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단임제, 노태우‧3김의 철저한 이해관계서 비롯”
“이원집정부제 가되 한국식 분권형 대통령제 모델로”
“법 전문 尹대통령, 7공화국 개헌하면 큰 업적 될 것”
“6월항쟁 성공 결정타, 국민 이끈 정치지도자들 때문”
“결국 먹고사는 문제…민생에 소홀하지 않아야 성공”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6월항쟁 무렵 최광웅 작가(<이기는 선거> 저자)는 감옥에 있었다. 그와 인터뷰 하게 되면 핵심이 될 만한 시사점들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모 출판사 대표의 추천이 있었다.
지난 3일 서울 회현역 부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대화를 나눠보니 인상적이었다. 6월항쟁의 한계를 설명하는 대목이 특히 끌어당겼다.
- 6월항쟁의 역사적 한계는 YS·DJ(김영삼·김대중) 양김의 단일화 실패로 보면 될까요? (이 질문을 했을 때다.)
“단일화가 안 된 것보다 시스템의 한계라 봐야죠.”
- 어떤 시스템의 한계를 말하나요.
“87체제를 말할 때 흔히들 낡은 체제라서 바꿔야 한다고 하잖아요. 핵심은 권력구조인데, 우리나라는 5년 단임제 아닙니까. 미국은 4년 중임제, 프랑스는 5년 중임제이죠. 선진국 중 단임제를 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한국식 분권형제로
왜 그렇게 됐을까.
“87년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도 있겠지만 더 큰 요인은 따로 있어요.”
- 어떤 점입니까.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4명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해야겠다는 암묵적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예요. 한 사람이 두 번씩 해버리면 4년 곱하기 2, 8년씩 다 하면 32년이 되잖아요? 다들 나이도 있는데 기회가 안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지 않겠어요. 두 번씩 하지 못하게 5년 단임제로 만든 겁니다. 철저히 권력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만들어진 기형적 구조인 거죠.
- 5년 단임제의 폐해가 지적되곤 합니다.
“실제로는 대통령이 2년 내지 3년밖에 힘을 못 써요. 남은 기간은 식물 대통령 아닙니까. 이런 대통령제는 하지 말아야죠.”
- 과제는 뭔가요.
“헌법을 바꿔야죠.”
- 정치권에 몸담은 분들은 많이들 내각제를 이야기합니다. 본인도 그런가요.
“개인적으로야 내각제를 선호하죠. 그렇지만 국민이 원하지 않잖아요.”
- 왜 그런다고 봅니까.
“오랜 왕조시대를 유지해온 잔재 의식을 떨치지 못해서라고 봐요. 300명한테 권력이 나눠지는 것보다 강력한 1인 통치 하에 있는 것에 더 안정감을 느끼는 거죠.”
- 대안으로 생각하는 권력구조는 뭔가요.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뽑되 내각제 요소를 가미한 이원집정부제가 괜찮아요. 하지만 프랑스식 분권형 대통령제는 우리와 맞지 않지요. 그곳은 야당이 다수당이 되면 대통령은 외교, 국방만 하고 내치는 야당이 총리를 맡는 방식이거든요. 대통령은 거의 허수아비나 다름없어요.”
시라크 정부 말기가 그랬다.
“97년 총선에서 야당이 압승해 조스팽 총리가 5년 동안 실권을 쥐면서 시라크 대통령은 힘을 아예 쓰지 못했지요.”
- 우리는 어떻게 가야 한다고 봅니까.
“한국식 분권형으로 가야 한다고 봐요. 총리는 국회 다수당에서 하되 대통령도 예산이나 지방자치 등 내치에도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일정하게 보장해 주는 방식이죠. 한국적 모델을 만들자는 겁니다. 우리 국민의 의식수준과 바람에 맞는 현실적으로 최적화된 구조라고 생각해요.”
- 윤석열 정부에서 개헌이 가능할까요.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야당이 중임제를 반대할 일도 없지요. 윤 대통령이 개헌에 성공한다면 역사적으로 7공화국을 만든 대통령이 되는 거예요.”
윤 대통령이 성공한다면 큰 족적이 될 듯싶다.
“역대 대통령마다 업적이 있어요.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정책, 김영삼 대통령은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김대중 대통령은 외환위기 극복과 남북 정상회담, 노무현 대통령은 개성공단,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이 있잖아요. 4대강은 임기 동안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지금은 썩 괜찮은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박근혜 대통령은 공무원 연금 개혁을 들 수 있어요. 굉장히 좋은 업적으로 평가받을 날이 올 거예요. 윤 대통령은 법 전문가잖아요. 법 관련된 일을 해야죠. 개헌 대통령이 되는 겁니다.”
