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19 목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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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호 “1987 박종철 보도, 군사정권 향한 '격발'”
신성호 성균관대교수
“2단 기사, 처음엔 실망… 안기부 잡아갈까 여관에서 외박”
“12대 총선 신민당 돌풍, 당시 민주화 열망 보여준 것”
“朴군 사건 전엔 도망가는 대학생 다리 거는 시민도”
“최근 언론 정파성 심각… 지나친 이념의 잣대 없애야”
2018년 01월 09일 07:54:53 한설희 기자 sisaon@sisaon.kr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지난 5일, 영화<1987>속 실제 인물이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최초 보도한 당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現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박종철 군의 사건을 보도하게 된 1987년은 어떤 시대였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신 교수는 “몇 시 몇 분이었는지, 사람들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모든 게 생생히 기억난다”며 그 날을 침착하고 아주 정확하게 회상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를 토대로 재구성한 1987년 1월 15일, 사회부 법조담당 6년차 기자의 숨 가빴던 세 시간이다.

   
▲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최초 보도한 신성호 교수는 사건 회상 도중 “스무 살 갓 넘은 젊은 대학생이 조사 받다가 쇼크사 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주먹을 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의 일에 한결같은 분노를 느끼는 그에게서, 30년 전 한 나라의 체제를 바꾸게 만든‘열혈기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09:50

법원·검찰 출입처를 돌아다니며 ‘기삿거리’가 있는지 찾아 보던 중, 평소처럼 이홍규 대검찰청 공안4과장 사무실로 노크하고 들어갔다. 이 과장은 책상에 서서 서류를 뒤적거리느라 바빴다. 문이 열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평소처럼 쇼파에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 과장이 뜻밖의 소리를 했다.

“경찰 큰일 났어.”

큰일이 났다니? 뭘까? ‘뭔데요’라고 물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로서의 본능이 단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줬다.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아는 척을 해서 상대의 경계심을 풀었다.

“서울대생이라며? 어쩌다 남영동에서.”

순간 그림이 그려진다. 경찰, 큰일, 서울대생, 그리고 남영동. 남영동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자연스럽게 몇 마디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차가 한 잔 들어왔다. 찻잔을 드는데 손이 벌벌 떨렸다. 제발 떨림이 멈추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찻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차를 몇 모금 마시고 대화를 주고받다가 후다닥 화장실로 뛰어갔다.

10:00~10:10

그 방에서 확인한 사실을 정리하자면 단 한 줄. ‘남영동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 누가 올까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수첩에 키워드만 적어나갔다. 검찰청의 빈 방으로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사회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영동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이 죽었어요.”

전화기 너머 사회부가 발칵 뒤집혔다. 사회부장은 사안을 알 만한 출입처, 서울대와 치안부(現경찰청)기자들에게 은밀하게 추가 취재를 할 것을 지시했다.

10:10~10:30

중앙수사부 1과장 이진강 검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중앙수사부, 그 중 1과장에게는 전국의 모든 범죄 정보가 취합되기 때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죽은 서울대생, 어떻게 된겁니까?”

“아니, 어떻게 알았어?”

이 과장의 놀란 눈을 보니 ‘이건 팩트다’라는 확신이 가득 찼다.

“어떻게 대학생이 조사를 받다 갑자기 죽습니까? 경찰이 고문한 거 아니에요?”

“쇼크사로 보고했는데, 조사해 봐야지.”

‘경찰, 검찰에 쇼크사로 보고’, ‘검찰, 가혹행위 여부 조사 방침’. 조각난 팩트를 줍는다.  

10:30~11:00

서소문을 뛰어다니며 ‘서울대생이 학내 시위관련 혐의를 받고 14일 새벽 신림동 하숙집에서 연행돼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내용의 정보를 모았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인적 사항을 아무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 오전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당시 중앙일보는 석간 신문으로, 오전 11시가 뉴스면 마감이었다). 옆구리에 찬 삐삐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사회부장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부장에게 전화했더니 다른 출입처에서는 인적 사항 확인이 안 된단다. 시간은 흐르고, 삐삐는 미친 듯 울려댔다. 이젠 뭐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11:30

공안검사실로 다시 내려갔다. 학원 담당 김재기 검사의 사무실 문을 노크도 없이 확 열어젖혔다. 창을 등지고 앉아있는 김 검사, 그의 옆에 있던 직원들이 모두 놀라 쳐다봤다. 달리듯이 검사 앞으로 다가가서 다짜고짜 물었다.

“죽은 서울대생 이름이 뭐죠?”

“어? 박종.. 뭐더라?”

“학과는요?”

“언어학과 3학년.”

