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추정의 원칙은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성 대결'은 권력다툼의 일종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한설희 기자)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 사건에서 촉발된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던 성폭력을 양지(陽地)로 끌어낸 미투 운동은, 여성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이 만연(蔓延)했던 우리 사회에 경종(警鐘)을 울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여론을 통한 사회적 처벌’을 행하는 미투 운동이 또 다른 폭력성을 내재한다며 ‘펜스 룰(Pence Rule)’을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왜 펜스 룰을 외치는 것일까. 그들의 말대로, 펜스 룰은 정말 합리적인 대응 방법일까. <시사오늘>은 1편에서 펜스 룰을 긍정하는 남성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2편에서는 펜스 룰이 여성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수 있음을 짚어 봤다. <편집자주>
“어제 회사 부장님이 웃으면서 ‘요즘 여자들 무서워. 이젠 펜스 룰 철저히 지켜서 여직원들을 술자리에 아예 부르질 말아야 돼’라고 하더라고요. 솔직히 정말로 저를 무서워했다면 저런 말을 제 앞에서 할 수 있었겠어요? 밥줄을 쥔 직장 상사가 아랫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농담을 포장해 협박하는 건데, 이게 정상인가요?”
국내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씨(27,여). 그는 1년 전 어렵게 취업에 성공해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크고 작은 성희롱들을 겪어야만 했다. 김 씨는 함께 입사한 남성 사원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던 몸매와 옷차림에 대한 지적을 자주 받았다. 상사들은 김 씨가 동석한 술자리에서 “김XX씨 있어서 재미있는 곳(유흥업소)도 못 간다”식의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1월 29일, 검찰에서부터 미투 운동이 발화했다. 불길은 사회 전반으로 커져갔다. 남성 집단 사이에서 ‘혹시 나도?’라는 불안감이 커지면서, 김 씨에게는 사내 성폭력 문화가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잔혹한 현실은 그에게 ‘펜스 룰’을 선물해 좌절시켰다.
김 씨는 지난 15일 <시사오늘>과의 만나 펜스 룰의 부당함을 토로했다. 펜스 룰에 대해 강력한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김 씨뿐만이 아니다.
지난 6일 페이스북 최고경영자 샌드버그는 SNS를 통해 “만약 남성들이 직장 내 성폭력을 방지하는 방법이 여성과 일대일로 마주하지 않는 것(펜스 룰)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그는 “남성 임원이 여성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유리천장), 여성을 피하고 제외시키면 여성만 피해를 본다”고 지적하며 역으로 ‘펜스 룰 반대 운동’ 전면에 나섰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펜스 룰 열풍’은 식을 줄 모른다. 사실상 이들의 주장은 크게 두 갈래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미투로 촉발된 여론재판이 ‘무죄 추정의 원칙’을 어기고 몇몇 ‘무고한 피해자’들을 양산한다는 것. 둘째, 미투가 지나치게 성 대결 프레임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 Break 1. ‘무죄추정의 원칙’과 ‘무고’의 편견을 부수다
“그러니까… 미투 운동이 무죄추정의 원칙을 위반한다고요? 그 주장은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펜스 룰 옹호자’들의 굳은 신념을(?) 깨부수게 돼서 미안하지만, 무죄추정의 원칙은 성범죄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었다. 바른미래당 내 미투 법률지원단장을 맡고 있는 장진영 변호사는 지난 15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무죄추정의 원칙과 미투가 무슨 연관이 있느냐”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법적으로 다투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미투로 지목된 사람이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자기가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대한민국에 열려 있잖아요. 무죄추정의 원칙은 수사기관, 즉 공권력을 가진 사법기관이 국민에 대해서 지켜야 하는 가치입니다. 여론재판 흐름과 무죄추정의 원칙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는 주체는 검찰·경찰과 법원이다. 이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야 하는 주체가 공권력을 가진 국가로 제한되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당신이 사인(私人)을 향해 “내 행복추구권을 위해 날 웃겨줘”라고 명령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이 당신을 범죄자로 비난한다고 해서 “내 무죄추정의 원칙을 위해 너의 생계유지를 해칠 수 있는 펜스 룰을 이해해줘”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무죄추정의 원칙은 소중하다. 다만 이 원칙은 타인의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황금률(黃金律)이 아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언급하는 것은 전형적인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죠. 백 번 양보해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펜스 룰 지지자)에겐 모순이 있어요.”
한국여성유권자연합 법률자문관계자는 이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무죄추정 원칙의 모순’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들은 이미 사안에 따라 무죄추정의 잣대를 다르게 들이대고 있어요. 그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키고 있을까요?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사람이 더 많지 않겠어요? 원할 때만 ‘선택적 무죄추정’을 지지하니까 모순이죠.”
일각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우는 근거로 무고죄 또는 ‘꽃뱀’의 가능성까지 제기한다. 성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거짓 진술을 하는 허위신고의 불안감 때문에, 일단 무죄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2016년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한 비율은 겨우 1.9%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들 중, 검찰이 불기소 처분 비율은 36.1%(※전체범죄 불기소 평균 : 25.5%)다. 2%의 용기를 쥐어짜내더라도 높은 확률로 무산된다는 것이다. 또한 2016년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강간·추행·성매매알선 등을 포함한 성범죄 건수는 총 1만 5561건으로, 이들 중 1심 무죄 판결은 총 327건, 약 2%다.
