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25는 미국의 전략이었다 [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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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25는 미국의 전략이었다 [특별기고]
  • 조찬옥 (사)민추협 사무총장
  • 승인 2023.06.1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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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냉전 승리의 초석으로 보는 이유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조찬옥 (사)민추협 사무총장)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인을 조명해 본다.ⓒ픽사베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인을 조명해 본다.ⓒ픽사베이

정당성이 없는 권력은 폭력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을 우리의 우방국가요 혈맹의 나라로써 북한으로부터 공격을 지켜주고 안보를 수호해주는 은혜로운 국가라 믿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이 자국의 국익이 되는 국가라 생각하고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은 미국 우선주의 국가라는 사실이다.

그 예로 필리핀을 지배하기 위해 1905년 가쓰라 데프트 밀약으로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화 시키는데 전혀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고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은 한국전쟁에서 그들은 돈벌이 수단에 혈안이 되었다.

이 지구상에서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않은 전쟁을 치뤘고 전쟁을 좋아하며 전쟁을 가장 잘하는 국가이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나라를 세웠고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고 전쟁을 통해 세계 죄 강대국이 되었으며 전쟁을 통해 세계 패권국가가 되었다.

미국은 1776년 독립선언 이후 200년이 넘는 동안 전쟁을 치르고 전 세계 150여 곳의 지역에서 250여 번 전쟁이 일어났으나 200여 곳의 지역에서 미국에 의해 전쟁이 일어났다. 20세기 동안에 1억 9천만 명이 전쟁에 의해 사망하였다. 이러고도 미국이 말하는 정의니 평화가 얼마나 기만적인 가는 미국이 행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주한미군 진입 원인 

주한미군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조직으로 육군·공군·해군·해병대·우주군이 합쳐진 합동군 형태이다. 우주군은 새로 창설된 미합중국 우주국 장병 소수가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이 전 세계에 미군을 파병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들을 보면 우리나라는 일본 독일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미군이 주둔하는 국가이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진입하게 된 원인을 살펴보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그로부터 한 달 뒤인 동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항에 상륙하여 9일에서 10일 사이 서울에 입성을 하였 고 미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38선 이남에 들어와 승전군(미군)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대로 조선의 해방자가 아닌 점령자로 입성을 하게 되었다.

8·15와 함께 일제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줄 알았던 우리민족은 미 태평양 사령부가 상륙하면서 조선총독부 총독 아베 노부유기에게 치안권을 계속 행사하라는 명령을 하고 총독정치를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용인하여 해방이 되었어도 일제 총독정치가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미군은 우리나라가 전범국가나 적성국가가 아님에도 인천항에 입항해서부터 점령군의 자격으로 한국과 한국인들을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인종차별적 대우를 하였다.

1945년 9월8일 하지 중장 휘하 미군이 한반도에 진입한 이후 군정을 담당하고 있던 미 육군은 1945년 말경부터 한반도 철수를 주장하였으나 미 국무성은 한반도 주둔을 계속 고집을 하였고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할 수 있었던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 미 국무성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8년 8월15일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 5월28일 미국군은 45,000명의 주둔병력을 철수하고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겨두었다.

한편 1948년 12월 중국의 장개석 군대가 모택동 군대에 패하게 되면서 중국 대륙이 공산화가 확실해지자 미국입장에서는 한반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 국무성 동북아 책임자인 비숍은 중국이 공산화가 되면 한반도가 매우 중요하며 한반도가 공산화 되면 일본과 미국의 이익이 심각한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중국 대륙의 공산화 세력을 몰아낼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노골적인 공산세력 확장에 대항하여 기존 공산세력을 몰아낼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소위 말해 롤백 정책(한나라의 주요 정책들을 강제로 변화시키는 전략)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전문가들은 롤백 정책이 가능하려면 특정지역이 공산 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중국 대륙을 복원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 전쟁을 주장한 것이다. 한편 1948년 12월 8일 유엔에서는 이승만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고 결정을 하자 1949년 2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 주장에 주한 미 대사 무초는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을 어렵게 한다는 차원에서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을 주장한 반면 미 육군 장관 로열은 이승만 의 북진통일 주장은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주장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주한미군이 이승만 대통령 북진통일에 걸림돌이라 느낀 당시 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로얄 육군 장관의 뜻을 수용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주한미군 철수를 그렇게 반대했던 트루먼 대통령이 미 육군의 입장을 수용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 CIA는 미 전투 병력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경우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 주둔을 주장했던 트루먼 정부가 1949년 2월에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을 빌미로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한 것이다.

