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혁백 “6월항쟁, 동아시아 자생적 민주화의 최초 사례” [6월항쟁 되짚기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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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혁백 “6월항쟁, 동아시아 자생적 민주화의 최초 사례” [6월항쟁 되짚기⑮]
  • 윤진석 기자
  • 승인 2023.07.17 2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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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혁백 고려대 석좌교수 
“6월항쟁의 결과물 6·29선언 세계사적 의미 커”
“2·12 총선 한국 민주화 대안세력으로서 희망 줘”
“6월항쟁 성공…중산층인 화이트칼라 역할에 주목”
“타협의 민주화로 87대선서 노태우 당선 이어져” 
“미국 레이건의 저강도 전략과 숨은 주역 시그루”
“87체제로 권위주의 때보다 질 높은 경제성장 돼”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윤진석 기자]

임혁백 고려대 석좌교수는 6월 29일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은 동아시아 최초의 자생적 민주화 사례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임혁백 고려대 석좌교수는 6월 29일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은 동아시아 최초의 자생적 민주화 사례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6월항쟁은 동아시아 최초의 자생적 민주주의.”
 

임혁백 고려대 석좌교수가 규정한 6월항쟁의 세계사적 의의다. 그는 현대사 연구 분야의 권위자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6·29 선언이 있던 6월 29일 종로구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학계 관점에서 6월항쟁을 짚어보고 싶었다. 

 

6월항쟁의 세계사적 의미


사진은 6월 항쟁 당시 시청 광장에 시민들이 운집해 있다.ⓒ연합뉴스
사진은 6월 항쟁 당시 시청 광장에 시민들이 운집해 있다.ⓒ연합뉴스

- 세계 민주화 흐름으로 볼 때 6월항쟁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먼저, 세계사적 민주화 물결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보겠습니다.”
 

다음은 개략한 내용.
 

# 1974년 4월 25일 포르투칼에서 군인들에 의한 민주화가 일어났다. 독재 정권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시민들이 철모에 카네이션을 달아주면서 카네이션 혁명이라고 불렸다.

# 포르투칼의 민주화가 스페인으로, 스페인의 민주화가 지중해 그리스로,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남미로 넘어갔다. 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등으로 민주화 물결이 번져나가게 된 것. 


이른바 제3의 민주화 물결이었다. 

- 그 당시 동아시아는 어땠습니까. 

“1974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동아시아는 민주화의 불모지였습니다. 그러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민주화가 일어난 나라가 생겨났습니다.”

1986년 필리핀 2월 혁명이었다.

“마르코스가 민간독재를 하고 있었는데, 정적인 아키노를 살해한 것을 계기로 필리핀 인민이 들고일어난 것입니다.” 

- 필리핀의 민주화가 성공한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공한 데에는 미국의 영향이 컸습니다. 레이건 행정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했기에 가능한 거였지요. 그에 비해 한국의 민주화는 다릅니다.”

- 어떻게 다릅니까. 

“시민들과 야당 지도자들이 최대 다수의 민주화 연합체를 구축해서 권위주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 양보를 얻어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자생적 민주화의 최초 사례를 만든 것입니다. 1987년 독재 정권으로부터 민주화를 받아낸 날이 6월 29일 오늘(인터뷰 당일)이지요.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6월항쟁의 결과로서 가져온 6·29 선언의 역사적 의의는 세계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굉장히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2·12총선의 한국 민주화 역할


임혁백 고려대 석좌교수는 6월 29일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은 동아시아 최초의 자생적 민주화 사례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임혁백 고려대 석좌교수는 6월 29일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은 동아시아 최초의 자생적 민주화 사례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자생적 민주화에서 볼 때 <시사오늘>이 주목하는 것은 제도권의 역할이다. 

- 1985년 12대 2·12총선에서 신민당(신한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기선을 제압해나가기 시작하면서 판이 뒤바뀌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대안이 있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말을 전제로 부연해나갔다. 