부리나케 방을 뛰쳐나갔다. 바로 빈 방으로 들어가 사회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어학과 3학년 박종X랍니다"고 전하자, 부장은 바로 서울대 출입기자에게 연락해 학적부를 뒤졌다.

“신 기자, 언어학과 3학년에 박종철 학생밖에 없다.”

아, 끝났다. 전화를 통해 선배기자에게 기사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급하게 송고하던 도중, 갑자기 사회부장이 전화를 낚아챘다.

“야, 자신있어? 조금이라도 이 기사 잘못되면, 너, 나, 국장, 사장 줄줄이 남산이다.”

“확인했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12:00~13:00

서울대 학적부에는 집주소와 연락처가 다 나와 있었다. 이를 전달받은 부산 주재 기자는 박종철 군의 누나인 박은숙 씨와 연락이 닿았다. 부모님이 어제 경찰로부터 동생이 조사받다가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고 서울에 가셨다고 한다. 가족에게 2중, 3중 확인을 거치고 나서야, 돌아가던 윤전기를 세웠다. 기사를 넣었다.

서울시내 수도권 가정에, 역사적 기사를 실은 신문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 신 교수는 "이 사건 보도는 하나의 ‘격발 장치’였다"며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분명히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강압정치로 표출을 못하고 시민들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것들이 이를 계기로 겉으로 표출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신 교수는 사건을 회상하던 도중 “스무 살 갓 넘은 젊은 대학생이 조사 받다가 쇼크사 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 80먹은 노인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며 주먹을 쥐고 목소리를 높였다. 30년 전 일에 여전히 분노를 느끼는 그에게서, 당시 한 나라의 체제를 바꾸게 만든 ‘열혈기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렇게 치열한 과정을 통해 작성된 첫 보도가 사회면 2단짜리 기사에 불과했다. 실망하지는 않았나.

"당연히 신문을 보자마자 ‘애걔’ 했다. 이건 못 해도 사회면 ‘중간톱’ 기사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날 오후 3시 넘어서부터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처럼 다른 언론사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

그날 저녁, <중앙일보>에서는 사회부 전체 회의가 열렸다. 내심 서운해하는 나에게 선배 한 분이 어깨를 툭 치면서 “야, 괜찮아. 넌 엄청난 일을 했고, 이건 역사적인 특종이 될 거야.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도 1단에서 시작한 거야”라고 말하면서 격려를 해줬다. 다른 선배는 “오늘 저녁에 집에 가지마, 너 안기부에서 잡아갈 수도 있어”라고 걱정하더라. 결국 그날 저녁 집에 못 들어가고 회사 근처의 여관에서 잠을 잤다. 그날 저녁 별 생각이 다 들더라. 심지어 나는 식구가 여섯이다. 그러니 얼마나 심각했겠나. 이 일로 인해 기자를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는 툭 하면 기자를 잡아다 조사하던 시절이니까."

-역사적인 날 밤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궁금하다.

"새벽쯤 되니까 생각이 하나로 정리됐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아버지 기자 할 때 뭐하셨어요?'라고 물어본다면, 또 후배기자들이 훗날 '선배는 어떤 기사를 썼어요?'하고 물어본다면 그 때 부끄럽지 않은 아빠,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자신감이 샘솟더라. 아무튼 내 인생 가장 긴 하루가 아니었을까."

-사건이 이 정도의 폭발력을 가진 것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도 한 몫 했을 것 같다.

"그렇다. 이 사건 보도는 하나의 ‘격발 장치’였다.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분명히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의 강압정치로 표출을 못하고 시민들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안에서 곪은 것이 이 사건을 계기로 겉으로 표출됐다고 본다.

당시 12대 총선에서 신민당의 돌풍이 있었는데, 이는 야당에 표를 몰아줌으로써 사실상 국민이 당시 체제, 전두환의 5공화국 체제에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거대 야당’까지는 아니지만 야당이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는 몸집이 되어 줬다. 그것이 민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 것이다. 박 군의 죽음은 격발장치가 됐다. 국민들 가슴속 불씨의 도화선이 됐다.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전엔 목소리를 내면 잡혀간다는 두려움이 강해서, 야당에 표는 줬을지라도 나서서 말을 못했다. 박 군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에 많은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도 후에 언론사로 시민들의 전화가 많이 왔다. 당시 ‘땡전뉴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국민들은 언론을 불신하는 경향이 컸다. 그런데 박 군의 사건이 언론을 통해 불거지니까, 시민들이 언론사에 응원과 격려의 전화를 보냈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한 아주머니가 전화해서 말없이 ‘흑흑’ 소리만 내면서 울기만 하더라. 대학생 자식을 둔 40대, 50대 여성들이 아니었을까. 그 감정이 전달이 됐다. 한 대학생의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닌, ‘내 가족의 일’로 느껴지기 시작한 거다.