주한미군이 철수한 1949년 6월30일 이후 미국은 한국군을 공격할 수 없는 군대로 만들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함과 동시에 한반도가 미국의 아태지역 방어선에서 제외되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방식으로 소련의 남침을 유도하고자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주장과는 달리 미국은 공산세력이 남침하는 경우 단순한 38선 복원이상의 롤백 정책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1949년 6월 30일 주한미군 철수와 그 후 한반도를 포기할 것이란 미 한반도 전문가들의 지속적인 발언을 롤백 정책을 구현했다. 북한군의 남침유도를 통해 롤백 정책을 구현하기 위한 성격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중국 공산화가 분명해진 1948년 말경 이후 미국내부에서는 전쟁을 통해 중국대륙을 재차 복원해야 하는 세력들이 한반도 전쟁을 통해야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 국무장관 딘 에치슨은 1950년 1월12일 미국 전국기자클럽에서 발표한 아시아의 위기라는 주제 연설에서 한반도의 역사를 바꾼 중대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산 열도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으로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에치슨 라인이다. 한마디로 한반도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 한국을 버리겠다는 계산이다. (여기에는 꿍꿍이 계산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이 빠져있다는 사실에 힘입어 1950년 6월25일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은 미군이 없는 한국은 침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전략적인 사고는 6·25 전쟁을 통해서 미국의 의도적인 사실들을 확인 할 수가 있다. 전통적으로 미국정부는 6,25전쟁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발발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인을 조명해 본다.ⓒ픽사베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인을 조명해 본다.ⓒ픽사베이

냉전 승리의 초석 

그러나 미국은 6·25가 정밀하게 기획된 성격임을 암시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6·25 전쟁 : 철저하게 기획된 작품임을 폭로한 J.F Stone이란 저명한 언론인의(The Hidden History of Korean War. 숨겨진 한국 전쟁의 비사)이 1952년에 400페이지에 달하는 저서에서 스톤은 이처럼 주장을 하였다.

마샬 국방부장관. 트루먼. 에치슨 등 미국의 고위급 인사들은 6·25전쟁이 장기간 동안 이어져 야하고 미국의 국방비를 400%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2300억 달러 정도우 GDP에 130억 달러 수준의 국방비를 유지힌고 있던 미국이 500억 달러 수준으로 국방비를 증액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공산세력과 핵전쟁에 못미치는 형태의 전쟁을 장기간 동안 치열하게 수행함으로써 미국인과 자유세계 국가 국민들에게 공산세력의 위험을 절감시키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알고있는 6,25전쟁 역사는 주로 1950년대 및 60년대의 시각 6,25전쟁 비밀자료가 거의 공개되지 않았을 당시의 시각에 입각한 것들이다.

1970년대 말경 이후 미국.중국.소련에서 6,25전쟁과 관련많은 비밀자료가 공개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연구 발표를 한 미 시카고 대학 석좌교수인 브루스 커밍스가 1980년대 초반 한국전쟁에 관련된 비밀자료 등을 발표 공개하면서 이같은 관점이 보다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이들 자료에 입각하여 많은 학자들이 6,25전쟁을 새롭게 기술했다. 그러나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달리 생각하고 있다. 시카코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미국이 한국에서 엄청난 잘못을 했다고 본인의 저서에서 밝히고 있다. 이처럼 말하는 사람이 브루스 커밍스만이 아니라 이처럼 생각하는 이유 가운데 6·25전쟁이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미국인 가운데 북한군의 남침을 유도한 주요 인물이 당시의 미 국무장관 에치슨이 분명해졌다고 한다. 아무튼 1949년 10월 미국은 북한군이 남침하면 유엔군 형태로 참전한 후 낙동강까지 후퇴했다가 인천상륙을 통해 반격해야 한다는 내용의
한반도 전쟁계획인 SL-17을 수립했으며 6,25전쟁이 벌어지기 1주일 전인 1950년 6월 19일 모든 관련부서에 이 전쟁 계획을 배포했다.

전쟁이 벌어지자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이 계획 50부를 미 합참에 요청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1950년 6월19일 미 국방성은 북한군 남침 유엔군 참전.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할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전쟁계획을 회람시켰다고 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한국 전쟁역사 기원) 등 몇몇 본인의 저서에서 그 근거를 제시하며 주장하고 있다.

