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27 월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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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개헌, 쓸모없는 일… 시대적 변화 이끌 지도자 필요”
남재희 전 장관
“‘술친구’도 잡아가던 유신 정권, 개헌 주장에도 살아남아”
“차지철, 깡패 같아…박정희 재혼했다면 역사 달라졌을 것”
“전두환, 비판할 점 많지만 리더십 있었다…노태우는 무능”
“YS 지지는 ‘군·민 파트너십’에 대한 나만의 철학 따른 것”
2016년 07월 16일 (토) 윤종희 기자 김병묵 기자 오지혜 기자 sisaon@sisaon.co.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윤종희 기자 김병묵 기자 오지혜 기자)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지난 13일 인터뷰에서 "자유당 체제에서 신변에 불리한 일이 닥칠지도 몰라서 신문사 기자가 되기로 했다. 때 마침 <한국일보> 수습기자 공고가 났길래 시험 쳐서 들어갔다. 그게 신변을 보호하기에 제일 나을 것 같아서. 그런데 자유당이 그렇게 빨리 망할지 몰랐지”라고 말했다. ⓒ 시사오늘

최근 야권이 주목하고 있는 ‘왕년의 인사’가 있다. 바로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다.

남 전 장관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 정계에 입문, 전두환 노무현 김영삼 정권을 거친 ‘정치 9단’이다.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13대까지 4선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의정활동을 벌였고, YS 정부에서 노동부 수장을 맡았다. 대한민국 현대 정치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산증인’인 셈이다.

무엇보다 남 전 장관의 냉철하고 통찰력 넘치는 정치 평론이 관심을 모은다. 그는 국회 입성 이전에 <한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 언론계에서 20년간 활동한 이력이 있다. 특히 정치부 막내 시절 혁신정당과 인연을 맺고 ‘체제 내 리버럴’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양 진영을 자유롭게 오갔다.

<시사오늘>은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한 남 전 장관의 자택 앞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다 술 마신 일들”이라며 호쾌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승만 양아들의 부정입학에 반대 시위…신변 문제 있을까 기자 됐다”

-최근 국회 세미나 창립식에 초청받았다. 오랜만에 국회를 방문한 소회는.

“나는 여의도 안 간다. 대개 국회의원 오래 한 사람들은 여의도 가기를 싫어할 거다. 자기 정치에 대한 약간의 후회가 있으니까. 만족스럽지 못 했다 이거지. 대부분 그럴 거다.”

남재희 전 장관은 지난 1952년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 2년 다니다 중퇴한 뒤 법대로 재입학했다. 그의 이름이 사회에 알려진 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 씨가 서울대 법대 부정편입학 논란을 일으켰을 때다. 당시 법대 학생위원장이던 남 전 장관은 동맹휴학 등 반대 시위를 이끌었다.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지난 1974년 <서울신문>에 기고한 ‘유신 2년 유감(有感)’이라는 긴 칼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당시 YS가 제의했던 대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유신헌법에 대해 토론해봐야 할 때가 2, 3년 안에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형무소에 갔을 것이라는 말에 나는 박정희를 위해 쓴 거지, 공격해서 쓴 글이 아니다’고 했다”고 말했다. ⓒ 시사오늘

-대학 시절부터 짚어봐야 할 것 같다. 당시 이강석의 부정편입에 반대하는 시위를 이끌었다.

“그때 내가 학생총회 의장이었다. 반대 시위의 주모자였던 거지. 이강석은 당시 정계의 제2인자 이기붕 국회의장의 실자(實子)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養子)였다. 아무리 그래도 육사 못 다니겠으니 부정편입하겠다는 건데 그걸 놔둘 수 있나. 내가 스트라이크를 했지.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이야기는 복잡한데 하여간 그 이후로 이강석은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변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신문사 기자가 됐다는데. 

“그땐 자유당 체제니까 혹시라도 신변에 불리한 일이 닥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변이 탄로 나는 ‘관’자 붙은 곳은 일체 안 갔다. 그럼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신문사가 떠올랐다. 때 마침 <한국일보> 수습기자 공고가 났길래 시험 쳐서 들어갔다. 그게 신변을 보호하기에 제일 나을 것 같아서. 그런데 자유당이 그렇게 빨리 망할지 몰랐지.”

