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이명박 이회창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스물여덟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2007년 제17대 대선이다.
‘대통령 회고사’는 대통령의 입을 빌려 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에 의미가 있지만, 이번 회고사는 이회창 전 국무총리의 회고록도 참고했다.
2007.03~08月 한나라당 후보 경선
승리의 기쁨은 짧았다. 2004년 촛불을 통해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획득했으며, 노무현 탄핵을 막아냈다. 2004년 제17대 총선 막전막후는 아래 기사에 상세히 서술돼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9649)
임기 말 참여정부는 부동산 정책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우리당은 2004년 이후 열린 모든 선거에서 참패했다. 2006년 4회 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광역자치단체장 12석을 차지한 반면, 우리당은 1석에 그쳤다. 특히 2005년 두 차례의 재보궐선거(4·10월) 모두 한나라당의 승리로 돌아가면서, 우리당의 과반 의석은 1년 만에 무너졌다.
이런 상황 속 한나라당에서는 ‘경선만 승리하면 대통령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전 서울시장 이명박,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 전 경기도지사 손학규가 대권 후보 ‘빅3’로 거론됐다. 그러나 세 사람은 경선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충돌했다. 경선 시기와 방법이 쟁점이었다.
이명박·박근혜는 경선 시기 6월을, 손학규는 9월 이후를 주장했다. 손학규는 “두 사람은 승세(乘勢)를 갖고 밀고 나가면 된다는 생각인 것 같다”며 “구 여권의 움직임을 봐가면서 후보 선출 시기를 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역대 대선은 여당이 후보를 결정한 뒤, 야당이 후보를 정해왔다. 뿐만 아니라 손학규는 국민경선제(오픈 프라이머리)에 준하는 국민 참여 확대를 주장했다.
몇 차례의 경선준비위원회 협상 결렬 끝에, 당 지도부가 제안한 ‘8월-20만 명 선거인단’ 중재안이 결정됐다. 선거인단 배분 비율은 대의원과 당원, 일반국민과 여론조사가 2:3:3:2를 각각 반영했다. 하루 뒤 손학규는 한나라당 경선 불출마 및 탈당을 선언했다. 그의 탈당은 선거 규칙에 대한 단순한 반발이 아니었다. 그는 한나라당의 구태 정치와 줄서기 관행을 지적했다. 아래는 당시 손학규의 탈당 선언문 중 일부다.
“지금 한나라당은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개혁을 위해 노력했던 일부 의원들과 당원들조차 대세론과 줄 세우기에 매몰돼 있다. 한나라당을 탈바꿈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실패했음을, 그리고 나의 책임도 크다는 것을 솔직하게 자인한다.”
그의 소신에는 비난이 쏟아졌다. 노무현은 “선거를 앞두고 경선에서 불리하다고 탈당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14년 동안 몸 담았던 한나라당 역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시 원내대표였던 김형오는 “당에서 장관에 지사까지 지낸 분이 떠나면서 남은 사람들 등에 칼을 찌르는 발언을 했다”고 꼬집었다.
아래는 손학규 전 대표와의 24일 <시사오늘> 인터뷰 중 일부다.
“물론 한나라당에서 경기도지사 후보로 당선됐다. 그러나 당선 이후엔 정치와 멀어져 당에서 완전히 배제돼있었다. (중략) YS 퇴임 이후 당은 탈색돼 수구 보수화 됐다. 젊고 개혁적인 사람들마저 이명박에게 줄을 서는 모습을 보며,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탈당함으로써 지금껏 개혁의 길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있다.”
‘빅2’만 남은 한나라당은 이후 6월 후보 등록과 정책비전대회를 거쳐, 7~8월 선거운동과 후보자 합동 연설회를 실시했다. 손학규의 빈자리엔 홍준표와 원희룡이 참여했다. 고진화는 경선 도중 후보 사퇴했다.
경선 과정은 한 마디로 ‘네거티브 공세’였다. 전문가들은 두 후보의 폭로 과정 속 정책 대결과 민생 논의가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이때 제기된 의혹은 13년 후 두 전직 대통령의 법원 판결까지 이어졌다. 이명박은 지난 10월 다스(DAS) 자금 횡령과 삼성 뇌물 수수 등 혐의로 징역 17년을 확정 받았다. 박근혜는 국정농단 사건으로 지난해 징역 20년을 받았으며, 현재 대법원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다.
박근혜는 이명박의 재산 문제에 집중했다. 그중 투자운용회사인 BBK, 다스와 이명박의 관계 의혹이 쟁점이었다. 이명박은 BBK 의혹에 “새빨간 거짓말”이라 무마했으나, 2020년 “다스는 누구 것입니까”에 대한 답이 내려졌다. 다스의 실소유주는 이명박이라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그는 당시 차명 재산 보유설과 BBK와의 연루 의혹설을 전면 부인했다. 수차례 “BBK와 관련해서는 단 한 주의 주식도 갖고 있지 않으며, 직접이든 간접이든 관계가 없다”며 “나는 떳떳하니 차후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것”이라 공언했다. 검증 과정에서 몇몇 의원들은 당 윤리위원회에 제소돼 중징계를 받거나, 수사를 받는 등 강경 대응이 이어졌다.