한국입장에서 보면 6·25 전쟁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6·25  전쟁을 미국이 기획했다면 이를 한국 국민들이 알게 된다면 미국에 대해 매우 분개할 사건이다. 이러한 기획은 미국이 세계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전략가들을 많이 보유할 수 있는 것도 진실규명 차원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6·25 전쟁은 미국의 철저한 기획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미국이 이 같은 국가였다는 사실에 더불어 6·25전쟁 관련 자료를 읽으면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전후 미국은 지구상 도처에 특히 일본. 독일 및 한국과 같은 지역에 미군을 주둔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이들 국가의 외국군 주둔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인을 조명해 본다.ⓒ픽사베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인을 조명해 본다.ⓒ픽사베이

자국 안보 측면에서 또한 미군 주둔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들 국가의 국민들에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미국은 전쟁이 절실히 필요했으며 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좋은 전쟁이 한국전쟁이었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남북한 모두는 통일을 열망하고 있었다. 한편 해방 이후 5년의 기간 동안 소련은 북한지역을 철저한 공산지역으로 만들었던 반면 미국은 남한을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지역으로 민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1948년에 소련군이 1949년에 대부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를 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 후 벌어진다. 1950년 6월 9일부터 24일의 기간 동안 United Nations Field Observer 들이 한국군 실태를 점검하는데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군은 북침이 전혀 불가능한 방어적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6,25 전쟁과 관련하여 미국이 가장 많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949년 초순부터 미국은 한반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한반도를 포함한 지구상 주요지역에 동맹체제를 구축하고 미군 재무장 차원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6,25전쟁이 3차 세계대전을 막아주었다고 말했다.

이는 6·25를 통해 미국이 냉전 승리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의미다. 1951년 6월 25일 이후부터 정전협정세 이루는 기간 동안 FRUS와 같은미국의 기밀문서를 보면 미국이 한반도 주둔을 구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맥아더는 1949년 초반부터 한반도의 전쟁을 염원했다 맥아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에서 전쟁을 했던 사람이다.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그래서 맥아더와 같은 사람들이 중국 본토를 재탈환하여 장개석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차이나 로비세력들이 미국 내에서 막강한 파워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미 공화당 의원들은 물론이고 맥아더. 딘 러스크. 존포스터 덜러스. 타임지 사주이자 편집장인 헨리 루스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 같은 이유로 미국은 전쟁이 절실히 필요했으며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좋은 전쟁이 한국전쟁이었다.

맥아더의 북진 과정에서 트루먼과 격돌하였다. 결과적으로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한 주요 이유가 만주 폭격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맥아더가 만주 폭격을 주장한 것이 한반도의 통일목적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만주로 진격해서 마오쩌둥을 쫓아내고 장개석에게 돌려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이미 잘 알려진 바처럼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남북한 모두 통일을 열망하고 있었다.

이승만 남북통일 염원 

한편 해방 이후 5년의 기간 동안 소련은 북한지역을 철저한 공산지역으로 만들었고 미국은 남한을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한 1949년 6월 30일부터 6·25가 발발하기 직전까지 이승만 정부는 2,000회 정도 북침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남북통일을 염원하였다. 이 같은 상황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 후 벌어지게 된다. 1950년 6월 9일부터 24일의 기간 동안 United Nations Field Observer 들이 한국군 실태를 점검하는데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군은 북침이 전혀 불가능한 방어적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 북한 주민은 38도선 부근 이북으로 이전하는 등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유엔요원들은 1950년 5월 10일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이 취한 방어적 차원의 조치를 확인한 것이다. 당시 미국이 한반도 전쟁을 필수적인 현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로버트 올리버(이승만 대통령 고문)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49년 10월 27일 보낸 편지에서 미 국무성과 국방성의 분위기가 한반도의 전쟁을 가정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한반도 전쟁시 필연적미며 전쟁의 순간이 보다 다가왔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군의 남침이 갑자기 전개될 것인지 아니면 몇년 동안의 싸움의 결과로 벌어질 것인지 예견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편지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50년 6월 초순 미국주재 한국대사 장면 박사는 한반도의 심각한 상황을 미국에 전달하게 되자 일본과 체결협정 문제로 1950년 6월14일 아태지역 방문을 시작한 존 덜레스가 6월 17일부터 21까지 한국을 방문한 것은 장면 박사가 상기 언급 때문이었다. 덜레스가 6월 19일 이승만을 만나 한국이 북한의 침략을 받는 상황을 조성하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남한이 북한 공산세력을 공격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 유엔을 통해 미국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하였다. 덜레스는 세계인들이 한국이 먼저 공격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할 필요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반도 전쟁과 관련하여 러시아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할 필요가 있었다. 남한의 북한 정복과 관련하여 군사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한 방안은 세계인들이 한반도 전쟁이 북한군의 남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은밀한 방식으로 남침을 부추키는 것이다. 당시 한국방문을 통해 덜레스는 장면의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조만간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덜레스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은폐하고 이승만에게 절대 북침을 하지 말고 방어적 태세 유지만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덜레스는 미 의회에서 한반도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이 도와야 한다고 발언을 하게 된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찰스 월로그비 장군으로부터 북한이 남한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군사정보 보고를 받게된다. 한편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몇일 전인 6월 21일부터 24일까지 존슨 미 국방장관. 브레들리 미 합참의장. 미 국무성 자문위원 덜레스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는 일본에서 극동지역 정세에 관해 회의를 하는데 당시 회의 주요 안건은 아태지역전쟁에서 소련군의 태세 점검이었다.

