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럭키>,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주연의 힘
스크롤 이동 상태바
[칼럼]<럭키>,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주연의 힘
  • 김기범 영화평론가
  • 승인 2016.10.05 14: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기범의 시네 리플릿>이야기를 대체하는 유해진의 묵은 맛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기범 영화평론가) 

▲ 영화 <럭키> 포스터 ⓒ쇼박스

한순간의 사고로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주변 환경에 동화돼, 결국 새로운 자아에 눈을 뜬다는 설정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영화계에선 너무나 흔한 소재이다. 

더구나 기억을 잃었던 그 주인공이 평범한 이가 아니라, 폭력이나 살인 기술에 능한 소위 ‘인간 병기’로서 일상에서 자신의 타고난 킬러 본능을 주체하지 못한 채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의 경계에서 방황하다 각성한다는 줄거리는 코미디나 액션 장르에선 진부한 플롯이 된 지 오래다. 

대표적인 예로 이미 1996년의 <롱 키스 굿나잇> 은 당시 헐리우드의 정점에 올랐던 지나 데이비스의 치명적 매력을 보여주었고, 우리의 <조폭마누라 2> 는 프랜차이즈를 구축하려다 실패했다. 현재진행형인 <제이슨 본> 은 관객들이 그 진화를 목도하고 있다. 

상용될 수 있는 영화의 기본 설정으로 여전히 유효하지만 진부하다 못해 식상해질 수 있는 이 기둥 줄거리를 펼쳐나가는데 있어서 관건은 덧입혀질 수 있는 새로운 에피소드의 창출뿐만 아니라, 의존할 수 있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얼마나 세련되게 가공해 그 관계 설정에 특화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코미디 혹은 액션 등의 장르상 카테고리를 부여하는 것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가 될 터다. 

일본의 우치다 켄지가 2012년에 연출한 <열쇠 도둑의 방법> (鍵泥棒のメソッド) 이란 영화는 자살 직전까지 갔던 무명 배우와 일급 청부살인자의 인생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코미디를 다루고 있다. 

(흔히 일어날 수는 있으나 웬만해선 일어나기 힘든) 목욕탕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은 청부살인자의 옷과 물건을 무명 배우가 훔쳐 달아나고, 이로써 엉겁결에 뒤바뀐 인생을 살게 되는 두 주인공이 우왕좌왕하다 마침내 자신의 인생을 찾는다는 해피엔딩의 이 영화는 소박하면서도 깔끔한 일본 코미디 특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유해진이 간만에 원톱 주연으로 활약한 우리 영화 <럭키> 는 감독의 세심한 연출이 돋보인 이 일본 영화의 숨가쁘게 전개되는 좌충우돌 코미디와 효과적인 극적 장치를 이어받아 관객들에게 부담 없는 웃음을 선사하려는 의도로 제작된 리메이크 버전이다. 

문제의 단초를 제공하는 만악의 근원으로 원작의 야쿠자 대신 비리가 점철된 기업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변주를 출발시키는 이 영화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무리하지 않은 적절한 코미디와 액션을 섞어가며 갈무리한다.

직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는 영화의 흐름에 활력을 넣어주는 조연 캐릭터에만 익숙하지만, 이제는 한국의 어지간한 흥행 영화에선 빠질 수 없는 명품 배우로 자리매김한 유해진의 연기 내공은 모처럼만에 꿰찬 <럭키> 의 원톱 주연에서 그 빛을 발한다. 

제작진이 명명한 ‘초특급 반전 코미디’라는 장르명이 무색하리만치 묵직한 스릴이나 현란한 액션이 배제된 <럭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차라리 컬트 코미디 캐릭터에 가까운 인물과 공간 배경이 밀고 나가는 적당한 클리셰, 다소 헐거운 플롯을 메꾸는 것은 유해진 특유의 충만되고 찰진 연기력이다. 

배우로서는 확실히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는 그의 험상궂은 얼굴은 오히려 인간적인 진솔함과 푸근함으로 관객들에게 연민의 정으로 부담 없이 다가온다. 

원맨쇼에 가까울 정도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유해진만의 표정 연기와 순발력은 그동안 주연이 아닌, 오랜 세월 갈고 닦아온 조연으로서의 묵은 맛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데엔 이견의 여지조차 없다. 스크린 상에서 누군가의 배경으로 서있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유해진의 그 묵은 맛은 영화에서 간간히 나오는 그나마의 액션 씬마저 돋보이게 만든다. 

이렇듯 <럭키> 는 상황이나 사건이 내세우는 코미디의 서사나 쫄깃한 액션에 의한 지배보다는 철저히 주조연이 내뿜는 캐릭터의 에너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렇기에 영화는 주요 인물들은 물론, 주인공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단역들조차 희화화시키려 애를 쓴다. 

하지만 각 캐릭터의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영화들이 으레 그렇듯, 정교한 플롯이나 에피소드를 대체하는 인물 본위의 설정이 이야기상의 작위성을 낳는다는 것이 거슬린다. 

영화의 중심축이 되는 유해진과 조윤희 커플에 상반되는 이준과 임지연 커플의 로맨스가 더욱 부각됐더라면 이들의 미진한 연기력도 어느 정도 상쇄되었으리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영화의 이름은 원작명인 〈Key of Life〉를 한국식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럭키>(Luck – Key) 라는 신조어로 재탄생했다. 

뜻하지 않은 반전을 통해 미처 몰랐던 인생의 묘미를 맛보는 행운을 잡는다는 작명 의미는 좋았지만, 이 ‘언어유희’는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보는 이의 마음을 관통하는 와닿음이 저마다 현저히 다를 듯하다. 초특급 반전 코미디라는 장르명 치고는 그 반전의 임팩트가 그다지 큰 공명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락 액션물을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뻔한 플롯이 군더더기 없이 너무나 깔끔하게 마무리된 나머지, 훈훈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 반전이랄 수도 있겠다. 

작년에 이미 제작된 영화이니 만큼, 이번 추석이나 앞선 연휴에 보다 일찍 개봉했더라면 소소한 팝콘 무비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겐 어느 정도 선택의 여지가 많았을 것이다. 

10월 13일 개봉한다. 15세 이상 관람가.
  

뱀의 발 :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자신의 정체를 쉽게 찾아내지 못하는 과정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그 흔한 핸드폰이나 지갑 속의 신분증을 통한 신원 확인조차 영화상에서 애써 나타나지 않는 것이 비현실적이지만, 늘 머리로 분석하도록 체화된 개연성은 어떤 때는 부담 없는 코미디를 위해 분명 희생시켜야 할 덕목일지도 모른다. 

★★★

·영화 저널리스트
·한양대학교 연구원 및 연구교수 역임
·한양대학교, 서원대학교 등 강사 역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