이런 얘기들이 귀에 들어왔다.
6월항쟁이 있기까지, 무엇을 했을까.
이 질문을 하자,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1980년대를 돌이켰다. 건장했던 체격은 위암 수술을 받으면서 많이 야위었지만 혈색은 좋아 보였다. 재발되지 않도록 운동을 하면서 관리 중에 있다고 한다.
차츰 그의 목소리가 안내하는 곳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는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1980년대 속으로
데모하면 82학번이다. 최광웅도 82학번이다. 시골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했다.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사법경찰들이 학교에 상주했다. 82학번은 ‘똥파리’로 불렸다. 너도나도 감옥 대기조를 자처했다.
최광웅은 지하서클 멤버였다.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은 신입생 때 5·18 광주 참사를 다룬 영상을 보면서였다. 선배들은 후배들을 모아놓고 골방 같은 데에 데려갔다. 뭐 하나 보여줄게 있다면서 비디오테이프를 틀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저지른 참혹한 만행이 어두컴컴한 골방 안에 총질을 해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진실이다.’ 선배 중 누군가 말했다. 살아있는 게 미안했다. 부들부들 떨렸고 눈물이 났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지하서클에 들어갔다.
데모하러 가려는데 “광웅아. 너 이리 와 임마.” 누군가 불러댔다. 동네 형이었다. 그는 사복경찰이었다. 하필 이 학교에 배치됐다. “저기 가서 막걸리나 마시자.” 데모하지 못하게 하려고 술집으로 끌고 갔다.
맘대로 데모도 못하는 이상한 대학 생활이 펼쳐졌다. 안 되겠기에 사복경찰 형을 피해 야학 교사조에 들어갔다. 서클 선배 중 한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사정상 관두게 되면서 사람을 구하던 중이었다.
“제가 할게요.”
손을 들었다. 야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검정고시 반으로 나뉘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 야학반이 있던 성수동은 당시만 해도 5~10인 미만의 작은 공장들 천지였다. 시골에 올라와 공장부터 취업한 청년들은 학교를 다닐 형편이 못 됐다. 그들을 대상으로 검정고시 야간반을 운영했다. 노동운동에 필요한 일종의 의식화 교육도 병행했다.
그 시절엔 ‘공활’(공장활동)이란 게 있었다. 야학하는 학생들은 농활(농촌활동) 대신 공활을 했다. 최광웅도 공장에 들어갔다. 안양에 있던 자동차 부품 공장이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49제였던 3월 3일 안양에서도 노동자들끼리 모여 큰 규모의 시위를 했다. 그곳에서 경찰에 딱 붙잡혔다. 7개월가량 투옥됐다. 운동권 용어로 ‘쥐방울만큼’ 살다 왔다.
원래는 징역 4년이었다. 담당검사는 최광웅을 가리켜 안양 책임자로 지목했다. 시위 주동자로 보고 구형을 세게 선고했다. 최광웅은 당시를 말하면서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독립운동가들에게 징역 4년이나 구형한 적은 없었다고 부연했다.
에피소드라면, 참여정부 청와대 인사제도 비서관으로 재직할 당시 그 담당검사와 재회했다는 것이다. “검찰 법무부 인사 담당을 했는데 그때 보게 됐죠.” 나중에 검찰총장까지 지낸 임모 검사였다.
1심을 마치고 남부교도소에 들어갔다. 바깥이 시끌시끌했다. 운 좋게도 친구의 작은 아버지가 교도관이었다. 그에게 물으니 시청 앞으로 몇 십만 명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구나.” 최광웅은 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아 혁명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피 끓는 20대였다.
“알고 보니 그게 6월항쟁이더라고요.” 빙그레 웃음이 번져갔다. 6·29 선언이 있고 항소심이 열렸다. 재판관들은 적당히 알아서 풀어준다며 10월 말에 나가면 된다고 했다. 형식적인 재판만 하고 서둘러 종료했다. 민주화가 온 것을 실감했다.
구속됐을 때는 3학년 신분이었지만 풀려났을 당시는 학교에서 자동 제적이 된 상태였다. 최광웅은 공장으로 복귀해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13대 대선이 치러졌다. 양김 단일화가 최대 이슈였다. 후보단일화 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양김이 분열하면서 그해 대선은 허무한 결과로 끝이 났다.