이들이 주요하게 회의를 했던 것은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 이상으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 이같은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차원뿐만 아니라 미래 아태지역 전쟁에 대비하여 일본을 재무장시키고 미일동맹 체결 필요성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낙동강으로 밀리기 이전 유엔군은 병력 측면에서 북한군과 비교하여 우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전차 및 화력 측면에서 북한군을 압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했던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처럼 6·25 한국전쟁은 미국의 고도의 정치적 성격이었던 것이다. 유엔군의 북진 또한 이미 사전 계획된 것이었음이 1943~1953 당시 외교문서 비밀 해제된(FRUS) 미국자료는 말해주고 있다. 3년여 동안 일어난 한국전쟁은 필요 이상으로 장기간 동안 참혹하게 진행되었고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일본 독일 등 관련국가 국민들에게 일대 충격을 주기 위한 성격이었다.

그 와중에 남북한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음은 물론이고 수백만 인명이 희생되었고 북한지역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다. 6·25전쟁에서 미국이 추구한 목표가 남북통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트루먼 에치슨과 같은 사람들은 이미 전쟁 도중에 말한 바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6·25전쟁을 1949년부터 1952년 12월까지 구상하면서 진두지휘했던 에치슨 국무장관은 6·25전쟁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목표가 남북통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맥아더에게 분명히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고 말한바 있다고 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전쟁을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었다.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을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이기려하지 않았다. 미국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충분한 무기와 전쟁물자를 제공하지 않았고 심지어 고의적으로 방해하려 했던 사실들이 맥아더의 회상록를 보면 작전의 세세한내용들이 당시 국무차관보인 딘 러스크를 통해 영국으로 유출되었고 영국정보부에서는 소련 인도를 통해 중공군과 북한군에 유출시켰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전쟁 중에 맥아더 장군은 마샬 국방장관으로부터 해임까지 당하게 된다. 맥아더장군 후임으로 온 마크 웨인 클락크 장군도 후에 맥아더와 같은 말을 그의 저서에서 밝히기를 내게 맡겨진 것은 전쟁에서 승리가 아닌 방어였으며 나에게 승리에 필요한 무기와 군대가 부여되지 않았다고 회고하면서 눈앞에서 젊은 군사들이 중공군에 의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묵인할
수 밬에 없었다고 하였다.

조지 스트라이트 메이어 장군. 또한 의회에서 증언하길 여러분은 이기려고 전쟁에 참여를 합니다. 정전하고 지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쟁에서 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기려는. 것을 워싱턴은 허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트 클락 장군 역시 나는 적이 수시로 트럭과 군수품과 살인자들을 건네보내는 압록강 다리를 폭격하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압록강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불바다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 사용까지 신중히 고려했던 것이다. 6·25 전쟁은 전적으로 트루먼 대통령과 에치슨 국무장관 그리고 마샬 국방장관이 구상하고 있던 부분을 트루먼은 몹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인을 조명해 본다.ⓒ픽사베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발발한 동족상잔의 비극의 원인을 조명해 본다.ⓒ픽사베이

비노출 요원의 기록 

여기서 한국전쟁 6·25에 대해 미 중앙정보국(CIA)극동지역에서 비노출 요원으로 근무하다 1980년 61세에 퇴직한 한국계 미국인 하리마오씨의 증언록을 기술해 본다.

