지 행적을 자세히 쓰라고 했다. 그러더니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모의를 했다며 그에 대해서 캐물었다. 50년 전의 자료까지 찾아와 들이대며 내란 음모와 관련 여부를 따졌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부질없었다. 아무리 털어도 혐의는 나오지 않았다. (중략) 지하에는 취조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비명소리를 듣지 않으려 해도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왔다.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나중에 모두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406~407페이지 中
1980.05.18.~1980.05.24.
남산의 지하 감옥에서, 김대중은 며칠 밤낮을 같은 질문을 받았다.
“당신이 측근들과 함께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모의를 한 것을 알고 있소. 바른대로 말하시오.”
김대중은 ‘모른다’로 일관했고, 수사엔 진척이 없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질문이 조금 바뀌었다.
“광주에서 큰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아시오?”
“모릅니다.”
“전남대학교 복학생 정동년을 아시오?”
“모릅니다.”
“당신이 500만 원을 주고 반정부 운동을 시키지 않았소? 자백하시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시민들이 완전 무장한 군인들의 발에 짓밟혔다는 것도, 항쟁 4일 째 되던 날 합동수사본부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해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들을 자극했다는 것도, 외부와 차단됐던 김대중은 까마득히 몰랐다.
합동수사본부는 김대중을 강제 연행한 지 5일 째인 5월 22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10·26 사태의 발생을 정권 획득의 호기로 인식한 김대중은, 정상적인 정당 활동과 합법적인 계기를 통해서는 정권 획득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 풍조를 심화시켜, 선동을 통해 변칙적인 혁명 사태를 일으켰다. (중략) 대중 선동과 정부 전복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서 복직 교수와 복학생을 사조직에 편입시키고, 학원 소요 사건을 민중 봉기로 유도 발전시키도록 기도했다.”
이에 대해 전두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참고로 전두환 회고록에 등장하는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분량은 몹시 짧다. 채 한 페이지가 되지 않는다.
금년 봄 들어서 어떻게 된 셈인지, 일부 정치인들이 너무 성급한 나머지 정치 과열 상태가 이어지고, 또 솔직히 말씀드려서 일부 언론들도 여기에 대해서 상당히 자극적인 기사가 나오고, 이것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정부 불신 사조가 움트기 시작하고 또 이에 따라서 학원에 비화되기 시작해서 학생들이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도 처음에는 학내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대부분이 대학 캠퍼스 내에서 여러 가지 거론들을 하더니 급기야 거리에 뛰쳐나왔는데 거기에 내건 슬로건이라는 것은 분명히 말씀을 드린다면 어떤 특정 정당, 또는 특정 정치인들이 부르짖는 그러한 슬로건을 학생들이 내걸고 가두시위가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 전두환 회고록 <혼돈의 시대(1979-1980)> 1권 591페이지 中
1980.07.04.
7월 4일 계엄사령부는 계엄법·반공법·국가보안법 등을 내세워 김대중을 비롯한 박형규, 백낙청, 송건호, 이효재, 장을병, 유인호, 임재경, 문익환, 안병무, 한완상, 이문영, 송기원, 고은, 한승헌, 이호철, 이해동, 서남동, 조성우 등 37명의 내란음모 사건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이들을 육군본부 검찰부에 송치했다.
김대중 대표와 그가 추진했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역시 내란음모라는 딱지가 붙었다. 신군부는 이 사건을 통해 거물 정치인들은 물론 재야 및 학생운동 핵심 인사까지 연루시킴으로써, 민주 진영 전체를 와해시키고자 했다.
군 검찰은 처음에는 ‘내란죄’로 몰려고 했으나 자신들이 생각해도 너무 황당무계한 일인지라 ‘내란선동죄’로 바꾸었다. 정동년의 자백 외에는 어떤 증거도 없었지만, 그 죄를 뒤집어쓴다 해도 최고 형량은 무기징역이었다. 나는 그래서 저들이 나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며 안도했다. 그러나 최후에 기소장을 받아 보니 국가보안법 1조 1항, 즉 ‘반국가 단체 수괴’ 혐의였다. 나를 사형시키려면 다른 죄명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저들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내가 한민통 의장에 취임했다고 조작했다. 그러니까 국가보안법은 나를 죽이려 추가로 적용했던 것이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416페이지 中
5·17 이후 내가 가택연금을 당해 인고(忍苦)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전두환의 신군부는 5월 31일 이른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국보위)를 발족, 일사천리로 정권을 장악해갔다. 신군부는 6월 18일 김종필 등 9명에 대해서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를, 7월 4일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는 등 정치인 거세를 위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김영삼 자서전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207페이지 中
이때 정동년 당시 전남대 복학생회 대표(前5·18광주민중항쟁단체연합 의장)는 5월 17일 밤 군인들에게 끌려가 “김대중으로부터 500만 원을 받은 혐의를 인정하라”며 온갖 고문을 당했다. 그는 결국 계엄사 합수부의 잔혹한 고문 끝에 거짓 진술서를 작성해야만 했다(정 전 대표는 이 사건으로 그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다행히 1982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가혹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한 정동년은 그 일이 괴로워 교도소에서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훗날 내가 미국 망명을 마치고 난 후 정동년을 처음 만났다. 정동년은 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지만 죄송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 독재 정권의 희생자들이었다. 내가 정동년 씨에게 “500만 원 중 쓰고 남은 돈이 있으면 돌려 달라”고 농을 던졌더니 그가 “500만 원을 주시지 않으셨으니 지금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우리는 함께 웃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416페이지 中
검찰로 송치된 지 일주일 후, 누군가 김대중을 찾아왔다. 합동수사단장이자 보안사 대공처장이었던 막후의 실력자(實力者), 이학봉이었다. 김대중은 그의 저서에서 “1980년 7월 10일이라는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다”고 서술했다. 이 날짜가 그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특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무참한 ‘광주 사태’를 신문을 통해 처음으로 마주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이학봉 대령은 신군부에게 협력할 것을 요구하며 수사관을 통해 광주의 사태를 보도한 신문을 전달했다고 한다. 아마 김 전 대통령이 신군부 측에 협조할 것을 대비해 예비지식을 주입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학봉述)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간다면 대통령직만 빼고 어떤 자리라도 드리겠습니다. 만일 우리 요구를 거부하면 살려 둘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죽이겠습니다. 재판은 요식 행위에 불과합니다. 협조하면 살고, 거부하면 죽는 것입니다.”
-김대중 자서전 <삼인> 1권 412페이지 中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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