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개표조차 되지 못한 채 폐기됐습니다. 국회는 지난 7일 본회의를 열고 윤 대통령 탄핵안을 상정했으나, 안철수·김예지·김상욱 의원을 제외한 국민의힘 의원 전원이 표결에 불참하면서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이에 따라 탄핵안은 자동 폐기됐고, 윤 대통령도 자리를 지키게 됐습니다.
사실 윤 대통령 탄핵안 부결은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후 보수가 궤멸 상태에 놓였던 게 불과 8년 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8년 전 이맘때쯤, 대한민국은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탄핵 정국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보수의 성지’ 대구·경북에서조차 탄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고,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여론조사 결과도 그랬습니다. 8년 전인 2016년 12월 8일,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의뢰로 5~6일 이틀 간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947명(무선 85%·유선 15% 자동응답방식,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0%포인트, 응답률은 13.3%,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게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응답자는 78.2%였습니다. 반대는 16.8%에 불과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여당인 새누리당에서도 비박(비박근혜)계를 중심으로 박 대통령 탄핵에 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 나왔습니다. 결국 김무성·유승민 전 의원 등을 비롯한 60여 명의 의원들은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고, 박 대통령 탄핵안은 재석의원 299명 중 찬성 234명, 반대 56명으로 국회를 통과합니다. 당시 원내 제1당이 128석의 새누리당이었으니, 박 대통령 탄핵을 성사시킨 건 비박계 의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대통령이 탄핵되자 더 이상 친박(친박근혜)계와 비박계의 오월동주(吳越同舟)는 불가능해졌습니다. 친박계 입장에선 비박계가 야당과 한통속이 돼 대통령을 몰아낸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계속 같은 배를 탈 수 있을 리 만무했죠. 박 대통령 탄핵을 놓고 의견이 갈라진 순간부터, 새누리당의 분당(分黨) 시계는 이미 흐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보수는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양분되고 맙니다.
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의 분당은 양쪽에 모두 최악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우선 한국당에는 ‘극우정당’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국민의 78%가 찬성한 탄핵에 반대하다 보니 중도보수 유권자들이 등을 돌렸고, 중도보수 유권자들이 빠져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강성보수가 ‘주류’로 올라섰기 때문입니다. 중도층이 이탈하자 강성보수의 주장이 강해지고, 강성보수 색채가 강해지자 중도층이 더더욱 멀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됐던 겁니다.
강성보수가 당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한국당 정치인들도 그에 맞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대권주자급 정치인들이 극우 시민단체가 주최하는 집회에 모습을 드러냈고, 전당대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정치인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이럴수록 중도층은 더더욱 한국당에서 등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한국당은 이전의 ‘세련미’를 잃은 ‘극우정당’으로 인식됐죠.
바른정당은 허무하게 주저앉았습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대권 레이스에서 중도 하차하면서, 바른정당은 일순간 ‘수권정당’ 지위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우리나라 같은 사실상의 양당제 국가에서 정권을 잡을 수 없는 정당에게 표를 던지는 유권자는 드뭅니다. 이렇게 바른정당은 존재감을 잃었고, 중도보수를 지향했던 정치인들은 모두 백기를 들고 한국당으로 복귀했습니다.
‘보수 적통 경쟁’에서 패한 채 한국당으로 복귀한 이들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일단 당내에서 지지를 받고 공천을 받아야 부활이 가능한데, ‘배신자’라는 꼬리표를 달았으니 당내 경쟁에서 이길 도리가 없었죠. 박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던 김무성·유승민 전 의원 등은 ‘유력 대권주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완전히 입지를 상실했습니다. 박 대통령 탄핵은 반대파에게는 ‘극우’, 찬성파에게는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결과를 낳았던 겁니다.
이런 기억이 생생한 국민의힘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찬성표를 던지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예상이었고, 실제 결과도 그랬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던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고난의 길을 걷고, 보수정당이 붕괴되는 모습을 본 국민의힘 의원들로서는 탄핵에 찬성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죠. 박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학습효과’가 윤 대통령 탄핵을 막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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