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호성 알앤비리서치 연구소장]
“이재용 회장 집이 있는 이태원이 아니라 000이 있는 서초로 가서 데모해야 효과가 있다. 서초로 가자.”
지난 5월, ‘삼성 위기’의 본질인 이재용 리더십 부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1969년 삼성 창사 이래 최초로 설립된 노조원들은 “이재용은 바지사장”이라면서 이재용 회장 집 대신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이 있는 서초사옥에서 농성을 이어갔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그룹의 중대 결정권이 실질적으로 어디에서 나오는지 조직 구성원인 직원들은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삼성, 허약한 반도체 공룡”...‘맥쿼리의 저주’가 현실로
삼성의 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위기는 혼자 오지 않고 복합적으로 밀려오고 있다. 최초의 불을 지핀 것은 해외 투자은행(IB) 맥쿼리(MacQuarrie)의 비관적인 보고서였다.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엔비디아 품질테스트 통과가 늦어지고 있으며 파운드리 분야 부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점을 주요인으로 꼽았다. 삼성전자를 ‘허약한 반도체 거인’으로 표현하면서 목표 주가를 12만 5천 원에서 반 토막인 6만 4천 원으로 낮췄다. 먼저 반응한 것은 주식시장이었다. ‘10만 전자’가 ‘5만 전자’로 반 토막으로 주저앉았다. ‘맥쿼리의 저주’가 현실화한 것이다.
지난 10월 8일에는 3분기 잠정 영업이익이 어닝쇼크(Earning Shock)를 기록한 것과 관련하여 삼성의 경영진은 성과 부진으로 기술경쟁력, 삼성 위기론이 불거졌다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총수 이재용의 입에서는 위기를 인정하는 발언이 나왔다.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연속 일어나고 있다. 향후 시장을 주도할 HBM 기술경쟁력 추락으로 인한 계속된 엔비디아 납품 지연이 인화성 물질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면,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뺏기면서 위기론은 한껏 증폭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SK하이닉스는 AI가 활성화하기 이전부터 성장 가능성을 크게 전망하고 HBM 연구개발에 집중해 왔지만, 같은 기간 삼성전자는 이를 과소평가하면서 오히려 HBM 연구 조직을 축소하는 결정까지 하였다. 이로써 2019년은 HBM이 사업성이 없다고 오판한 결정으로 삼성전자의 치명적인 흑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는 한 해로 기록된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1위 업체인 대만의 TSMC의 시장 점유율 60%에 비해 10%의 시장 점유율로 큰 차이로 뒤처진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영영 굳혀지거나 심지어 더 악화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D램 기술에서는 SK하이닉스에 뒤처지고 있는 가운데 파운드리에서 올해 조 단위 적자가 예상된다. 메모리반도체에서는 지난해 이미 15조 원의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단순히 저조한 실적 때문만이 아니다. 심지어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일부 공장의 가동 중단 등의 악재로 평택시의 지역경제와 부동산시장도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올 2월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3월에는 SK하이닉스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HBM3E를 양산한다고 발표할 때 삼성전자가 HBM3E에 대한 엔비디아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지난 5월 24일 로이터 통신에 의해 보도되었다. HBM3와 업그레이드 버전인 HBM3E 칩에 대해 엔비디아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테스트 실패 결과가 4월에 나왔다고 덧붙였다. 하필이면 SK하이닉스에서 통상 영업 기밀에 속하는 HBM3E의 수율이 80%에 육박한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다음 날 터진 것이다. 또 이날은 삼성 노조가 서초사옥 앞에서 소위 대규모 신고식을 하면서 선대 때부터 경영 기조로 삼았던 ‘무노조 경영신화’가 깨진 날이기도 하다.
2019년경에는 개발부서 직원들을 중심으로 HBM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김기남 당시 삼성전자 DS(반도체) 부분장이 지금 안 해도 된다고 하면서 오히려 사업을 축소 해버렸다. 이에 실망한 인력들이 경쟁업체로 넘어가면서 SK하이닉스가 개발에 성공했다는 말까지 업계에서는 나오고 있다. HBM 늑장 개발로 인한 삼성 위기의 진원지인 김기남 부분장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책임은커녕 퇴직금 130억 원에 총 172억 원의 보수를 받고 지금은 상임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다.