“‘술친구’도 잡아가던 박정희 정권, 살아남은 이유는…”

남 전 장관은 <한국일보> <민국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 여러 언론사를 거쳤다. 특히 <민국일보>에서는 정치부 막내로 혁신정당 인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꿈은 진보에 있으나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라는 평가도 이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신문사에서 정치부 막내로 혁신계 인사들을 주로 만났다.

“<한국일보>에서는 편집부에 3년 정도 있었다. 정치부로 옮겨달라고 했는데 어렵다고 하더라. 그때 마침 <민국일보>가 제호를 바꿔서 천관우 등과 새로 출발한다고 하길래 옮겨갔다. 정치부로 옮겨준다는 조건이었는데 편집부 경력은 안 쳐주니까 부서 막내가 된 거다. 그러다보니 큰 정당이 아닌 혁신정당을 출입하게 된 거지.”

-그래서 혁신인사 중 술친구가 많다고. 

“사람 사귀는 게 대개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누는 거 아닌가. 그런데 혁신정당을 출입하다 보면 대부분 형편이 좋지 않으니까 기자가 술을 사줬다. 오히려 기자가 여유가 있으니까. 김한길 의원 아버지인 통일사회당 김철 의원도 그랬지. 그 후로도 줄곧 사줬다.”

-술친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유명한 이병주 선생과도 자주 만났다는데.

“이병주하곤 보통 친한 게 아니었다. 소설 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병주는 저녁이 으레 술이었다. 화제성 있을만한 사람들하고 술을 마시는 거다. 그때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넣어가서 소설에 풀어내곤 했다. 독립운동한 사람들이나 공산주의 했다가 전향한 사람들이나, 또 내가 서울대 법대에서 스트라이크 한 이야기도 소설 어딘가에 나온다. 이병주는 자정까지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서 새벽 3, 4시까지 글을 썼다. 막대기만 한 ‘몽블랑’ 만년필을 쥐고 줄줄 쓰는 거다. 하여튼 술도 많이 먹고 노는 것 좋아하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이병주 선생이 또 유명한 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술친구였다는 점이다.

“원래는 친한 사이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 사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군수지기 사령관을 맡았다. 마침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기였던 황용주가 <부산일보>에서, 이병주는 <국제신보>에서 주필을 하고 있었으니 친해진 거다. 게다가 세 사람 모두 술꾼이라 굉장히 자주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5·16 일어나고 박정희가 이병주를 2년 반 동안 감옥에 넣어놨으니 얼마나 서운했겠나. 중립화통일 주창했다고 그런 거지.”

소설가 이병주는 지난 1961년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고 2년 7개월 동안 복역해야 했지만, 출소 직후 발표한 소설 <알렉산드리아> 등으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됐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앙금은 가시지 못해, 소설에서 ‘작살냈다’고 남 전 장관은 말했다. 실제로 이병주는 소설 <그를 버린 여인>에서 박정희의 친일 경력과 경제정책, 유신독재를 비판했다.

-술친구도 잡혀가던 시절, ‘남재희는 개헌 이야기해도 살아남았다’고 이병주 선생이 말했다던데.

“내가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었던 1974년 10월 ‘유신 2년 유감(有感)’이라는 긴 칼럼을 썼다. 이때 유감은 불만스럽다는 게 아니라 생각해본다는 의미다. 당시 YS가 제의했던 대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유신헌법에 대해 토론해봐야 할 때가 2, 3년 안에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이병주가 ‘남 국장, 다른 사람 같으면 당장에 형무소에 들어갔을걸’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아이고, 팔이 안으로 굽는 것과 밖으로 뻗는 게 다르지 않냐. 나는 박정희를 위해 쓴 거지, 공격해서 쓴 글이 아니다’고 했지.”

-언론인 시절 고문 받거나 연행된 일은 없었나. 