시간이 지나 노태우 정부도 말기를 향해갔다. 그때까지 그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하루는, 1989년 11월 말이었던 거로 기억된다. 안기부 요원들이 찾아와 자취방을 덮쳤다. 다짜고짜 승용차로 끌고 갔다. 강제로 머리부터 쑤셔 넣고 뒷좌석에 태웠다. 한참을 달리더니 내린 곳은 남산 지하실.
“박노해 어딨어?” 험상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른다”고 하자 보름간을 두들겨 패고 고문을 가해댔다. 경기도 등지에서 활동하며 사노맹 소속이던 박노해는 수배를 당하던 중이었다. 최광웅은 박노해와 일면식도 없었다. 안양지역 내 주요 활동가 명단에 올라 있다 보니 안기부에서 찔러보기부터 한 거였다. 소득이 없자 자취방을 뒤져 여러 책들을 가져왔다. 자술서를 쓰게 했다.
“그것 가지고 기소하는 것도 창피한 일이니까 보름 후에 집에 돌려보내더라고요.” 억울한 일에 휘말려 고초를 겪으니 분하고 복장이 터질 일이건만 담담히 말했다. “근데 좀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이 말만 대신했다. 초연하게 느껴졌다. 세월은 감정의 칼날을 무디게 한다.
공장에서 정치권으로
공교롭게도 그 일로 최광웅은 정치권에 들어서게 됐다고 술회했다. 안기부에서 계속 감시할 것만 같은 생각에 다니던 공장도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였다. 두 달쯤 지났는데 정치권의 3당합당 소식이 전해졌다.
반대한 사람들은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기택, 노무현, 장석화, 김광일 등이었다. 이들은 꼬마민주당을 만들었다. 누군가 거기서 사람을 뽑는다고 말해줬다. 안기부 때문에 불안하던 차에 일 년 정도 들어가 신분세탁을 하자 싶어 지원했다.
민주당 사무처에 들어갔다. 잠시 피신할 생각으로 임하게 된 거였지만 이후 정당 사무처, 국회 비서관, 서울시의원, 청와대 실무진을 거쳐왔다. 지금은 데이터분석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이니 누구든 앞일은 알 수 없다.
꼬마민주당 시절 가장 영향을 준 인물은 누구일까. 유인태 전 국회의원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유 전 의원은 당무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정국을 꿰뚫는 혜안이 남다르다고 생각됐다. 정무 전략 쪽으로 머리가 비상하다고 느꼈다.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최광웅한테는 유인태 전 의원이 그런 인물인 듯했다. 같이 일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했다.
- 예컨대 어떤 점을 배웠나요.
“꼬마민주당이 91년 지방선거에서는 성적이 신통치 않았거든요. 언론에서는 꼬마민주당이 나서면 야권이 분열돼 신민주연합당(평민당 후신)의 표를 많이 깎아먹을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실제는 달랐어요. 민자당 표를 더 많이 깎아먹었죠. 그런 것을 지적했던 분이 유인태 전 의원이었어요.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지점을 보는 분이에요.”
민자당은 3당합당 이후 거대 정당이 됐음에도 정당득표율 40%에 그쳤다. 당초 규모를 생각하면 70% 넘는 정당득표율을 해야 맞겠지만 꼬마민주당에 표를 뺏겨 이득을 보지 못했다.
최광웅은 2016년 총선 또한 비슷한 작동으로 전개된 점을 상기했다.
“그때도 국민의당이 출현해 새누리당 표를 깎아먹었잖아요. 이런 논리를 유인태 전 의원한테 배웠지요.”
14대 국회가 되면서 유인태 의원의 비서관을 맡았다. 이후 정무 전략 분야에 심취해 집중 파고들었다. 선거 연구에 필요한 AI, 블록체인 등도 섭렵했다. 책도 여러 권 썼다. 가장 최근에 쓴 <이기는 선거>는 온갖 데이터들로 무장하고 있다. 국내외 선거 데이터들을 기초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서술하는 과정이 촘촘하고 디테일하다는 평가다. 데이터정경연구원을 운영하는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2016년 총선에서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비공식적으로 도왔다. ‘호남의 사위 안철수’ 전략을 제안했다. 부인 김미경 교수는 전남 여수가 고향이다. 유권자는 정서에 약하다는 것이 평소 지론 중 하나였다. ‘호남의 사위’라는 슬로건으로 정서를 자극하자는 전략이다.
- 안철수 대표의 반응은 어땠나요.
“처음엔 정색했어요. 자신은 중도층을 대표하는 사람인데 ‘호남의 사위’는 본인 이미지와 맞지 않다면서요. 거절당했나 싶었는데 다시 연락이 오더라고요.”
