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무현 이명박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4월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역대 정권의 불법 사찰을 둘러싼 정치권 충돌이 격화됐다.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18일 “이명박(MB)·박근혜 정부 불법 사찰의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민주당은 진상규명TF 구성 및 특별법 추진 등의 계획을 밝히며, MB 정부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를 향해 책임을 묻고 있다.
이에 박 후보는 “본 바도 들은 바도 없고, 일체 알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국민의힘 측은 이는 ‘선거 공작’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김대중(DJ)·노무현 정부의 불법 사찰 가능성 역시 제기했다.
국가정보원의 불법 사찰 문제는 꾸준히 제기돼온 문제다. 같은 문제의식에서 지난해 국정원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 안에는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고, 국내 정보 수집행위의 빌미가 됐던 ‘국내 보안정보’라는 용어를 직무범위에서 삭제하는 내용이 담겼다. 국정원은 개정안에 근거해 국가 정보위원회 재적위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으면, 사찰 문건을 검토·보고하겠다는 입장이다.
1961년 중앙정보부(중정)에서, 1981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그리고 1999년 재출범한 국가정보원(국정원)까지. 정보기관은 60년의 세월을 국민과 함께 지내왔다. 과연 국가정보기관이 지키려던 건 ‘국가’ 안보였을까, 아니면 ‘정권’의 필요에 따른 안보였을까. 왜 매 정권마다 불법 사찰 의혹이 제기되는 것일까.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서른두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역대 정권의 불법 사찰 의혹이다.
서막. 국가정보기관 탄생
국가정보기관 60년 역사의 서막은 1961년 6월에 올랐다. 중앙정보부의 기본 아이디어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중앙정보법에는 ‘정부 각 부처 정보 수사 활동의 조정·감독권(1조)’뿐만 아니라, ‘수사권(6조)’도 담겼다. 이에 정보부는 CIA와 연방수사국(FBI)의 권한을 모두 갖게 됐다. 정치권에서 숱하게 발생해온 불법 사찰·도청 등의 문제는 수사권에서 비롯됐다. 제1대 국정원장이었던 김종필은 이를 부여한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중앙정보부의 기본 아이디어는 미국 중앙정보국에서 따왔다. 한국형 CIA를 만들겠다는 구상은 1958년 육본 정보국 행정과장 시절부터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CIA 같은 정보기관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다. 혁명의 특수 상황 때문이다. 혁명정부는 이제 출범했다. 아직 뿌리를 단단히 박지 못한 상태였다. 외부 세력이 혁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다면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었다. 그래서는 어렵고 산적한 혁명과업을 과감하게 추진해 나갈 수 없다. 그런 것을 막고 혁명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북한의 위협에도 대비해야 했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135쪽.
그러나 김종필은 수사권을 한시적으로 부여할 계획이었음을 강조했다. 그의 계획과는 달리 이는 2020년 개정법 마련 전까지 유지됐다. 김종필은 “정보부의 기본 임무와 역할을 망각했다”며 훼손된 정신에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막강한 권한인 수사권은 60년을 살아남았다. 이는 3년 유예 후 2024년에 경찰로 이관된다.
중앙정보부에 수사권을 부여하자. 혁명의 정착을 효과적으로 보조하려면 힘이 있어야 했다. 여러 고려와 고심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중략) 나는 정보부에 수사권을 한시적으로 부여할 계획이었다. 정보부가 수사권을 쥐면 미국의 CIA와 FBI의 권한을 모두 갖게 된다. 그런 예외는 혁명정부에서만 유효해야 했다. 최고회의에서 입법 취지를 설명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수사권은 혁명정부 기간에만 잠정적으로 갖는 겁니다. 민간정부가 정식 출범한 뒤엔 수사권은 법무부 수사국에 환원시킵니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후 후임 부장들 일부는 정보부의 기본 임무와 역할을 망각했다. 정치적 상황에 편승해 때로는 월권과 남용으로 국민의 지탄과 원성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음지와 양지’의 정신도 훼손됐다. 나는 정보부 창설자로서 그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135쪽~138쪽.
김대중 “나는 정보기관의 가장 큰 피해자”
김대중은 스스로를 “정보기관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과거 불행했던 안기부 역사의 표본은 바로 나(2권 50쪽)”라고 설명했다. 1973년 중정이 도쿄 납치 살해기도 사건에 개입하거나, 1985년 안기부가 가택 연금 당시 동교동 집 주변을 구매해 감시하기도 했다.
우리 집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요새가 되었다. 저들은 집 주변의 주택들을 빌리거나 사기도 했다. 그곳에 안기부 요원과 경찰을 상주시켰다. 경찰 수백 명이 몇 겹으로 집 주위를 둘러쌌다. 전화는 도청당했고, 우편물은 검열당했다. 저들은 언론의 인터뷰까지 방해했고, 내가 지은 책들은 서점에 진열하지도 못하게 했다. 집회 연설도, 모임에서 하는 발언도 방해했다. 심지어 신앙 체험 간증까지도 할 수 없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492쪽.
그는 자서전을 통해 “중정과 안기부는 선거 때마다 간첩 사건을 조작하여 선거전을 집권당에 유리하게 만들었다”며 “나를 빨갱이로,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흑색선전 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고 회고했다.
그랬던 만큼 그는 취임 후 안기부 간부들에게 “대통령은 국가 원수요 행정 수반으로서 받드는 것이지 정치적으로 받들 필요가 없다”며 “이 정권은 안기부를 정권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 당부했다.
이후 1999년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바꿨다. 김종필이 지은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1대 부훈은 ‘정보는 국력이다’는 원훈으로 변경됐다. 김대중이 정보기관에 강조한 것은 ‘정보 역량’과 ‘완전 중립’이었다.