“감옥 간 적은 없는데 체포령이 떨어져서 연행된 적은 몇 번 있었다. 1964년 6·3 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나는 <조선일보>에서 정치부 차장을 맡고 있었다. 그때 선우휘 편집국장과 나에게만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중앙정보부가 얼굴도 확인 안 하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낌새가 이상해서 살짝 피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를 잡으러 온 거더라. 그래서 선우휘랑 둘이서 도망쳐서 한 달 동안 잠복했지. 그러고 돌아왔는데 아무렇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연행돼서 빠따를 맞기도 했다. 그렇게 하룻밤 재워놓고 나가라고 하더라. 조사할 게 없었던 거지.”

"낙하산 공천 승낙한 건 언론인으로 생명력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

남 전 장관은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 공화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박정희의 지시, 이른바 ‘낙하산 공천’으로 서울 강서구에 출마한 것이다. 이에 대해 남 전 장관은 정부 기관지에서 일하며 ‘언론인으로서 생명력이 끝났다’는 생각에 출마 권유에 응했다고 밝혔다.

-신문사도 여러 번 이직했다. 

“과정이 조금 복잡하다. 1972년 <조선일보>에서 <서울신문>으로 옮길 때 몇 번이고 고사했다. 그런데 당시 문공부 장관에 청와대 대변인까지 한 신범식이 <서울신문> 사장으로 오면서 중학교 10년 후배인 내가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거절했더니 <조선일보> 사주들까지 찾아가 부탁했다. 자리 잡히면 <조선일보>로 돌아와도 된다기에 2년 정도 있다가 돌아간다고 말했는데, 이번엔 <한국일보> 선배인 김종규 사장이 들어와서 다시 붙잡더라. 그렇게 <서울신문>에서 편집국장을 만 5년을 하고 주필로 옮겨 앉아 1년 8개월을 보냈다. 지금은 민영화됐지만 당시 <서울신문>은 정부기관지였다. 그래서 거기에 있으면 언론인으로서 생명이 끝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반(半)언론인, 반(半)정부관료였던 셈이였지.”

-당시 박정희 정권의 ‘낙하산 공천’으로 정계에 입문한 것으로 안다.

“<서울신문> 주필로 있을 때 10대 총선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영등포구가 강서구로 분구되면서 무주공산이 됐다. 당초 공화당에서는 이건개를 추천한 모양이었다. 이건개는 박정희가 존경했던 이용문 장군의 아들로 서울시경 국장도 맡겼다. 그런데 국회의원은 좀 이르다고 생각했던지 보류시켰다. 그 대신 남재희는 어떻냐는 말이 나왔는데, 기자로 일하면서 면식이 있다 보니까 좋다고 했다더라. 그래서 공화당 인사들이 나를 찾아왔는데 갑자기 제안을 받고는 순간적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마치 컴퓨터처럼 생각을 했다. 결국은 앞에서 말했듯이 이미 언론인으로서 생명력을 잃었다는 생각에 수락하고 출마하게 된 거다.”

“박정희 경제정책, 만주 산업개발 계획에서 영향받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반은 싫어하고 반은 호의적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TV를 어지간히 열심히 봤다. <조선일보> 정치부장으로 있던 1967년에 TV 토론회에 나가 ‘경제발전과 민주화의 병행’에 대해 상대 패널과 논쟁을 벌였다. 그쪽에서 경제발전이 되면 민주화는 자동적으로 된다고 하기에 ‘그런 소리가 어디 있느냐. 병행해야 정상이다’라며 싸웠다. 그다음 날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마주쳤을 때 ‘두 사람 원래 친한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지독하게 싸우냐’고 하더라. 그러면서 상대 쪽엔 호의적으로 대하고 내게는 거리를 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던 것 같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이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병행했다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유신만 안 했어도 JP에게 정권이 넘어갔을 테고,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철학이 지속됐을 거라고 본다. 불행한 사태도 없었을 거고.”

