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서울시장 보궐선거 대진표가 결정됐습니다. 국민의힘·국민의당 실무협상팀은 23일 오전 국회에서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4월 7일 열리는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와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의 양강 구도로 펼쳐지게 됐습니다.
이러자 야권 단일화 경선에서 패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둘러싸고 여러 전망이 나옵니다. 본인은 “여론조사 결과를 서울시민의 선택으로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며 “야권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일각에서는 안철수 대표가 단일화 과정에서의 ‘앙금’을 이유로 오세훈 후보 지원에 미온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예측을 내놓습니다.
심지어 국민의힘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승리하면 국민의당은 야권 통합 과정에서 주도권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만큼, 안철수 대표가 ‘영리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충고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국민의힘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해야 ‘국민의힘 한계론’이 힘을 얻을 것이고, 그래야 안철수 대표에게도 기회가 열린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 정치사는 안철수 대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1970년,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제7대 대통령선거에 나설 신민당 후보 선출 과정에서 DJ(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했습니다. ‘40대 기수론’의 선두 주자였던 YS는 범(汎)유진산계와 제2계파였던 이재형계, 경쟁자였던 이철승계로부터도 지원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날 밤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표를 모은 DJ의 노력이 빛을 발하면서 두 사람의 승부는 접전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DJ가 이철승과 접촉, 이번에 자신을 도와주면 다음 총재 선출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주고 이철승계의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승자가 뒤바뀝니다. 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YS를 지지하기로 했던 이재형도 박정희 정권의 협박을 받아 지지를 거뒀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정권 차원의 방해와 이철승의 약속 파기로 인해 대선후보 자리를 놓친 YS 입장에서는 억울한 마음이 들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김봉조 민주동지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철승 표가 몽땅 DJ에게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결과가 나왔을 때 김동영과 나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사자인 YS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는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YS는 곧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남 몰래 눈물을 삼킨 그는 결과가 발표된 직후 단상으로 올라가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김대중 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나의 승리입니다. 나는 김대중 씨를 위해 거제도에서 무주 구천동까지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지 갈 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실제로 YS는 DJ 당선을 위해 전국을 누비며 선거 운동을 벌였습니다.
비록 DJ는 낙선했지만, YS는 DJ 선거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약속은 지키는 정치인’, ‘통 큰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었습니다. ‘라이벌’ DJ의 승리를 위해 전국을 돌았던 행보는 정치 활동 내내 YS라는 정치인을 상징하는 일화로 남았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통 큰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 그를 누구나 인정하는 정치 지도자, 나아가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만든 겁니다.
몇몇 사람들의 주장처럼, 안철수 대표가 ‘머리를 써서’ 움직인다면 오세훈 후보를 낙선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의당 중심의 정계 개편을 이뤄내고, 반문(反文)의 구심점으로 우뚝 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경우 안철수 대표는 국민에게 ‘한 번 한 약속은 지키는 믿음직한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권에 있는 ‘수많은 전략가’ 중 한 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YS의 말처럼, ‘잠시 살기 위해 영원한 죽음을 택하기보다는 잠시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는’ 안철수 대표의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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