그러나 2004년 국민의 정부의 불법 도청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은 구속 기소됐다. 이로써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원장의 정재계를 포함해 재야인사들에 대한 광범위하고 상시적인 도청 실태가 드러났다.
김대중은 도청 팀을 구조 조정하고, 도청 기구도 파괴했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역대 국정원장에게 도청, 정치 사찰, 공작 등을 없애고 일체의 불법적인 정보 수집 등을 못하도록 지시했으며, 그 어떤 불법 활동도 보고받은 바 없다고 해명했다.
김영삼 정권에서 요인들을 불법 도청했던 안기부 내 ‘미림 팀’ 수사의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그토록 불법 도청을 근절하라고 지시했는데 국정원장들이 이를 무시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불법 도청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나였다. 그런데 내가 이를 놔두겠는가.
- 김대중 자서전 2권, 542쪽.
노무현 “국정원장 독대보고 받으면 대통령은 제왕 돼”
노무현은 권력기관, 그중에서도 국정원과 검찰의 정치적 중립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자서전을 통해 “임기 내내 한 번도 국정원장의 독대 정보보고를 받지 않았다(269쪽)”고, “야당 정치인 뒷조사 등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271쪽)”고 명시했다.
그는 대통령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보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국정원의 정보 수준과 권력을 강화시킨다고 봤다. 스스로도 국정원이 수집한 정보의 힘에 의존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경계했다.
임기 내내 한 번도 국정원장의 독대 정보보고를 받지 않았다. 국정원장의 보고를 받을 때는 관련 장관이나 청와대 참모를 반드시 배석시켰다. 대통령이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으면 대통령은 저절로 제왕이 된다.
(중략) 대통령이 국정원과 독대해서 다른 누구도 모르는 정보를 보고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국정원의 정보 집중력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면 국정원의 정보 수준은 더욱 높아지고 권력은 강화된다.
(중략) 국정원장은 독대보고를 무기로 삼아 더욱 넓고 깊게 정보를 수집한다. 그럴수록 대통령은 점점 더 국정원 보고에 의존하게 된다. 나중에는 대통령이 국정원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국정원이 정보의 힘으로 대통령을 조종할 수도 있다.
(중략) 야당 정치인 뒷조사를 하거나 반정부 세력을 위축시키기 위해 국정원 조직을 활용하는 행위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결코 해서는 안 될, 국가와 국민을 모독하는 추악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 269~271쪽.
참여정부의 불법 사찰 의혹은 주로 이명박에 의해 불거졌다. 2012년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이 드러나자, 청와대는 “총리실 사찰 문건의 80%가 노무현 정부 것”이라 반박했다.
그러자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당시 조사심의기관실 시기의 기록은 공직기강 목적의 적법한 감찰기록”이라며 “불법 사찰을 물타기 하다니 MB 청와대 비열하다”고 비판했다.
한편 2007년에는 이명박 캠프로부터 국정원 내 일명 ‘이명박TF’가 존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2006년 8~11월 이명박과 친인척의 부동산 기록을 열람했다는 의혹이었다. 이에 한 국정원 직원은 2009년 구속돼 2011년 12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이 확정됐다.
직원은 ‘서초동에 이명박의 차명 부동산이 있다’는 첩보를 받고 조사업무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법원은 정보 열람과정에서 결재권자의 결재를 받지 않았으며, 조사 종결 후에도 상급자에 보고 하지 않은 ‘단독 범행’이라 판단했다.
이명박 “국정원을 탈정치화 하겠다”
이명박은 참여 정부 때 폐지한 국정원장의 대면보고를 부활시켰다. 그의 기조는 진보 정권과 달리, 국내 대공 정보 수집을 강화하고 국정원의 직무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이었다. 또 공약이던 ‘국정원 탈정치화’와는 다른 방향이기도 했다.
2008년에는 국정원의 권한과 정보 수집 역량을 강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5대 법안 제·개정안을 추진했다. 이때 입법한 법안이 통신비밀보호법(통비법)과 테러방지법이다. 결국 통비법은 2009년에, 테러방지법은 박근혜 정부(2016년) 때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의 9일간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도 불구하고 통과됐다.
통비법에 따라 정보수사기관의 장은 국가안전보장에 상당한 위험이 예상되는 경우에 한해 허가를 받고 통신제한조치를 할 수 있다. 또한 테러방지법에 의해 국정원은 테러 위험인물의 개인정보·위치정보·통신이용 정보 수집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 다양한 분야에서 국정원 사찰 의혹이 제기됐다. 박원순 변호사는 국정원의 민간 사찰 의혹을 제기해 소송을 받았다. 참여연대·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YMCA전국연맹 등 시민단체들은 “국정원 직원들의 활동은 국정원법의 직무범위를 벗어난 정보수집이자 민간 사찰 활동으로 직권남용”이라 비판했다.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도 “국회가 국정원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다시 시간을 돌려 2021년, 김경협 국회 정보위원장은 “(MB 정부 당시) 비정상적 수집 문건 수는 약 20만 건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사찰 대상 2만 명이란 수치는 1인당 10여 건을 수집했다고 가정했을 때 나온 결과다.
김 위원장 또한 박지원 국정원장의 “2009년 사찰 지시가 내려온 뒤 중단하라는 지시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답변과 같은 입장을 내놨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사찰 지시는 없었다고 확인했다”며 “정치인 사찰은 2009년 MB정부 때 시작해서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진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국정 사찰 의혹에 힘을 보탰다.
한편 이명박 자서전에는 국정원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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