-일각에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앞서 민주당 정부가 수립한 내용을 차용했다는 말도 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 걸로 안다. 장면 내각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박정희의 경제철학을 논하려면 만주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베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가 태평양전쟁 패전 전에 만주에서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실현시킨 바 있다. 박정희는 만주에서 그걸 보고 한국에도 같은 모델을 적용하려고 했던 거다. 장면 내각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만주 모델을 같이 봐줘야 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쇼와 시대에 관료와 정치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기시는 1936년 만주로 건너가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당시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 생도로 기시의 경제정책을 직접 보고 감회 받았다는 게 정설이다. 

“차지철, 박정희 정권 좌지우지…박준규·JP도 속수무책”

   
▲ 남재희 전 장관은 박정희 정권 말기에 당청을 장악했던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에 대해 “차지철 집단은 시쳇말로 깡패 같았다. 당시 거물들도 꼼짝 못했다는 거다. 당내 라이벌 관계였던 박준규와 JP가 박정희 사후에 화해하는 자리에 내가 우연히 합석한 적이 있는데, 그때 JP가 ‘차지철이 이미 오더 내리고 방해했으니 박 의장인들 어떻게 했겠나. 고생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 시사오늘

-박정희 정권 말기에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걸로 안다.

“당시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이 완전히 당청을 장악하고 정권이 정말 위태위태했다. 마왕 같았다. 민중이 반항하면 싹 쓸어버리자고 했던 사람이다. 당내 거물이었던 박준규 의장과 JP도 꼼짝 못 했을 정도다. 차지철은 유정회뿐 아니라 공화당 일부에도 자기 직계를 통해 위세를 부렸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백두진 유정회 회장이 궁정동에서 변이 났다고 보고를 받고서 ‘내 차는 어떻게 됐냐’고 묻더래.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차는 바깥에 있다고 하니까, ‘이놈아 그 차가 아니라 내 차’라며 차지철 신변을 물었다는 거다.”

차지철은 1961년 대위 출신으로 5·16군사정변에 가담했다. 이후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실세로 불렸다. 그는 1979년 당시 YS 의원직 제명 사태에도 깊게 관여된 것으로 알려졌다.

YS 의원직 제명 파동은 여당 의원들이 YS의 <뉴욕타임즈> 기자회견 내용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안을 변칙 통과시킨 사건이다.

-차지철은 YS 의원직 제명 과정에도 주도적인 힘을 행사한 걸로 안다.

“당시 청와대에서 유신 7주년 기념파티가 있었다. 공화당과 유정회 전원이 모였다. 나는 김재명 교통부 장관과 코너에서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는데 박 전 대통령이 들어왔다. 유정회가 주로 모여있는 첫 번째 테이블에 가서 인사를 나누는데, 사표수리 이야기가 나왔다. 유정회 전원이 ‘선별수리입니다’하고 합창을 하더라. 차지철의 오더였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내 생각을 물었다. 곤란한 나머지 빙그레 웃어가며 머리만 긁고 있었더니 박 대통령이 계속 얼굴을 바라보다가 몸을 홱 돌려 2층으로 가버리더라. 군인이니까 그런지 그 절도있게 돌아서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다음 날 의원 전원의 의견을 적어올리라는 오더가 떨어졌다. 유신회는 수리해야 한다고 합창했지만, 중앙당의 99%가 전원 반환을 써낸 것으로 안다. 그때 역시 공화당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당시 차지철의 위세가 대단했던 것 같다. 저항할 상황은 아니었나.

“차지철 집단은 시쳇말로 깡패 같았다. 그러니까 당시 거물들도 꼼짝 못했다는 거다. 단적으로 설명할 에피소드가 있다. 당내 라이벌 관계였던 박준규와 JP가 박정희 사후에 화해하는 자리에 내가 우연히 합석한 적이 있다. 그때 JP가 ‘차지철이 이미 오더 내리고 방해했으니 박 의장인들 어떻게 했겠나. 고생했다’고 하더라.  그때 박준규가 대통령 보고로 청와대에 들어오면 차지철이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내용을 확인하고서 ‘나는 대통령께 이렇게 말했으니 알아서 하라’고 압박했다는 거 아닌가. 전부 차지철의 오더 시스템이었던 거지.”

