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명철 기자]
조선 숙종은 끊임없는 편가르기로 왕권강화를 추구한 군주다. 숙종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과 남인의 적대적 공존관계가 왕권 약화의 주범이라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환국’을 적절히 활용했다.
환국은 한 마디로 하루아침에 정권을 교체하는 친위쿠데타다. 최초의 환국은 경신환국이다. 숙종 즉위 초기 집권 세력은 남인이었다. 원래 남인은 아웃사이더였지만 숙종의 선대왕인 현종 시절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해 서인을 내쫓고 정권을 장악했다. 숙종은 득세한 남인을 제거해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빌미는 남인이 제공했다. 남인은 정권을 장악하자 권력욕에 빠져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분열됐다. 숙종에게는 남인 제거를 위한 좋은 명분이 됐다.
사건의 발단은 사소한 데서 발생했다. 1680년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이 있었다. 하필 이 연회에서 서인의 주요 인사들을 제거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다수의 서인이 불참했다. 하필 숙종은 그 날 비가 오자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을 하사하려고 했으나 이미 허적이 가져갔다. 숙종이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 숙종은 곧바로 서인 정권을 출범시키고 남인을 숙청했다,
하지만 이 일로 끝나지 않았다.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터졌다. 내용은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해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관련자 모두를 잔인한 고문 끝에 처형했다. 남인은 처절히 몰락했다. 서인의 세상이 펼쳐졌다.
하지만 서인은 숙종을 몰라도 한참 몰랐다. 숙종의 목적은 왕권강화였다. 다음 차례는 서인이었다. 기사환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숙종은 궁중 여인들의 암투도 정쟁에 끌어들였다. 희빈 장씨가 득세한 사건이다. 조선 최고 비련한 여인의 대명사인 인현왕후 민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일개 궁녀인 장씨가 왕자를 낳자 숙종은 중전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서인이 반발하자 기사환국을 일으켜 서인을 제거했다. 정권은 다시 남인으로 넘어갔다. 숙종은 레임체인지의 최종기획자였다.
권력을 되찾은 남인도 숙종의 속내를 헤아리지 못하고 장희빈의 치마폭에 휩싸여 권력의 달콤한 독에 빠져들었다. 숙종은 장희빈과 서인의 전횡에 염증을 느꼈고 서인은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운동을 지지하며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의 세상을 열어줬다. 역사는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고 기록했다.
숙종의 환국은 왕권강화를 위한 고육지책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욕을 지키기 위해 편가르기로 조선의 인재들을 희생시킨 비극이 환국이다. 물론 서인과 남인들도 권력의 덫에 빠진 정치꾼들이다. 또한 숙종의 권력욕에 제 목숨을 맡긴 장기판의 졸에 불과했다. 숙종에게는 남인과 서인이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편 만이 중요했다. 지나친 권력욕은 자신의 생명 단축을 재촉하는 시한폭탄이다.
현 여권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특유의 편 가르기로 위기 극복의 기회로 삼았다는 비판이 있다. 이를 위해 최근 심지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친일파와 결탁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현 여권이 재집권을 위한 최고의 아이콘은 편 가르기 분열이 아닌 국민통합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