차세대 HBM 주도권 뺏기고 30년 1위 메모리도 위험신호
최근에는 미국 상무부가 홈페이지를 통해 첨단 반도체 및 AI 핵심 부품에 중국 접근을 제한하는 새로운 규제안을 발표했는데, HBM의 중국 수출 규제 대상에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포함되었다고 12월 2일 외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더구나 일본은 규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현재 HBM은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미국의 마이크로칩테크놀로지 3개사가 ‘3국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으로 SK하이닉스는 미국에만 수출하고 있어 수출 전선에 이상이 없는 데, 중국 비중이 큰 삼성전자는 타격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다.
삼성전자의 2024년 9월 말 기준 현금성 자산 보유액이 2023년보다 24.5% 증가한 103조억 원(723억 달러)을 넘어서, 인텔 113억 달러(2024년 상반기), TSMC 596억 달러(2024년 9월)에 비하면 우량하다는 점을 들어 위기론의 실체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기술력 부문의 경쟁력 우위가 확고하고 추격하는 중국은 저가 부분에 한정되어 있어 ‘삼성 위기론’은 한쪽만 보는 단견이라고도 한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는 엔비디아와의 최종 테스트가 결정된 것이 아니고 순조롭게 진행 중이며 시험 과정도 거의 끝물에 와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또 AI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달로 인한 처리 속도에 대한 수요 증가로 향후 계속 진화할 HBM4, HBM5 등으로 이어지는 개발에서는 그동안 쌓아온 삼성의 저력이 발휘될 것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1~3단계는 늦었으나 바로 4단계로 퀀텀 점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의 평가는 다르다. HBM 분문에서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AI가속기에 HBM3를 공급함으로써 삼성전자를 완전히 누르고 삼성에 굴욕을 주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더구나 최첨단 기술 분야에서 몇 개월에서 1~2년 뒤처진다는 것은 일반적인 시간개념으로는 천지가 바뀌는 기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외면한 넋두리에 불과하다. 4단계로 퀀텀 점프론도 이미 기초 자체가 허물어져 있어서 이마저도 쉽지 않다는 지적이 강하다. 오히려 30년 1위를 지켜온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도 주도권을 뺏기고 있다는 우려마저 커지고 있다.
중국의 추월도 무시 못 할 위기 요인이라는 지적이 크다. 반도체 역사를 가장 잘 풀어 썼다는 ‘칩 위(Chip War)-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의 저자 크리스 밀러 (Chris Miller) 美 터프츠대 교수의 지적은 그 권위만큼이나 무겁게 다가오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중국은 한국 회사가 만든 메모리를 수입해 썼죠. 머지않은 미래에는 한국이 중국산 칩을 사게 될 수 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메모리에서도 별 경쟁력이 없었다. 하지만 막대한 돈을 투자해 지금은 D램과 낸드에서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실질적 위협이 되고 있다. 5년 후에도 최첨단 인공지능(AI) 칩을 주도하는 나라가 어디냐 묻는다면, 여전히 대만일 것이라고 답하겠다.” 12월 2일 크리스 밀러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한 조선일보 오로라 특파원은 여기에 “실제 한국 기업들은 예전 ‘캐시 카우’(확실히 돈벌이가 되는) 역할을 하던 레거시 반도체에서 중국에 시장을 빼앗겨 큰 타격을 받고 있다.”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성장, 기술쪽 무시 재무, 법무쪽 패권 장악…혁신 생태계 실종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위기가 심각한 것은, 수많은 난관을 헤쳐나왔던 삼성의 리더십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창업주 이병철과 2대 이건희로 이어지는 절실함과 강단 있는 리더십이 실종되었다는 지적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재용은 허수아비 바지사장”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자체가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웅변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제일 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사건 이후 이재용 회장이 그룹경영을 책임진 게 10년이 다 되는 동안 이렇다 할 성과나 리더십을 보여 주지 못한 것은 물론 뚜렷한 미래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사법 리스크만을 탓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주어졌다는 지적이 따른다. 