“박정희, 재혼했다면 역사 달라졌을 수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차지철에 의존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육영수 여사가 피살 당하고 박종규 비서실장이 사표를 내고 차지철이 들어왔단 말이야. 박종규가 계속했으면 나았을 텐데…. 그런데 박 대통령에게 재혼하라는 조언이 많았는데 ‘근혜 때문에 못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이 밤낮 대연(大宴) 소연(小宴) 하는 게 좋아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차지철이 밤낮으로 소연 대연 해주니까 마음이 허해지잖아 사람이. 그러니까 차지철 같은 깡패 애한테 더욱더 의지한 거다. 비극인 거지. 오죽하면 박준규나 JP 같은 양 거물이 내가 아까 들은 대로 그대로 고백하는 거지. 양 거물이 차지철에게 꼼짝 못했지. 차지철이 오더 한 대로 한 거지.”

-재혼했다면 역사가 달려졌을까.

“나도 박 전 대통령 장가보내야 한다고 했다. 청와대 첫 정치특보가 된 이용희 교수가 나를 찾아와서 조언을 구하기에 ‘간단하다. 박 대통령 장가보내라.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다’고 했다. 이 교수가 ‘육 여사가 너무 신격화돼서 돌파가 어렵다’고 하길래 언론계 몇 사람에게만 슬쩍 귀띔을 하면 1, 2년 안에 신격화 전부 해체할 수 있다고 했지.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이 ‘근혜 때문에 재혼 안 하겠다’고 말했다고 해. 그건 뭐 다른 데서도 나온 이야기니까.”

“전두환, 비판할 점 많지만 리더십 있었다…무능했던 노태우”

-시대를 넘어가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평가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은 주인 없는 막중한 정권이 광화문 통을 돌아다니는 모양새였다. 누구든지 먼저 잡으면 되는 상황이었단 의미다. 그게 잘 됐다는 게 아니라, 당시 정치상황을 설명하는 거다. 12·12 사태와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비판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리더십은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 페어(fair)한 부분도 있었다. 국방위 회식 사건으로 하나회 출신 군인들이 좌천됐는데 나한테는 손도 안 댔다. 내 딸들이 대학생 시위로 구속했지만 압박한 일은 없었다.”

국방위 회식 사건은 1986년 당시 육군 수뇌부가 국회 국방위 의원들을 회식에 초청한 자리에서 폭행한 일이다. 야당인 신민당은 이를 정치문제화 하기로 결정, 12·12사태 이래 위세높던 하나회가 국회에 불려와 곤욕을 치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인사참모부장을 물러나게 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노태우 정권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박하던데.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본인의 고집 없이 참모들 말대로 했다. 실화를 이야기하자면, 당시 청와대에서 스피치라이터로 일한 김학준 박사가 그만두게 됐는데, 그 퇴임식에서도 김 박사가 써준 글을 그대로 읽었다. ‘김 박사가 오랫동안 고생했고 수고 많았다’는 말 그대로. 그렇게 주는 대로 하니까 실수가 없는 거지.”

-노태우 전 대통령이 기존 이미지와 다르게 신경질을 부린 적이 있다고.

“이병철 비서실장을 했던 곽정출 의원이 간 크게 행동을 했다가 노 전 대통령에게 당한 일이 있었다. 곽정출 의원이 보통 사람이 아니야.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대통령을 넘길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기분이 좋아서 시도당 위원장을 모아 밥을 샀는데, 그때 곽 의원이 왔는데 불손하게 행동하더라고. 그전에도 좀 그런 게 있는데 ‘잡것들이 군인들끼리, 그것도 동기끼리 다 해쳐먹네’ 투덜투덜한 거지.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이 화가 나서 곽정출에 술잔을 던졌는데 고건 어깨에만 맞았어. 이후에 고건이 서울시장 임명을 받으니까 곽정출이 ‘내 덕 봤데이. 술잔 얻어맞고 시장 하나 됐데이’라고 말하기도 했지.”