- 누가 설득했나 보죠? 김미경 교수일까요.
“김미경 교수가 정무 감각이 더 좋아요.”
윤석열 대통령 부부도 김건희 여사가 정무감각이 더 좋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사실상 정치적 파트너, 동지네요.
“그렇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 캠프에 있은 적도 있다. 실명은 거론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유력 정치인으로부터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조건을 하나 걸었다. 일할 때 동료로 대해달라고 말했다. 그 대선주자도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왕처럼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일로 캠프 밖을 나왔다고 했다.
2022년 대선 때는 윤석열 대통령을 도왔다. 직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철수 후보와의 연대는 기본,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끝까지 완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봤다. 여기까지는 그의 전략대로 됐지만, 집권 후 제안한 플랜은 사장됐다. 윤 후보 측에 정의당과의 정책연대를 통해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하야 한다고 제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권교체 당한 정부의 공통점
22대 총선은 친구인 함운경 마포을 후보를 도왔다.
- 함 후보는 당시 누가 영입했던 건가요.
“엄밀히 따지면 윤석열 대통령이죠.”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반문 노선의 함 후보를 만나 의기투합한 바 있다. 이철규 전 인재영입위원장이 공을 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 함 후보 같은 스피커들은 지역에 출마하지 않고 비례대표로 나갔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아쉽습니다.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당에서 수도권에 출마할 이들이 없다고 해서 결심하게 된 거죠.”
-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한 이유는 뭐로 보나요.
“먹고사는 문제에 답이 있어요. 물가가 높은데 대파 논란이 있었잖아요? 586 운동권 청산이 아니라 민생을 들고나왔어야죠.”
- 586 운동권 특권의식 청산이 오히려 세대 갈라치기처럼 돼버린 것 같더라고요. 그 시대 향수를 가진 이들이 많은데 특정 세대 전체에 거부감을 들게 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처음엔 운동권 특권정치 청산, 나중엔 이조심판 이 두 가지를 내세웠죠. 그런데 이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고 저도 여러 경로를 통해 얘기했어요.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참 답답하더라고요.”
- 공천을 잘 못해서 실패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어떻게 봅니까.
“그런 것들은 별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민주당이 이긴 게 공천을 잘해서인가요? 그래서 선거를 바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 총선은 지역 선거라서 수도권 같은 험지는 낙하산이 아닌 지역 관리를 잘해온 후보에게 공천을 줘야 한다고 하잖아요.
“지엽적인 문제죠. 1996년 15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 모두 여당이 선전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두 번 다 경제사정이 좋았어요.”
- 결국 민생이다?
“정권을 뺏겼을 때는 모두 민생에 소홀했을 때예요. 세금을 과다 부과했을 때죠. 거꾸로 한번 볼게요.”
차근차근 설명해나갔다.
“정권교체를 당한 문재인 정부는 81만 개 일자리 창출한다면서 공공부문을 팽창시켜버렸어요. 공공부문 확대는 세금을 더 걷는다는 얘기잖아요. 종부세를 올렸죠. 중산층 이반까지 두드러졌어요. 박근혜 정부는 서민들이 애용하는 담배세를 올려버렸죠. 노무현 정부는 공시지가 기준으로 땅값이 1400조 원에서 2900조 원으 폭등하는 등 엉망이었는데도 철저히 먹고사는 문제를 도외시했어요. 김수현 당시 국민경제비서관이 규제 일변도의 정책을 밀어붙였죠. 민생 못 챙기고 세금 과다 부과한 정부는 망하게 돼 있어요.”
- 다음 대선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유력해졌다는 전망이 나옵니다. 경제면에서 좀 나아질까요?
“이재명 대표가 된다면, 대한민국 경제는 문재인 정부 때보다 더 어려워질 겁니다.”
이 대표가 차기에 유력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고 이 말만 했다. 그는 오랫동안 민주당에 몸담고 있었지만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지나친 좌클릭에 진영을 넘어서게 됐다. 문 정부 때는 자칫 베네수엘라처럼 될 수 있다며 경제정책 관련 비판을 많이 했다. 그것이 우클릭하게 된 이유인 듯 보였다.
- 선거 지형이 크게는 보수당 우위에서 민주당 우위로 바뀌었다고들 하잖아요.
“나는 보수의 파이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좌우가 한번은 지고 한번은 이기는 형태로 갈 거로 봐요.”
- 2년 뒤 지방선거가 있습니다. 야당은 이재명, 조국 대표 체제 중심으로 가겠지만 국민의힘은 안갯속 같은데 어떻게 전망합니까.