요컨대 자신이 겪은 성범죄를 밝히지 않는 숨어있는 피해자가 훨씬 많으며, 금품을 노린 ‘꽃뱀’의 가능성은 2%이하인 데다, 증인과 증거 확보가 어려운 성범죄 특성상 피해를 보는 억울한 남성들의 수는 더 줄어든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미투에 반발해 펜스 룰을 지지하는 것과, 무고죄의 가능성은 서로 논리적 모순 아닌가요?”
14일 혜화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최모 씨(27세,남)는 다음과 같은 대한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펜스 룰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미투와 관련된 무고죄인 경우가 많아져야죠. 그런데 벌써 무고가 있었나요? 다 재판중이거나 시비 가리는 중이죠. 그런데도 펜스 룰이 옳다는 건 지금 사태가 억울하다는 뜻이고, 속으로 이미 꽃뱀이 대부분이라고 판단내린 거 아니에요?”
- Break 2. 권력의 부분집단, 성 권력
‘정치인의 깔끔한 사생활 및 윤리적 금욕’이라는 펜스 룰의 본래 의미는 사라지고, 어느 순간부터 남성들을 공격하는 미투 정국에 대한 보복적 성향이 짙어졌다. 펜스 룰 지지자들은 펜스 룰이 ‘성(性) 대결’로 휩쓸리는 미투 정국의 브레이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여성유권자연맹에 소속된 정치권 관계자는 이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펜스 룰은 문제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며 이 같은 주장을 전면 반박했다.
“미투라는 것이, 제도권 안에서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제도권 밖에서 생겨난 것 아닙니까? 제도 밖에서 탄생한 것은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따라옵니다. 그렇더라도 그 문제가 갖는 심각성과 사회의 병폐를 반성하는 방향으로 가야죠. 이걸 펜스 룰이라는 ‘대응 잣대’로 갖다 대는 순간 왜곡입니다.”
그는 미투의 부작용에 집중하는 것보다, 왜 여성들이 본인과 타인에게 해를 가져오는 폭로 형태의 발화를 채택한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투는 단순 위계에 의한 성폭력만 다루자는 운동이 아닙니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범죄로 다루면 됩니다. 미투가 추가로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은 범죄를 바라보는 시각이에요. 남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성적 모멸감이 섞인 말들, 음주문화와 성폭력 양산 문화 등에 대해 좀 더 세밀한 논의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펜스 룰은 소통을 포기하겠다는 굉장히 무책임한 행동이자, 또 다른 2차 가해 도구입니다.”
미투는 합법적인 의사소통 경로를 통해서 현재 구조를 흔들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에서 출발했다. 합법적 소통의 장은 오랜 기간 지속된 가부장제로 인해 경색됐고, 기득권을 차지한 남성들의 독점 구조에서 여성의 발화는 늘 미뤄졌다. 2000년대 초 개혁국민정당 창당 당시 당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비판하는 여성 당원들에게 유시민 작가가 “해일이 일고 있는데 겨우 조개나 줍고 있느냐”고 대응한 것, "미투 정국에 김관진 전 장관과 이명박이 웃고 있을 것"이라며 '더 큰일'에 집중하자는 민주당 모 의원의 발언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남성들이 무시한 조개는 이제 해일이 되어 그들을 덮쳤다. 미투 운동은 남성 중심 제도의 폭력에 맞서고자 하는 저항행위다.
미투 운동을 보며 펜스 룰을 외치는 사람은 다시 모든 상황을 원점으로 만든다. 애초에 피해자들이 왜 폭로라는 수단을 선택하게 된 배경이 거대한 가부장제, ‘암묵적 펜스 룰’이기 때문이다. 명시적 펜스 룰의 등장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해 이제는 더 자극적인 폭로 수단을 이용하라고 권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와 관련해 앞선 여성정치권 관계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는 사회가 남녀평등으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가 아직 동등(equal)하지 않은데, 불평등의 산물인 '가부장제 규범'을 평등해야만 하는 집단 내에서 그대로 들이대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위계적 성폭력이죠. 펜스 룰로 인한 여성 담론 배제는 왜곡된 미투보다 더 나쁩니다. 미투가 성 대결로 보이니, 펜스 룰로 고삐를 쥐어보겠다고요? 결국 당신을 저주하는 또 다른 극단적 반(反)제도의 외침을 불러올 겁니다.”
미투 폭로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말하기까지 물리적인 시간의 차이는 존재한다. 일주일이 걸린 사람도, 1년이 걸린 사람도, 20년이 걸린 사람도 있다. 피해자들은 ‘나도 내 피해를 말하겠다’, ‘나의 용기를 공유하겠다’는 마음으로 투쟁의 장에 진입했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뛰어들었다.
우리는 현재를 산다. 그리고 미투가 폭로한 성폭력은 과거의 낡은 문화가 야기한 문제다. 이제 우리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15일 '미투 공감·소통을 위한 제2차 간담회'를 열고 “성희롱·성폭력은 권력관계의 문제이며 직장은 권력관계가 가장 일상적이고 강력하게 작동하는 공간 중 하나”라며 “이는 직장 내 성평등 실현과 맞닿아 있다. 사업장의 규모나 업종별 특성에 따라 성희롱·성폭력이 발생하는 양상을 조사하고 정책을 수립하겠다”며 성 권력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그의 정책 방향을 확인하니, 취재 과정에서 ‘미투와 펜스 룰 갈등,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대뜸 물었던 기자를 부끄럽게 한 대학생 A씨의 대답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저들끼리 과거에 머무르라 하세요. 똑똑한 우린 미래로 갈 테니까.”
좌우명 :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
기자님과 같이 회식한 남자직원들이 기자님이 나중에 어떻게 돌변할지알고 맘편이 밥이나 먹겠나요? 서로서로 편하게 여자끼리 남자끼리 지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