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등이 말하는 진실은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서영 기자]
<시사오늘>은 매번 역대 대통령들의 입을 빌려 당신에게 일종의 ‘기억재생장치’를 선사해왔다. 이번 열여섯 번째 ‘대통령 회고사’는 그간 조명 받지 못했던 역사를 담아냈다. 바로 통일민주당의 창당 과정이다.
1987년 개헌 정국 당시 쟁점은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책임제였다. 지금은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는 일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엔 누군가의 탈당과 창당으로 지켜낸 가치였다.
이처럼 민주화를 향한 지난(至難)한 과정은 민주화의 화려한 빛에 가려지기 쉬웠다.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던 날 함께 창당발기인 대회가 열렸던 통일민주당. 그들이 지켜내고자 했던 신념을 담았다.
1986.12月. 이민우 구상
창당 후 25일 만에 제12대 총선에서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浮上)한 정당이 있다. 1985년 1월 출범한 신한민주당(이하 신민당)의 이야기다. 신민당 창당 과정은 아래 회고사 시리즈에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671)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를 포함한 민주화추진협의회(이하 민추협)와 이철승계 등의 비민추협계가 어우러진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정강정책으로 채택했다. 대통령 중심제 및 직선제 개헌은 그들에게 있어 당론이기 이전에 선거공약이었으며, 동시에 진정한 민주화를 가져올 구조에 대한 믿음이었다.
신민당 초대 총재 이민우 역시 ‘그 날’로부터 6일 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민당의 직선제 당론을 분명하게 밝혔다. 기자는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 노태우의 ‘신민당에서 내각책임제를 원하는 많은 의원들이 언젠가는 튀어나올 것’이라는 말을 빌려 질문을 던지자, 이민우는 “우리 당에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다”며 “그런 얘기를 함부로 하는 것은 정치 상식에 벗어나는 것이다. 가령 내가 ‘민정당 의원 중에서 90%는 대통령 직선제를 내심 찬성하고 있을 것’이라 말하면 기분이 좋겠냐”고 반박했다.
그러나 1986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 그가 한 발표는 6일 전 인터뷰 내용과 결을 달리했다. 이민우는 삼양동 자택에서 “내각책임제 제도도 민주주의 제도이나, 그 실시에 앞서 바탕이 이뤄져야 한다”며 ‘선(先) 민주화 7개항 실천, 후(後) 내각제 협상용의’의 입장을 밝혔다. 이른바 ‘이민우 구상’이었다.
7개 조항에는 △국회의원 선거법 △언론자유보장 및 언기법 폐지 △국민 기본권 확립 △국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보장 △극렬 용공분자 제외 양심수 석방 및 사면·복권 △2개 이상 정당제도 확립 △지방자치제 실시 등이 담겼다.
이 발언은 이후 대다수 언론 1면에 ‘신민당의 내각제 개헌협상 긍정 검토’로 실렸다. 내각책임제를 내놓았던 민정당에서도 이를 반기며 긍정적으로 논의할 용의가 있다는 화답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민우 구상은 상도동계 김영삼과 동교동계 김대중에게는 충격을 선사했다. 김영삼과 이민우는 곧바로 회동을 통해 “당론 변경이 아니라 민주화를 강력히 촉구하는 것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해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신민당은 내각제 협상 가능성을 배제하고, 이민우가 제시한 민주화 7개항과 직선제를 함께 병행 추진한다는 당론을 내세웠다.
김영삼에게 이민우 구상은 어떤 의미였을까. 5일 후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하늘에 맹세코 (이민우 구상을) 사전에 몰랐다”며 “단지 민주화를 강력히 촉구하고, 또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믿고 싶다”고 입장을 전했다.
불씨는 완전히 꺼진 것이 아니었다. 1987년을 맞아 신민당은 계속해서 내분에 휩쓸려 갔다.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 전 국민의 민주화 역량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 상황에서 개헌투쟁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신민당이 심각한 내부의 노선 투쟁을 맞은 것이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21~322쪽.
한편 김대중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 역시 김영삼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사전에 이 구상을 알지 못했다는 점과 함께 비판을 이어나갔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당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다. 나는 이 기회에 이 총재의 경솔함을 지적하고 이민우 구상에 대한 논란을 단호히 끝장내기로 했다. 우리 집에 쇄도하는 전화는 ‘이 총재 규탄’ 일색이었다. 김영삼 씨를 향한 경고성 발언도 많았다. 나는 이 총재 발언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없이 7개항만 이뤄지면 민주주의가 된다는 것은 어림없는 소리다. 직선제와 민주화 7개항의 병행 투쟁은 백지화가 마땅하다. 민주화란 어느 시대, 어느 정권에서도 당연히 이뤄 내야 하는 보편적 가치이며 지금과 같은 개헌 정국에서는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총재의 행보는 노골적으로 빗나가기 시작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10쪽.