반면 이명박은 박근혜의 국정농단에 집중했다. 그중 故최태민 일가와 박근혜의 관계와 정수장학회 의혹이 쟁점이었다. 박근혜는 검증청문회를 통해 “최태민 비리 의혹은 실체가 없는 일”이라며 “다만 앞으로 실체가 있는 게 나온다면 굉장히 유감이고 잘못”이라 답했다. 박정희 정권의 정수장학회 강취 의혹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못 한다”고 반박했다.
이명박은 경선 과정을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다”고 회고하며, “그 과정에서 원칙을 일관되게 지키고자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원칙이란 네거티브 공세를 하지 않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경선 과정에서 나는 수많은 네거티브 공격을 받았다. 그로 인해 선거 판세가 불리해지자 주변 참모들은 “우리도 네거티브 전략으로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네거티브 유혹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며 출마한 사람이 기성 정치의 관행을 똑같이 답습한다면 출마한 의미가 없다고 봤다. (중략) 나는 경선 과정에서 수많은 네거티브 공격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초심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 이명박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 101쪽.
경선 결과 이명박이 49.6%를 얻어, 박근혜(48.1%)를 1.5%포인트 차로 승리했다. 구체적으로, 여론조사에서는 이명박(51.55%)이 8.82%포인트 앞섰으며, 선거인단 투표는 박근혜(49.39%)가 0.33%포인트 앞섰다. 이로써 8월 19일 이명박은 한나라당의 대권 주자로 지명됐다.
2007.09月 민주노동당 후보 경선
바통을 이어받은 정당은 민주노동당이었다. NL(자주파)계의 지지를 받은 권영길, PD(평등파)계 노회찬·심상정 3파전이었다. 6월부터 정책 토론회를 실시하며 경선에 돌입한 민노당.
전국 순회 경선 결과, 권영길은 총 49.4%로, 과반 득표에 실패했다. 이에 2위였던 심상정(26.1%)과 결선투표를 치르게 됐다. 노회찬(24.6%)은 3위에 그쳤다. 6일 후 치른 결선투표 결과, 박빙의 승부였다. 권영길이 52.74%로, 심상정(47.26%)과 5.48%포인트 격차로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1차 투표의 노회찬 표가 심상정에게 대거 이동한 결과였다. 아래는 권영길의 수락연설 중 일부다.
“민주노동당 경선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선이 아니었다. 권영길의 승리는 심상정 후보의 승리이자, 노회찬 후보의 승리다. 세 사람이 당원 동지들과 함께 민노당의 대선 승리를 향해 더욱 힘차게 걸어 나가겠다.”
심상정 역시 당시 이소연이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인 자리를 고산에게 물려주며 했던 ‘멋지게 어시스트할 것’이라는 발언에 빗대, “민노당 승리를 위해 멋지게 어시스트 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들은 2007년 대선 이후, 계파 간 입장 차로 결국 분열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 잔류파와 진보신당으로 분당됐다. 노회찬은 탈당 의사를 밝히며 “NL은 지난 대선에서 노동자·서민이 내린 냉혹한 평가에 대해 ‘별로 반성할 게 없다’며 오만으로 화답했고, 당 기밀을 북측 관계자에게 전달한 행위를 제명하자는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도 부결시켰다”며 “2000년 1월 민노당을 창당하면서 국민께 약속한 진보정당은 오늘의 민노당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아래는 제5대 정의당 대표 김종철과의 16일 <시사오늘> 인터뷰 중 일부다.
“진보정당 역사에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2007년 분당 때로 가겠다. 워낙 계파 간 갈등이 극심하던 때다. 그때 슬기롭게 잘 넘겼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결국 누구 탓을 하겠나. 모두의 탓이었다.”
2007.10月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경선
대통합민주신당은 8월에 탄생했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이 탈당 후 다시 만든 정당이었다. 신당 창당에는 ‘빅3’ 중 한 명이었던 손학규가 참여했다. 7월 범여권 대선 유력 주자 6인이 연석회의를 열고, ‘단일경선·단일정당’에 합의한 결과였다. 이 자리엔 손학규를 비롯해, 전 열린우리당 의장 정동영, 전 국무총리 이해찬·한명숙, 천정배·김혁규 등이 참석했다.
범여권 대통합의 명목 하에 다양한 세력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 가운데 전 국무총리 고건, 서울대 총장 정운찬, 전 경기도지사 손학규, 유한킴벌리 대표 문국현 등이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들의 영입에 대해 여러 차례 우려를 표했다.
사실 인물만 보면 모두 능력 있는 분들이다. 그분들을 개별적으로 비판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선거, 정치에서 무엇이 본질적으로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른 분야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정치에 들어와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94쪽.
결국 민주신당의 경선엔 9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정동영, 손학규,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김두관, 추미애, 신기남, 천정배 등이다. 이 가운데 4인이 탈락하고 2인이 사퇴하며, 본선 경선 후보는 최종적으로 3명이 남았다. 손학규·정동영·이해찬이 그들이다.