“지방선거 입후보자들이 누구를 원하겠어요. 2년 안에 새로운 인물이 나오기는 어려워요. 한동훈 대표 체제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 나경원 의원이 유력하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나경원 간판’으로 선거 치를 수 있겠어요?”
- 장기적으로 가기 어렵다는 관측이 있기는 합니다.
“1년 뒤 또 비대위로 가요? 그 당은 매번 비대위만 합니까. 그렇게 안정이 안 돼서 되겠어요.”
- 오세훈, 원희룡, 홍준표, 안철수 같은 주자들도 지방선거의 간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려워요. 국민의힘에 실제 인물이 없어요. 그나마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이 나아요.”
- 결국 당대표가 될 거로 전망하는 거네요.
“그 외에 대안이 없으니까요. 홍준표 대구시장도 한 전 위원장을 잠재적 경쟁자로 보니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 아니겠어요?”
- 내공을 더 많이 쌓아야 한다는 지적이 있잖습니까.
“현실 정치하면서 부딪쳐가며 내공을 쌓는 것이지, 어디 틀어박혀 공부한다고 되나요.”
-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요.
“한 전 위원장은 고생을 안 해본 사람이잖아요. 지도자가 되려면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해요. 민심투어 같은 보여주기식이 아닌 비공개 루트를 통해서라도 청소부나 건설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군을 만나는 겁니다. 서민의 삶과 애환, 고충을 들으면서 그 속에서 민생을 해결할 답을 찾고 이해의 폭을 넓히면 좋을 것 같아요.”
6월항쟁 성공의 결정타
인터뷰 후반부는 이런 대화들로 채워졌다. 갈무리할 겸 다시 6월항쟁 얘기로 돌아왔다.
- 성공의 결정타로 주목하는 것은 뭔가요.
“국민들이 나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정치적 리더들의 역할론에 주목합니다. 86운동권 세대에서 보면 학생들이 나서서 6월항쟁을 이끌었다면서 주제넘게 얘기하잖아요. 돌이켜보면 전혀 아니올시다, 이겁니다. 물론 세계 혁명사를 봐도 처음 불을 붙인 것은 학생이나 지식인, 노동자 등 다양한 세력들일 수 있죠.
하지만 결국 혁명이 성공하려면 시민이 나서지 않으면 어려워요.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우리나라 4‧19혁명처럼 말예요. 6월항쟁도 혁명이라고는 안 하지만 성공한 운동이잖아요. 국민들이 나섰기 때문에 성공한 건데 그 의미가 뭐냐….”
방점을 찍듯 침을 넘기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정치적 리더들이 있었기에 국민이 같이 나설 수 있던 거예요. 그것을 학생들이 할 수 있겠어요? 어림도 없어요. 김영삼‧김대중 양김과 같은 정치적 경험이 있는 리더들이 그 역할을 한 거였죠.”
- 20대 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못 했지요?
“그렇죠. 그때는 개무시했죠. 양김을 부르주아로 취급하던 때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보니 그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정치적 경험을 가지고 리드를 한 주역들이었어요. 우리야 혁명을 꿈꿨죠. 혁명이라는 것은 단계를 밟지 않고 한방에 가는 거거든요. 정치적 리더들은 보수적으로 접근해요. 스텝 바이 스텝, 단계적으로 가자는 것이죠. 그래야 국민들이 따라줄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 비전을 제시한 야당 지도자들한테 국민이 손을 들어줘 성공한 것이 6월항쟁이었던 겁니다.”
그는 “세계사적으로 봐도 프랑스 6‧8혁명 또한 학생들이 먼저 데모하기 시작했지만 정치지도자들이 이끌어줘 성공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 요즘은 뭘 하나요.
“책을 씁니다.”
거의 다 써간다고 한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정치 분석 관련 책이 아닐까 싶었다. 우선 그의 책인 <이기는 선거>부터 제대로 읽겠다고 했다. 그 뒤 또 만나고 싶다.
P.S. 요약하면 87년 6·10항쟁 되짚기 19번째는 당대 학생운동을 했던 최광웅 작가의 6월항쟁의 과제로 지목되는 7공화국 개헌 제언이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 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이명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알린 특종기자의 투쟁기(이부영),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성공의 결정타(이재오), YS총선 참여, 6·10항쟁의 동력(이성헌), 언론인으로서 바라본 6월항쟁(최문순), 넥타이 부대의 참여 계기(최재호), 6월항쟁 시발전 5·3사태(장기표), 직선제 개헌의 의의(신평), 세계사적 의의(임혁백), 진짜 주역 YS(인명진, 민경우)에 이어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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