“2·12 총선이 있기 전에 전두환이 자유화 조치를 합니다. 억압을 좀 느슨하게 풀어 시민단체를 결성하는 것을 허용하지요. 그로 인해 여러 학생이나 노동자, 예술가 단체들이 일어났고 선거를 앞두고서는 김영삼(YS)·김대중(DJ)두 지도자가 이끄는 양대 민주화 그룹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추진하게 됩니다. DJ는 미국에 망명해 있었기 때문에 동교동계 김상현 국회의원을 대리인으로 내세웠지요. 초당적인 야권에서의 연합이 이뤄지면서 사실상 그 당시 전두환 독재 정권에 신음하는 국민에게는 우리에게도 대안이 있구나, 희망을 심어준 계기가 됐던 겁니다.” 

- 자신감을 얻게 된 기폭제 역할이 돼줬던 거네요. 

“맞습니다. 요즘도 제3정당 움직임이 있지 않습니까. 성공하느냐 아니냐는 대통령 후보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으로 결정되지요.”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양향자·금태섭발 신당 창당이 전개되는 중이다. 대선주자가 없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그리 크지 못할 거라는 회의적 시각이 적잖은 상황이다.

“그만큼 민중을 이끌 지도자가 있느냐 없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양김 두 지도자가 사실상 라이벌 관계에 있지만, 서로 힘을 합해 민추협에 이어 신민당을 만들어 창당한 지 한 달도 안 돼 제1야당으로 부상했잖습니까. 사실상 신군부의 제2중대로 불렸던 민한당까지 흡수했고 말입니다. 민정당에 버금가는 조직을 만든 것 자체가 국민이 볼 때는, 우리가 민주화에 나서도 이끌어줄 지도자가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을 겁니다.”

임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2·12총선이 한국 민주화 과정에 갖는 의미가 크다고 기술한 바 있다. 
 

“2·12총선은 제도권 내 야당이 한국 민주화의 의제를 설정하고 전략을 수립하는데 있어 주도권을 잡게 된 역사적 사건이다. 즉, 의회주의 테두리 내에서 민주화를 추진한다는 국민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2총선 당시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는 민주화 전략을 사회경제적인 구조적 개혁으로 확대하지 않고 정치권력구조로 한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화 의제를 사회경제적 개혁보다 절차적 수준의 제도개혁으로 하향조정하며 이를 의회 내에서 비폭력적인 타협을 통해 달성한다는 전략이었다.”
-임혁백 저 <1987년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 중-

 

중산층과 성공의 위기 


DJ는 처음에 민추협 참여에 소극적이었지만 신민당 승리를 기점으로 민추협에 적극 참여했다. 사진은 1986년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YS가 성명 발표 후 DJ,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DJ는 처음에 민추협 참여에 소극적이었지만 신민당 승리를 기점으로 민추협에 적극 참여했다. 사진은 1986년 유럽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YS가 성명 발표 후 DJ,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 손을 맞잡고 있다. ⓒ연합뉴스

실제로 2·12총선이 있은 지 2년여 뒤 6월항쟁이 일어났다. 

- 6·29선언을 이끌게 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보는 지점은 무엇입니까.

“중산층인 화이트칼라에 주목합니다. 나는 이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어째서입니까. 

“사실상 2·12 총선 이후부터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어떤 상황이었느냐면 독재 정권과 저항세력 간 누구도 먼저 공격할 수 없는 파멸적 균형과 같은 대치상태 국면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 같은 대치상태가 85년에서 87년까지 계속됐습니다. 그 균형을 깨트린 것이 중산층, 화이트칼라였습니다.”

넥타이 부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과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은 이한열 군이 희생된 것이 도화선이 되면서 화이트칼라까지 민주화 연합에 합류하게 됩니다. 야당과 재야, 종교계와 노동자, 학생운동권과 민주화 대연합을 형성하면서 6월항쟁의 커다란 동력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6월 10일 노태우가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모든 계급과 시민이 문턱을 넘어 민주화 대항쟁에 뛰어들게 된 것이지요.”