1945년 2월4일 소련 얄타에서 열린 미·영·소 3국 회담에서 미국은 일본이 항복할 시기를 47년쯤으로 예측하고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청하게 된다. 미국이 이런 부탁을 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육군성을 전쟁성으로 개칭하고 42년 6월 13일 전쟁성 산하에 전략국(OSS)이라는 정보기관을 만들게 되었다. 전략국은 미국 승리를 이끈 주역이었다. 이 기관은 아이젠하워가 이끈 대서양 사령부나 맥아더가 지휘한 태평양사령부의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국을 극도로 싫어한 사람이 맥아더 장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관은 극동지역에서는 거의 활동을 하지 못했다. 소련이 이 틈을 파고들어서 만든 것이 국가보안위원회(KGB)

전신인 인민내무성(NKVD)이었다. 인민내무성은 일본군이 만주에 100만 조선에 50만명이 남아 있다는 거짓 정보를 펴뜨렸다. 이 역정보가 극동사정에 정보가 어두웠던 전략국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전략국은 일본의 저항이 엄청나다고 평가하고 47년 쯤에야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루즈벨트는 이런한 판단을 믿고 스탈라에게 대일선전 포고를 요청하게 되었다. 45년 6월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국은 일본군의 저항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46년 6월쯤 일본군이 항복할 것이라 판단을 수정하게 된다.

한편 국력이 바닥이 난 일본은 7월 13일 전쟁 종결 방식을 논의하기 위해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보내겠다고 스탈린에게 비밀제의를 하게 이른다. 이러한 제의가 미국 정보망에 걸려들었다. 45년 7월 26일 독일 포츠담에서 미.영.소. 정상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 이틀 뒤 일본은 스탈린에게 두 번째 강화조약 중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것 역시 미국 정보망에 포착되고 만다. 그런데 일본은 다음날 (7월 29일)포츠담 선언을 무시하겠다는 보도를 내보내자 이러한 일본의 태도가 미국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을 터뜨려 사상 최초의 작전을 감행하였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 폭탄을 터트리는날 소련은 일본이 곧 항복하리라고 판단하고 사할린

한반도 동북부 만주 등으로 노도같이 밀고 내려왔다. 미국과 소련에 밀린 일본은 8월 10일 포츠담 선언을 수용할 용의가 있다고 최초로 통보를 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지정학적 가치만 중시했을 뿐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에 대해서는 미처 주목하지 않았었다.

일본으로 항복의사를 받고 그때서야 미국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고 소련군은 이미 사할린 만주 한반도로 쳐내려오고 있었다. 이에 미국은 부산에서 부터 1천 1백km 떨어진 오키나와 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미국은 다급한 나머지 8월 10일 밤 11시 30분 전쟁성 전략국 전략정책단 정책과장 본 스틸 대령에게 30분안에 소련의진격을 막을 방안을 마련하라는 명령을 하게 되었다.

극동지도를 보던 본 스틸 대령은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은 소련군이 그 이남은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면 한반도의 적화를 막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45년 10월 1일 미국이 전략국을 해체하고 47년 9월 18일 중앙정보국을 창설하게 된다.

자신의 실수가 한반도에서 분단된 사실을 알게 된 맥아더는 한반도에서 중앙정보국 활동을 묵인을 하게된다, 월로비 소장이 이끄는 정보참모부 (G2)산하에 kLO 부대와 캐넌 중령이 이끈다하여 캐넌부대(일명 Z기관)라고 불린 첩보부대를 두어 소련과 북한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되었다,

또 미국 공군 첩보 부대 ASIS도 한국에서 첩보수집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그러니까 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이듬해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 첩보기관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월로비 소장은 이러한 첩보를 워싱텬에 1천1백 95번이나 보고하였으나 워싱턴에서는 어떠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정확히 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11일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은 이 얄타회담(소련 크림반도)에서 세계2차 대전의 전쟁 완수 및 전후 처리 국제안전보장기관 창설과 일본의 패망으로 한반도를 38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양분시키자는 회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얄타회담에서 중요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 외에 한반도 전쟁과 향후 10~15년후 베트남 전쟁 계획에 합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그러했고 대 테러전쟁에서도 그러했듯 그 뒤에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전쟁자금을 빌려주는 금융재벌(금융 마피아)과 무기상들에 의해 약소국들이 그들의 돈벌이 수단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서글픈 현실이다.
 

※ 외부 필진의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찬옥은…

故김대중 전 대통령 사단인 동교동계 소속으로 현재는 사단법인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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