“YS 지지는 ‘군·민 파트너십‘에 대한 철학 따른 것”

   
▲ 남재희 전 장관은 3당합당 후 일찌감치 YS 대세론을 내세운 이유에 대해 "군·민 파트너십"이었다며 "지금은 군이 시니어 파트너지만, 반대로 민이 시니어 파트너를 맡을 때가 됐다는 거다. 그중에서 YS가 제일 낫다고 생각했던 거고. 결국엔 서울시당 33개 모두 YS 지지로 몰렸다"고 밝혔다. ⓒ 시사오늘

-3당합당 후 일찌감치 YS 대세론을 내세우며 YS를 대선후보로 밀었던 이유가 궁금하다.

“정치 철학이다. 지난 1987년 민정당의 초대 정책위의장을 역임할 때 해외 언론사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내 논법은 군·민 파트너십이었다. 지금은 군이 시니어 파트너지만, 반대로 민이 시니어 파트너를 맡을 때가 됐다는 거다. 게다가 3당합당이 된 마당에 민에서 좋은 대통령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때 절친한 사이였던 이종찬과 박태준이 대통령 출마하겠다고 도와달라고 했을 때도 거절해서 난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군이 아니라 민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 YS가 제일 낫다고 생각했던 거고. 결국엔 서울시당 33개 모두 YS 지지로 몰렸다.”

-YS 정권의 개혁정책 관련 아쉬웠던 점은.

“YS가 한완상을 부총리로 임명했을 땐 남북관계에 대해 거창하게 나갔다. 그런데 한완상을 내려보내고 나서는 태도가 확 바뀐 거다. 그러다 정권 말기엔 김일성을 만나러 북한에 가기로 돼 있었는데 급작스럽게 사망해버린 바람에 기회를 놓쳤지. 그때 갔으면 DJ정부 못지않은 큰 변화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통일정책이 조금 왔다 갔다 한 게 아쉬웠다. IMF 문제야 동남아 여러 국가들이 다 겪은 거라서 YS만을 탓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노동정책에 대해선 어땠나.

“나는 세게 나갔다. 당시 청와대에서 나를 빼놓고 현대중공업 파업에 경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더라. 음모꾼들 몇몇이 모여서 그렇게 진행한 거다. 그래서 내가 직접 YS에 절대 안 된다고 말린 뒤로 민간 대기업에 경찰을 투입하는 일이 아예 사라졌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이던 민자당 패배 이유를 청와대 주변 인물로 지목한 적이 있다. 

“누구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때 청와대 주변이 이상했던 건 분명하다.”

기자는 이 대목에서 청와대 주변의 문제의 인물이 누구인지 물었다. 하지만 남 전 장관은 “분명히 있다”라는 말만 할 뿐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다. 기자가 남 전 장관의 발언을 유도하기 위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최형우인가”하고 물었더니 남 전 장관은 손사래를 쳤다.

“최형우는 절대 아니다. 그 사람은 의리의 사나이다. 잔장난을 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때 안병직 교수로부터 ‘너가 대통령이 되려면 정치의 폭을 넓히라’는 조언을 듣고 민중당 출신들을 영입한 것도 최형우가 직접 한 일이다. YS는 민중당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최형우가 ‘정당의 폭을 넓혀야 한다’며 YS에게 권유해서 된 거야. 그래서 이재오 김문수 등을 영입했어. 그 때 민중당에서 장기표만 빼고 다 신한국당으로 갔다. 장기표가 외톨이 됐지.”

-YS 다음으로 여당 후보로 나선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판단하나.

“이회창이 청주중학교를 나와서 후배인데 대학 때는 나의 법대 1년 선배로 아는 사이다. 내가 서울 의대에 2년 다닌 뒤에 법대에 다시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 암튼 이회창이 총리 됐을 때 나는 노동부 장관을 했으니까 청와대에서 자주 봤다. 이회창이 총리가 돼서 첫 각료 회의를 하는데 세게 나가더라고. ‘항간에는 실세 장관이 있다고 하는데 실세가 어디 있고 비실세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해. 최형우를 지목한 거야. 그런데 아마 법관 출신이라 너무 정치적 판단이 짧았던 것 아닌가 싶다. 우선 이인제를 포섭하지 못했던 게 결정타였던 것 같다. 또 DJ가 JP와 손잡을 때 이회창에게도 그런 옵션이 있었는데 유아독존식으로 나가다 보니까….”

