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한설희 기자]

단식으로 촉발된 선거법 개정안 논의가 다시 단식으로 흐지부지 끝나는 모양새다. 벼랑 끝에서 목숨을 걸고 하는 투쟁 방식이었던 단식이, 20대 국회 때문에 ‘피켓시위’ 정도의 무게감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단식 행위 자체에 대한 희화화도 도를 넘어, 모 유명 잡지에선 한 에디터의 ‘황교안 따라 1주일 동안 물만 먹은 후기’가 높은 인기를 얻었다. 20대 국회가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국민에게 보여준 모습은 '조롱거리'에 불과했다.
 
여야는 2일 현재 시각까지도 출구 없는 ‘강 대 강’ 대치만 계속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로 나눌 것 없이, 이 사태를 야기한 원내 교섭단체 3당의 모습은 어떠한가. 민주당은 교묘한 반면 한국당은 허술하고, 바른미래는 패배주의에 젖어 있다.

민주당, 한국당 뒤에 숨어 일거양득 취하려는 교묘함

지역구 의석이 110석인 민주당에겐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했을 때 얻는 이익이 거의 없다. “막판에 한국당 탓하며 흐지부지 시킬 것”이라던 일각의 예상대로, 당론은 지난 의원총회에서 “한국당과의 합의가 최선”이라며 뒷걸음질 쳤다. 

‘모든 것은 기득권인 한국당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적극적 협상에 나서지 않는 민주당의 요지다. 민주당으로 치자면 사실상 뺨 맞고 싶은데 한국당이 시원하게 때려준 격이다. 

이들로서는 홍준표 전 대표의 ‘공수처 주고 선거법 막자’는 제안을 고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거 제도를 개정하는 일보다 태생 자체부터 검찰의 중립성 확보라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공수처가 우선인가. 민주당은 한국당과 공수처라는 두 개의 허울 좋은 핑계 뒤에 숨어 눈치만 보고 있다. 선거법 개정을 주장하는 야당 측이 “이제 한국당에 대해서 미련 좀 버려라”라고 소리치며 양당의 암묵적 야합을 비난하고 있는 이유다.

 

허술한 한국당 지도부… 전략·전술 없이 지역구 의석 계산만

한국당, 특히 황교안·나경원 두 사령탑의 허술함은 정국을 이 상황까지 끌고 온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공학적으로 따지자면, 이들에게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움직임을 시작부터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한국당은 내심 반대를 바라고 있는 민주당과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했다. 정확히는 ‘나서는 척’만 해도 됐다. 

14일 김무성 의원이 본지에게 주장했던 대로 한국당이 장외로 나가지 말고 다른 소수 야당이 혹할 만한 중대선거구제를 제안하면서 협상 기한을 오래 끌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한국당을 제외한 ‘4+1’ 공조도, 정치개혁을 한국당이 반대하고 있다는 부패한 이미지도, 한국당이 필리버스터로 민생을 볼모잡고 있다는 핀잔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총 20번의 역대 총선에서 보수 정당의 패배는 단 3번뿐이었다. ‘문재인 정부 심판론’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내년 총선에선 보수 정당이 충분히 여당을 정당득표율로 압도할 수 있다. 바른미래를 포함한 군소 보수정당까지 합치면, 21대 국회에서 보수 세력이 의사 정족수를 확보해 한국당에 유리한 정국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한국당에겐 무조건 악법이라는 논지 역시 허술한 셈이다. 

패배주의 변혁, 다당제 유지보단 보수통합 논의만

바른미래당 내 유승민·안철수 세력을 위시한 변혁 측은 “필리버스터라는 수단을 써서라도 막아내겠다”며 한국당과의 공조를 공고히 하고 있다. 

지역구 9석과 비례 6석을 가진 변혁은 약 5~6%의 정당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100%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하게 되면 현재보다 비례의석이 약 2석 늘어난다는 전망이 나온다. 신당 창당 후 지지율 ‘컨벤션 효과’까지 노린다면 교섭단체(20석)까지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런 변혁이 패스트트랙을 반대하는 이유는 오로지 한국당 및 제3지대와의 보수통합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 정당으로서 지지율을 높일 자신이 없으니, 한국당 투쟁에 필리버스터 동참으로 숟가락 얹어 보수통합에서 좀 더 유리한 고점을 차지하겠다는 속내다. ‘대안정당’을 외치던 처음 패기는 어디가고, 패배주의적 생각만 가득하다. “다당제는 시대정신”이라며 3당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통합하겠다던 안철수-유승민은 어디로 갔는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고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논의들이 필요하다. 특히 선거제 개편은 ‘일단 해보고 문제가 있으며 고치자’ 식의 전국민을 상대로 한 실험이 돼서는 안 되며, 대중을 최우선으로 두고 제도를 설명하는 공론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패스트트랙은 오로지 반대를 위한 반대와 의석 계산 싸움으로 범벅됐다. '복잡한 산술식'에서 국민은 배제됐고, 투표율만 저하시킬 뿐인 정치 혐오의 장이 펼쳐졌다. 표의 비례성을 강화하고, 지역주의를 완화시키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과연 지역주의를 해소할 것인지, 또는 군소 정당이 난립할 경우 어떻게 연정을 할 수 있을지, 연방제 국가인 독일의 제도를 채택하는 데 있어서 문제는 없을지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 

여기엔 오늘도 열리지 않는 본회의를 두고 '네탓공방'만 일삼는 국회의 책임이 크다. 교묘한 민주당과 허술한 한국당, 패배주의의 바른미래가 만든 국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