경선 과정에서 정동영의 소위 ‘박스떼기·차떼기’ 의혹이 제기됐다. 손학규 측에서 제기한 의혹은 승합차(봉고차)를 이용한 선거인단 동원 의혹과 보은군청 소속 공무원 10명 선거인단 포함 의혹이었다. 이해찬 측은 보은·옥천 지역 군수 선거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민주신당 공정경선특위는 혐의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의혹을 입증할 물증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손학규·이해찬은 “의혹을 지을 수 없다”며 결과에 반발했다.
최종 결과 정동영이 43.8%로 민주신당의 대선 후보가 됐다. 손학규(34.8%)와 이해찬(22.2%)가 그 뒤를 이었다. 이후 손학규는 정동영 캠프의 중앙선거대책위원장직을 맡았다. 아래는 정동영의 수락 연설 중 일부다.
“창당 후 지난 두 달, 우리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 과정에서 상처도 생겼고, 분열도 생겼다. 그러나 이제 치유와 통합으로 가야 한다. 하나가 될 때만 승리의 가능성이 생긴다. 지난 1997년 김대중 후보와 2002년 노무현 후보가 들었던 승리의 깃발을 이제 정동영이 높이 들고 국민과 함께 승리하겠다.”
2007.11.07. 무소속 이회창 출마 선언
마지막으로 대선 출마를 알린 인물은 이회창이었다. 그는 2002년 대선에서 패배한 후 정치권을 떠났다. 그러나 출마 선언을 위해 한나라당을 탈당 후, 대권에 세 번째 도전했다.
그가 “당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면서도, 무소속 출마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회고록을 통해 후보로서 ‘법치주의 중요성’과 ‘대북정책 변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현실정치에서 나는 떠났고 나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현실정치의 상황을 보면서 누군가는 나서서 경고음을 울려 정치가 나갈 방향을 가리켜야 되는데 그것은 두 번이나 대선에 패배해 좌파 정권 시대를 열게 만든 장본인인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떨쳐져버릴 수 없었다. (중략) 결국 나는 경고음을 울리는 충격적인 방법으로 내가 다시 한 번 대선에 출마해 내 생각을 국민께 직접 호소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1144~1145쪽.(e북 기준)
그러나 그의 도전에 쏟아진 건 비판이었다. ‘대선 패배의 책임을 망각했다’는 지적부터 ‘노욕과 권력욕에 빠졌다’는 비난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출마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신념에 따라 행동을 했고 이로 인해 나의 명예와 평판에 손상을 입었다고 해도 이것은 내가 감당해야할 일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출마함으로써 내가 주장했던 쟁점 특히 대북 정책이 야당의 주요 담론으로 떠올랐고 이명박 후보도 북한체제의 개혁·개방을 강조하는 등 보수적 가치를 분명히 한 것은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회창 회고록 2권, 1150~1151쪽.(e북 기준)
2007.12.19. 제17대 대선
이변은 없었다. 한나라당 이명박이 48.7%로 당선됐다. 뒤를 이어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이 26.1%, 무소속 이회창이 15.1%를 차지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은 3.0%로, 창조한국당 문국현에 밀려 5위를 차지했다.
“노무현 때문에 이명박이 당선됐다”
참여정부의 실책은 다음 선거에서 ‘경제 대통령’을 꿈꾸게 했다. 이것이 현대 건설 CEO와 ‘경제 서울시장’을 지낸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부상한 이유다. MB는 대운하 건설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정책 수행을 ‘통치’가 아닌 ‘경영’의 관점에서 접근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새로운 정치를 하고자 노력했다. 3김 시대 대통령들처럼 제왕적 총재로서 당을 좌지우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가 통치’가 아닌 ‘국가 경영’의 입장에서 사안에 접근하려 애썼다.
(중략) 기성 정치인들의 입장에서는 내 그런 모습이 생소해 보였을 것이다. 언론은 내 그런 모습을 ‘정치력 부족’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 이명박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 102쪽.
한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제17대 대선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대통령 지지율 하락으로 여당 대선 주자가 불리했다는 비판에 “미안하고 할 말이 없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승리에 “패배는 쓰라리다”면서도, “선거에 사실상 여당 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17대 대통령 선거는 정당정치와 선거의 기본 원리가 다 무너진 선거였다. 노무현이 잘못해서 이명박 정권을 탄생시켰다는 비난을 숱하게 들었다. 대통령이 인기가 없으면 여당 후보가 불리하다는 상식에 비추어 옳은 비판이다. 미안하고 할 말이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 잘못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패배는 쓰라리다. 그러나 원칙을 잃은 패배는 더욱 쓰라리다.
(중략) 그 선거에는 사실상 여당 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참여정부의 공과를 다 책임지겠다는 후보가 아무도 없었다. 근거도 없는 ‘경제파탄론’ 앞에서 먼저 반성한다고 말해 버렸으니 무엇을 가지고 선거를 할 것인가. 원칙을 지키면서 패배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러나 원칙을 잃고 패배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94~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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