1987.1~4月. 신민당 내홍
양김(兩金)은 1~3월에 있었을 신민당 내부의 내홍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회담과 담판을 거듭했다(김영삼)’, ‘이민우 구상과 관련해 수시로 김영삼 씨를 만나 상의했다(김대중)’는 표현이 이를 대신할 뿐이었다.
나는 수많은 회담과 담판을 거듭하며 신민당의 개헌투쟁 노선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당내 분란은 그치지 않았고, 전두환 정권은 이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분당은 이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다가왔다. (중략) 나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22쪽.
1987년 새해 들어서도 정국은 ‘이민우 구상’으로 연일 시끄러웠다. 모든 신문과 방송이 이를 지지하며 나와 김영삼 씨를 압박했다. 정보 정치의 마수가 느껴졌다. (중략) ‘이민우 구상’과 관련해 나는 수시로 김영삼 씨를 만나 상의했다. 그는 “소위 이민우 구상이란 것이 당과 내각제 협상을 할 수도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킴은 유감이다.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민우 총재는 “더 이상 당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며 당무를 거부하고 충남 온양으로 내려갔다. 이 총재의 반격이었다. 이 총재는 상도동계 인물이었기에 김영삼 씨의 충격이 컸을 것이다. 이 총재와 김영삼 씨는 몇 번이나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합의를 했지만 이 총재는 틈만 나면 이를 뒤집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10~511쪽.
아래는 당시 신문 기사와 대통령 회고사 곳곳에 퍼져있는 1~3월과 4월 초반의 신민당 상황을 종합했다.
1월 7일, 양 김이 ‘이민우 구상이 직선제 당론에 어긋난 것’이라는 회동 결과를 발표하자, 이민우는 양김의 과도한 간섭을 지적하며 충남 온양으로 잠적했다. 그는 찾아온 몇몇 기자들에게 “민주화 7개항이 이뤄진다면 민정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영구집권음모가 아니라고 국민들이 인정할 것”이라며 국민의 여망에 따라 직선제와 내각제를 따르게 될 것이라 설명했다. 또한 그는 “직선제는 국민 여망이자 선거공약이니 변경할 수 없다”면서도 “야당이 자유당 때나 공화당 때나 계속 주장 해온 것이 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
1월 10일, 신민당 내 비주류 의원 9명이 민주연합을 결성해 이민우 구상을 지지했다. 연합에 참여한 의원은 △이철승 △김옥선 △김재광 △박한상 △박해충 △신도환 △이택돈 △이택희 △조연하 등이다. 이들 가운데 이철승은 2월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내각제 지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3월 12일, 신민당 소속의원 90명 중 70명은 이민우 구상을 배격하겠다는 서명을 했다. 이후 3월 18일에는 이민우와 김영삼이 이를 수습하기 위해 모였으나, 이민우가 주류 측의 당권 경쟁 포기 요구를 거부했다. 이로써 신민당은 주류와 비주류, 이민우 구상을 지지하는 이들과 배격하는 이들 간의 대립이 심화됐다.
4월 8일, 평행선을 달리던 신민당은 결국 분당을 결정했다. 이날 오전 9시 서울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서 분당 선언과 동시에 신당 창당 선언이 이뤄졌고, 이 자리를 함께 한 현역 의원은 상도동계 40명, 동교동계 34명으로, 90명 중 74명이었다. 이로써 신민당은 16명의 의원만 남게 됐다.
분당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987년 4월 8일 오전 9시, 서울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는 현역의원 및 신민당 당료, 민추협 관계자, 내·외신 기자 등 4백여 명이 몰려들었다. 분당선언의 자리이자 신당 창당선언의 자리였다. 내가 양김 이름으로 된 회견문을 낭독했다.
“신민당의 내분은 결코 당내만의 사건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현 정권의 공작정치의 소산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번민과 숙고를 거듭한 끝에 신민당을 폭력 지배의 무법천지로 만들고 농락 대상으로 전락시킨 불순세력과 단호히 결별키로 했습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23~324쪽.