“노무현, 정치적 진정성 있었지만…MB는 정주영 아류”

-대신 DJ가 당선됐다.

“괜찮은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거의 독학을 했다 보니 경제를 잘 몰랐던 것 아닌가 싶다. 토막 지식을 집대성은 했는데 기본적인 원리는 잘 모르다 보니까, 개혁적인 노선을 표방하면서 자유시장경제에 휘말려버린 것 아닌가. 당시 노동계에서 대량 해고가 이어졌고 몇 알짜 기업은 외국으로 헐값에 팔려나가지 않았나. 그러나 임동원이라는 책사가 있었기 때문에 국정운영이 가능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YS 정권의 한완상에 비해 임동원은 뛰어난 책사였다.”

-노무현과 MB에 대해서도 평가를 하자면.

“노무현에 대통령에 대해서는 추모사를 쓰기도 했는데, 우리 정치에서 진실성을 하나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력이 짧았던 탓에 어설픈 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반미면 어떻냐’고 언급한 일에 대해서는 나도 비판을 많이 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미국 손바닥 위에 있는데 그런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주영의 아류라고 표현하면 될 것 같다. 평생 정주영한테 배웠는데, 소 천마리를 가지고 북한으로 갈만한 창의성은 없었으니까 문하생에 그친 거지.”

-앞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비교하자면.

“스타일은 비슷하다. 좋은 말로 하면 야무지고 나쁘게 표현하면 지독한 거. 주변에 털어놓지 못하는 점도 비슷한 것 같다.”

“차기 대선후보, 뉴딜정책 같은 시대적 변화 이끌어야…개헌은 쓸모없는 일”

   
▲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차기 대선후보 관련 질문에 "지금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시대라서 구체적 정책 없이 미스코리아처럼 어물쩡 나올 수 없다.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건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처럼 시대적 변화를 가져올 지도자를 말하는 거다"라고 밝혔다. ⓒ 시사오늘

-역대 대통령을 지켜본 입장에서 요새 정치인들은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은데.

“개헌같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매달리는 걸 보면 그렇다. 하려면 결선투표제와 비례대표 확대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최근 정치 세미나에 초청됐을 때도 말했지만, 요새 이원집정부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나라 실정에 안 맞다. 정당의 전통이 아직 확립이 안됐기 때문이다. 또 대통령과 총리 간 암투가 생길 수밖에 없다. 4년 중임제도 마찬가지다. 급변하는 시대에 8년이나 한 사람에게 국정운영을 맡기면 창의성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런데 좋은 에너지를 낭비 말고 하려면 결선투표제 도입이나 비례대표제 확대를 고려하라고 말했다.”

-요즘 여야 유력 대선후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전 원내대표가 신문에 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 전 원내대표 말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금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시대라서 구체적 정책 없이 미스코리아처럼 어물쩡 나올 수 없다는 거다.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건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처럼 시대적 변화를 가져올 지도자를 말하는 거다. 다들 내가 문재인을 만나고 안철수는 안 만났다는 데 주목하던데 그게 뭐가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박원순 만난 이야기는 왜 안 묻나. 내가 서울시 시정고문이라 골백번 만났는데. 박원순 시장도 유력후보군 중 하나다.”

-우리나라 대선주자들이 구체적으로 내놓아야 할 정책 내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최저임금 같은 거다. 지금 미국 힐러리하고 샌더스가 12불이냐 15불이냐, 잠정적으로 합의해서 정강정책에 넣었다고. 그런 구체적인 이야기다. 최저임금도 중요한데 법인세 등 세금문제도 있고 재벌의 빨대구조 얘기도 있다. 이런 것에 대한 구체적 정책을 내놔야된다.”

오지혜 기자 sisaon@sisaon.co.kr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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