이재용 회장이 댄디하고 부드럽고 사람만 좋았지 경영 철학 무엇인지 나타난 게 없고, 그러다 보니 투자에 대한 결단력도 없다는 평가다. 재벌 3세인 이재용 회장 대에 와서 이전에 보여 주었던 삼성 특유의 빠른 결단력과 과감한 투자 결정 시스템이 약화하였고 변화, 혁신, 도전보다는 현상 안주 분위기가 조직 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사실 삼성 위기론은 올해 초부터 솔솔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재용 회장은 대외적으로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대내적으로 어떤 위기 신호를 냈다는 징후도 없었다. 삼성에는 복지부동의 관료주의가 짙게 누르고 있다는 하소연은 새삼스러운 뉴스거리도 아니다. 형식주의, 서류 주의, 무사고 보신주의로 대변되는 관료주의에 빗대 ‘삼료주의’라는 말이 내부에서 볼멘소리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삼성 임직원은 공무원에 빗대어 ‘삼무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선언 이후 1995년부터는 성장 주도형 인재를 경영 이선으로 빼내고 관리형 인재를 대폭 전진 배치하면서 IMF 외환위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한 사례로 평가받았는데, 이제는 그 같은 흐름이 오히려 혁신과 창조적 파괴에 걸림돌이 되는 조직문화를 만들었다. 보고 라인도 길어지고 의사결정도 느려졌다는 얘기가 내부로부터 나오고 있다. 삼성의 도전 정신과 혁신 문화 생태계가 사라지면서 사고 안 나는 무사안일주의로 흐르고 회사의 주요 보직을 기술 쪽보다는 재무나 법무 라인이 꿰차고 힘의 기울기도 강해지는 악순환이 고착되고 관료주의는 더욱 가속화 하고 있다.
이런 사내 분위기와 부서 간 협업체계도 잘 안되고 기술 쪽에 문제가 생겨도 숨기고 덮는 데만 급급해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조직문화가 위기를 더 곪게 만든다는 진단이다. 강박증에 가까운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실패하면 상부에 찍힐까 봐 무서워하는 기업문화가 짓누르고 있다고 한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도전도 안 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무난함으로 귀결된다. 선택과 집중 없이 시중에서 거론되는 이거저거를 골고루 다 한다. 괜히 어느 걸 빼놨다가 경쟁사가 가로채면 난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글로벌 헤지펀드에 의한 경영권 탈취 음모론도 떠돌고 있다. 근거도 희박한 이런 허접한 음모론에 분위기가 휘저어질 만큼 삼성의 체력이 허약해졌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은 있다. 한때 세계시장을 주름잡았던 소니, 노키아, 코닥도 영광은 사라졌다. 노키아는 2006년 매출이 핀란드 정부 예산보다 높았고 핀란드 GDP의 4분 1을 담당할 정도였다. 소니는 1980년~1990년대 세계 최강의 전자산업을 이끄는 ‘메이드 인 재팬’의 상징이었고, 1880년 창업한 미국의 코닥도 요즘 얘기로 하면 시대를 선도한 혁신 기업이었다. 그러나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도 변화와 혁신에 둔감해지고 레거시 제품에 의존하는 현실 안주의 끝은 거대 공룡의 침몰로 이어진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1위 기업 삼성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지적이 무겁게 다가오는 시국이다. 삼성의 위기는 한국이 일본과 같이 '잃어버린 30년'의 입구로 들어가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왜 HBM인가? AI에 없으면 안 될 핵심기술이기 때문
HBM은 생성형 AI 인공지능에 필요한 대규모 연산을 지원하는 필수 부품으로 여러 개의 D램을 옆으로 늘려 놓지 않고 수직 쌓아 올려 만들어 전송속도를 극대화한 고성능 메모리다. 인공지능 학습이나 추론용 반도체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 부품이다. 엔비디아는 인공지능 반도체 분야 시장 점유율에서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2023년도 전 세계 반도체기업 매출 1위 기업으로 최대 수요처이다. AMD, 인텔 등의 수요도 증가하고 있으며 구글, AWS 등 클라우드 서비스업체도 HBM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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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성은…
프로야구단 히어로즈 대외협력본부장과 이준열사순국백주년사업회에서 사무총장을 거쳐 국회의원 수석보좌관, 서울시부시장 정무특보를 역임하고 서울메트로환경에서 이사회 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현재는 <알앤비리서치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