이 총재와는 더 이상 함께 직선제 개헌을 위한 투쟁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영삼 씨와 나는 분당을 공식으로 선언했다. 1987년 4월 8일 신민당 의원 90명 중 74명이 탈당했다. 이 총재가 왜 ‘선민주화론’을 포기하지 않고 틈만 나면 계속 주장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이철승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주류의 부추김이 있었고, 잇단 미국 고위 인사들의 지원성 발언에 고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11쪽.
이민우는 같은 해 11월에야 신민당 총재, 국회의원을 포함한 모든 공직의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신민당 소속 의원들은 통일민주당(이하 민주당)·평민당에 입당하며, 신민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87.04.13. 창당발기인 대회 및 4·13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은 유독 역사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서울 무교동 사무실에서는 창당발기인대회가 열렸고, TV에는 대통령 특별담화가 방송됐다. 한편 이날 창당 발기인대회는 서울 명동 YWCA회관에서 갖기로 했으나, 당국의 방해로 민추협 사무실로 급히 변경됐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당이 스스로 내각책임제를 내놓고 있는데도 야당은 이를 한사코 거부해왔을 뿐 아니라 최근 극심한 내부의 혼란과 갈등상태를 보임으로써 합의개헌의 전망을 극히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중략)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전두환은 특별담화문뿐만 아니라 회고사를 통해서도 누차 야당의 내홍이 합의 개헌을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평화적 정부 이양과 올림픽 대회의 개최를 이유로 헌법을 유지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한편 4개월여 동안 개헌 문제를 놓고 여당과 협상을 할 것인가, 투쟁을 할 것인가의 이견으로 대립하던 신민당 내 주류와 비주류는 결국 이철승 의원 징계를 둘러싸고 정면충돌한 끝에 4월 8일 분당하기에 이르렀다. 양 김 씨는 이날 각각 자파 의원들을 탈당시키고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양 김 씨가 이끄는 신당의 출현은 협상을 통한 내각제 개헌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그 상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자칫 평화적 정부 이양과 올림픽대회의 개최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민정당은 노태우 대표의 기자회견과 의원총회 등을 통해 이러한 우려를 표명했고, 결국 나는 4월 13일 특별담화를 발표해서 현행 헌법을 유지시켜 단임 실천부터 한다는 방침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 전두환 회고록 2편, 609쪽.
김대중은 이를 무리수라 평가하며, 마지막 선을 넘었다고 말했다.
전 정권의 4·13 호헌 조치는 대세를 읽지 못한 무리수였다. 민심이 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마지막 선을 넘어 버렸다. 각 대학 교수들이 4·13 조치를 철회하라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고, 신부와 목사들이 단식 기도에 돌입했다. (중략) 4·13 조치는 통일민주당 창당 작업을 오히려 부채질했다. 5월 1일 창당을 향해 모두 숨 가쁘게 움직였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13쪽.
한편 김영삼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통해 전두환에게 공개적으로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하나는 남은 9개월 중 국민투표와 선거에 필요한 기간을 넉넉잡아 두 달로 잡더라도 개헌 협상에 할애할 수 있는 기간이 7개월이나 된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국회 개헌특위에서 여·야가 합의한 ‘국민이 자유로운 정부 선택권을 보장’에 의의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택적 국민투표를 논의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1987년 4월 정국(政局)은 혼미했다. 청와대와 민정당도, 신민당과 민주당도 거센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 물결에 국민들도 하나 둘 몸을 내던지며 동참하기 시작했다.
1987.4~5月 통일민주당 창당 과정
민주당의 창당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창당을 막기 위한 폭력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4월 20일부터 서울과 인천 중·남구 지구당 창당대회를 시작으로 창당 작업이 시작됐으나, 깡패들이 난입해 난동을 부렸다. 이후 이 난동은 ‘용팔이 사건’으로 불리며 정치공작임이 밝혀졌다. 여기서 용팔이는 폭력배 중 김용남의 별명이다.
민주당 지구당 창당기간 중에 우리를 어렵게 만든 것은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깡패들의 테러와 방해공작이었다. (중략) 나중에 용팔이라는 별명의 김용남이가 지휘한 것으로 밝혀진 이들 폭력배들은, 창당대회가 열리는 장소마다 따라다니면서 4월 말까지 창당대회를 개최한 57개 지구당 중 20여 군데를 습격, 대회장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폭력배들은 복면으로 위장한 채 난동을 부리기도 했으며, 유혈사태는 물론 방화사건도 속출했다. 나의 오랜 비서인 박종웅을 비롯해 수많은 당원들이 집단폭행을 당해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34쪽.
