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기자회견에서 특정 정당 지지 유도 발언
헌정사상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유경민 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초부터 시련을 겪었다.
시작은 불법 대북송금 사건이었다. 국민의 정부 말기, 한나라당은 대북 비밀송금 의혹을 제기하면서 진상 규명을 위한 특검을 요구했다. 2003년 2월엔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당 의원들이 전원 불참한 가운데 한나라당과 자민련 주도로 특검법이 국회를 통과됐다. 그런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특검법을 수용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등을 졌다. 이에 동교동계를 비롯한 반노 세력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이는 후에 호남 세력과 친노 세력이 분열하는 씨앗이 됐다.
이라크 파병 문제도 뜨거운 감자였다. 이 문제는 보수와 진보의 대결 양상으로 전개됐다. 보수 세력은 현실적으로 미국의 요구에 불응하는 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진보 세력들은 이라크전이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을 “국익 차원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사안”이라고 말해 진보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북송금 특검 수용에 이은 이라크 파병 결정은 노 대통령 지지층 상당수가 등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런 가운데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의 대선 자금을 관리했던 안희정과 최도술이 사법 처리됐고,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대선 때 우리가 쓴 불법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할 용의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 씨의 땅 투기 의혹까지 불거졌다.
한편, 민주당 내부에서는 신당 논란으로 신경전이 벌어졌다. 대선 과정에서부터 친노와 반노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참여정부 출범 후 두 세력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친노 세력은 “지역감정을 극복하겠다”며 신당을 창당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노 측은 “신당 창당은 배신행위”라고 비판했다. 심지어 신당 창당 문제를 두고 당무회의장에서 폭력 사태까지 일어났을 정도였다.
민주당의 내분은 날이 갈수록 극단으로 치달았다. 결국 친노 세력은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신당에는 한나라당 의원과 개혁파 일부도 합류했다. 그렇게 민주당은 둘로 갈라졌고, 친노 세력은 2003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반노 세력에게 ‘기회’가 될 수 있는 발언이 나왔다. 2004년 2월 24일,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1주년을 맞아 열린 방송기자클럽 초청 기자회견에서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한다”며 “대통령이 잘해서 열린우리당에 표를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두고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국민을 겁박해 특정 정당 지지를 유도하고 공무원의 선거 중립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탄핵 사유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중앙선관위도 노 대통령의 발언이 “공무원의 선거 중립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며 선거 중립 의무를 준수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청와대는 “일단 헌법기관인 중앙선관위의 결정을 존중하되 이번 결정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 때부터 ‘탄핵 시계’가 빠르게 돌아갔다. 사실 민주당도 한나라당도 노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통령을 당선시켰음에도 열린우리당 분당으로 인해 제2야당으로 전락했고, 한나라당은 두 번 연속 정권을 빼앗기며 약이 오른 상태였다. 제17대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정치적으로도 효용성 있는 카드였다. 이에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본격적으로 탄핵 로드맵을 그리기 시작했다.
2004년 3월 5일, 민주당 소속 조순형 대표는 공식적으로 탄핵 이야기를 꺼냈다. 조 대표는 “오는 7일까지 선거 중립의무 위반과 본인 및 측근 비리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 않을 경우 8일 탄핵소추안을 발의하겠다”며 조건부 탄핵 발의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청와대는 “부당한 정치적·정략적 압력과 횡포에 굴복할 수 없다”고 거부의 뜻을 내비쳤다. 한나라당도 3월 7일 노 대통령을 향해 ‘재발 방지’ 약속을 강력히 촉구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탄핵 사유에 굴복할 수 없다”며 이마저 거부했다. 사과와 맞바꾼 탄핵이었다.
3월 9일. 한나라당 의원 108명, 민주당 소속 의원 51명 총 159명이 대통령 탄핵촉구안을 발의했다. ‘탄핵 5인방’이라고 불리는 한나라당의 최병렬 대표와 홍사덕 원내총무, 새천년민주당의 조순형 대표, 유용태 원내총무, 그리고 박관용 국회의장이 이 과정을 주도했다. 자민련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다시 한 번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3월11일,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잘못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시끄러우니 사과하고 넘어가자, 그래서 탄핵 모면하자, 이렇게 하라는 것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하며 사과 요구를 재차 거부했다.
또한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이 노 대통령 둘째 형인 노건평 씨에게 3000만 원을 건넸다는 의혹에 대해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한 분들이 시골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언급했다.
이 회견 이후 남상국 사장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노무현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을 듣고 모든 책임을 지고 한강변에서 자살하겠다”고 말한 후 한남대교 남단에서 투신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탄핵에 반대하던 자민련이 자유투표로 당론을 선회하면서 탄핵안 가결이 불가피해졌다.
3월 12일.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단상을 점거하고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박관용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해 여당 의원들을 끌어내리고 본회의를 개회했다. 결국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 소속 의원들이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총 투표수 195표 중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가결된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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