이전에는 대학생이 시위를 하면, 상당수 사람들이 ‘저들은 빨갱이에 세뇌된 애들이다’라고 생각했다. 정부에서도 그렇게 몰고 갔다. 심지어 대학생들이 시위하다가 도망가면 '경찰에 잡혀가라'며 다리를 걸어버리는 시민들도 있었다. 그 정도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신 교수는 "역설적으로 민주화 이후 한국 언론들이 정파성을 띄기 시작했다"며 "이념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현재 언론들은 지나치게 모든 사건을 자꾸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고 들여다보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지난 7일 문재인 대통령이 출연진들과 함께 단체 관람을 하는 등, 정치권에도 영화 <1987>바람이 불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바른정당 등 여야 지도부들도 제각각 영화 <1987>을 언급하며 개헌논의에 힘을 싣고 있는 상황이다. 신 교수에게 개헌에 대한 생각을 묻자, 조심스럽게 “개인적 생각으로,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된 시스템을 고치는 것은 필요하다”며 답변을 이었다.

-그렇게 쟁취해 낸 87년 체제가 이젠 수명을 다했으니 개헌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당연히 지금 시대에 맞게 바꿀 것은 바꿔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 6월항쟁 이후 노태우부터 박근혜까지,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다들 불행했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됐기 때문이다. 권력이 집중된 5년 단임제라는 것이 그렇게 만들었다. 대통령 4년 중임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 뭐가 됐던 간에 현행 헌법의 구조는 좀 바꿔야 되지 않겠나. 그걸 고치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대통령을 하더라도 퇴임 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퇴임 후 박수 받으며 떠나는 대통령을 둬야 국민도 행복하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도 얼마 안 걸린다. 6월항쟁 이후에 현행 헌법을 만든 국민투표까지, 4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개헌할 수 있다. 촛불집회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박 전 대통령을 탄핵하는 데서 끝내기보다 개헌으로 이어져서 대통령이 불행한 일, 국민이 불행한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시스템을 고치는 게 국민의 요구다. 정치권이 답을 해야 한다."

-87년, 강렬했던 민주화 열망에도 불구하고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혹자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이 다르다. 지금 30년이 지나서 돌이켜보니까, 노태우 다음 YS, DJ로 이어진 것이 그 시절마다 그때 그때 적합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전두환에서 바로 YS로 갔다면? YS가 문민대통령으로써 하나회를 완벽히 척결할 수 있었겠나. 노태우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서 군사정권을 씻어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다. ‘절묘한 수순’이라고 본다. 모두의 바람대로 YS 또는 DJ가 먼저 대통령이 됐다면,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군부가 정말 가만히 있었을까. 다들 그 시대에 맞는 상징적 인물일 수 있다."

-87년 이후 언론 환경도 많이 바뀐 모습이다.

"언론이 항상 혁신을 이뤄야 하는 것은 맞지만, 과거의 긍정적인 부분은 이어받았으면 좋겠다. 그 당시 언론들은 박종철 군의 억울한 죽음 이후 매체 상관없이 다들 ‘민주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민주화 이후 한국 언론들이 정파성을 띄기 시작했다. 물론 신문이 이념적인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언론들은 지나치게 모든 사건을 자꾸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고 들여다보려는 경향이 있다.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관제언론도 아니고 모두 똑 같은 시각으로 통일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모든 문제에 이념의 안경을 들이대는 것도 옳지 않다."

-1987년을 넘어, 새로운 체제로 가려면 어떤 메시지가 필요한가.

"리더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위로는 대통령부터, 각 분야의 리더들이 분열이 아닌 ‘통합’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옳은 길로 간다면 반대하는 국민이 누가 있겠는가. 결국 문제는 ‘누가 실행을 처음으로 하느냐’다. 이는 각 분야의 리더들이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언론도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물론 지나치게 정파적인 태도는 경계해야 한다."

신 교수의 1987년 이야기를 들으니, 인터뷰를 마쳤는데도 그 시절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감동의 여운에서 겨우 빠져나온 기자가 "나는 그렇게 못 할 것 같다"고 감탄하는 모습에, 그는 쑥스러워하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로 후배 기자를 응원했다. 

“과거의 기자든, 현재의 기자든 기본적인 생각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어떤 진실을 추적하고, 이걸 독자에게 또 나아가 국민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자의 기본적인 책무 아닌가. 박종철 사건도 그런 책무에서 시작됐다. 이걸 다르게 해석하면 기자로서의 ‘특종’ 욕심이다. 이 욕심이 나쁘다고 생각 안 한다. 이런 욕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사서 고생해서 추적 보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욕심을 가지고, 책무를 다하면 된다.”

담당업무 : 국회 및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 출입합니다.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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