비주류 일부가 깡패들을 동원하여 지구당 창당 작업을 방해했다.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용역 깡패들을 동원하여 지구당 창당 작업을 방해했다.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무장한 용역 깡패들이 행사장에 난입했다. 세칭 ‘용팔이 사건’이다. 물론 백주의 난동 뒤에는 안기부 등 정부 기관이 있었다. 창당 방해 사건은 부패한 정치인을 앞에 내세운 공작 정치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집요한 방해 공작에도 우리는 5월 1일 신당을 창당했다.
- 김대중 자서전 1권, 513쪽.
이 진상은 당시에는 경찰의 수사에도 밝혀지지 못했으나, 이후 1993년에 규명됐다. 김영삼은 이를 ‘정치공작’으로 평가했다.
창당방해 사건은 끝내 정치쟁점으로 비화돼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지만,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그 진상은 1993년에야 규명되었다. ‘용팔이’ 김용남을 고용한 실무총책이 미국으로 도피한 신민당 총무부국장 이용구라는 사실, 그리고 자금지원 등 배후조종자는 신민당의 이택희·이택돈 두 의원과 ‘주먹세계의 대부’인 호국청년연합회장 이승완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어 당시 안기부장 장세동이 이택희·이택돈을 만나 6억원의 자금을 전달하는 등 창당방해 사건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장세동이 구속되었다. 이로써 ‘용팔이사건’은 장세동-이택희·이택돈-이승완·이용구-김용남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정치공작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34~335쪽.
중앙 당사를 구하는 과정에도 건물주들이 임대를 거부해, 창당을 하고도 한동안 민추협 사무실을 임시 당사로 사용했다. 또한 5월 1일 창당 당일까지도, 건물 앞에는 전투경찰과 사복경찰들로 둘러싸고 있는 등 고비가 이어졌다.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대회장마다 나타나 분위기를 난장판으로 만들던 정치깡패들 대신, 이번에는 그들의 난동을 조장했던 경찰들이 전당대회장에 막강한 병력을 투입했다. 깡패들로부터의 보호라는 임무를 띠고 왔다는 경찰이 깡패가 아닌 선량한 시민들의 대회장 출입을 공식적으로 막고 나선 것이다. 기자들과 대의원들만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받은 뒤에야 겨우 대회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대회장 안팎에 모인 당원들과 시민들은 내가 입장하자 환호와 박수를 보내 주었다. 건물 안에 들어가 보니 좁은 건물 안이 온통 사람들로 꽉차 있었다. 그 인파를 헤치고 들어갈 때 느껴진 체온, 나는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타오르고 있는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에 감동했다.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2권, 335~336쪽.
신민당의 내홍도, 민주당 창당 과정의 방해 공작도, 창당 이후 취임사에 대한 소환 수사도, 그들 앞에 펼쳐진 고난의 전부가 아니었다. 민주당 창당으로부터 5개월이 지나고, 두 사람은 1987년 대통령 선거 직전 평민당 창당으로 또 한 번의 분열을 맞았기 때문이다. 평민당 창당 과정은 아래 회고사 시리즈에 상세히 서술돼 있다.
(관련기사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109)
직선제냐 내각제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처럼 내각책임제를 염두했던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던 민심과 제1야당이던 신민당. 그리고 이 가운데 내각제를 수용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한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까지. 통일민주당의 창당 과정은 4·13 호헌조치와 이후에 펼쳐질 6월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빛이 가려져 있다.
그러나 이민우 구상에 따른 신민당의 내홍이 4·13 호헌조치를 결정하는 좋은 명분이 됐고, 이것이 도화선이 돼 6월 민주항쟁과 1987년 개헌 정국의 마침표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거대한 민주화 열망으로 권력 유지를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해 내각제 개헌을 주장한 이들,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심을 담아낼 그릇으로 직선제 개헌을 택한 이들, 그리고 어떤 정치제도가 아닌 민주주의를 우선이라고 판단한 이들까지. 그들이 만들어 낸 역사는 통일민주당 창당과 함께 1987년 대한민국 전환기에 큰 줄기가 됐다.
강상호 한국정치발전연구소 대표는 19일 “당시 이민우 총재가 내각제를 주장한 것은 사실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며 “호헌이냐 아니냐에 따른 쟁점이 국민적 관심사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강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12대 총선으로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키고, 이민우 총재의 욕심에 따른 신민당 분열과 통일민주당 창당. 그리고 이후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평민당이 창당되는 과정까지,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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