특히 6월 23일은 거의 100만이 나왔다고 한다. 범국민적 시민의 위세가 짐작되고도 남았다. 

듣고 있자니 전국민적 운동이 되기까지 제도권의 역할은 역시나 컸다는 결론이다. 박종철 군 은폐조작 사건을 천주교에서 폭로하게끔 기획하고, 민추협 등 정치권에서의 움직임을 시작으로 재야, 운동권 학생 등이 모두 참여하는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결성한 데 이어 직선제 개헌이라는 쉬운 슬로건으로 범국민적 운동을 전개해나갔기 때문이다.

임 교수도 이에 공감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이런 슬로건 등은 굉장히 온건한 절차적 민주주의 요구였기에 시민 누구나 동참하기가 쉬웠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모든 국민에게 어필할 수 있던 겁니다. 만약 ‘혁명’을 외치는 강경세력들이 대열의 중심에 섰다면 시민들은 겁이 나서 동참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다행히 국본이라는 다층적 연합이 형성된 데다 전대협 등 학생운동권 내에서도 ‘자민투’라는 온건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중산층에서도 참여가 가능했던 거지요.”

민주주의 단계에서의 중산층은 꼭 필요한 전제조건일까. 이를 묻자 임 교수는 일정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전두환 정권 때 중산층이 많아졌는데, 역으로 민주화 단계의 전제조건이 된 점이 아이러니합니다.

“나는 그것을 크라이시스 오브 석세스(crisis of success, 성공의 위기)라고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전두환 정권이 성공했기 때문에 망한 겁니다. 즉, 전두환이 경제를 성장하고 중산층을 육성했기 때문에 거꾸로 잡아먹히게 됐다는 뜻입니다. 자 보세요. 전두환 정권이 중산층을 키웠더니 이제는 자유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제를 성장시켰기 때문에 권위주의 정권이 더는 쓸모없게 돼버린 거지요.”

 

타협의 민주화와 한계


임혁백 고려대 석좌교수는 6월 29일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은 동아시아 최초의 자생적 민주화 사례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임혁백 고려대 석좌교수는 6월 29일 시사오늘 인터뷰에서 6월항쟁은 동아시아 최초의 자생적 민주화 사례라고 말하고 있다.ⓒ시사오늘 권희정 기자

 

6월항쟁을 두고 피를 흘리지 않고 얻어낸 성공적 민주화라고들 한다. 임 교수는 이를 ‘타협에 의한 민주화’라고 불렀다. 

“한국의 경우는 타협에 의한 민주화입니다. 권위주의 정권과 밀고 당기기 전쟁을 하는 가운데서도 직선제를 다시 실시하고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등 8개 항이 담긴 6·29 선언으로 타협을 한 거죠. 문제가 뭐냐면 양김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 노태우가 민정당 집권당 후보로 나올 수 있게 한 거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양보입니다. 보통 남미나 아프리카 같은 데서 민주화가 일어나면 집권자가 죽습니다. 살해를 당합니다. 한국은 살해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집권당 후보로 존속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결국, 87대선에서의 노태우 당선은 이 타협의 민주화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요.”

- 6·29선언의 저변에는 87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될 거로 본 측면도 있다는 분석도 있더라고요. 

“그 계산을 노태우가 했을 겁니다. 보통 박정희 정권 말기에도 민주공화당 득표율이 35~36% 정도는 됐습니다. 전두환 후반 때도 민정당 득표율이 삼십몇 프로는 됐습니다. 지금도 여권이 되면 기본 베이스가 그 정도는 되지 않습니까? 행정상 얻는 득표율이 있는 겁니다. 여기에 더해 노태우로서는 양김을 분열시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 모두가 집권당 대선후보로 존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전략이었던 겁니다.”

6·29선언을 전두환과 노태우 중 누가 했느냐도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임 교수는 이에 대해 전두환이 아닌 노태우가 주도했을 것으로 봤다. 

“전두환은 본인이 6·29 선언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믿지 않습니다. 객관적이고도 종합적으로 볼 때 6·29 선언을 했을 때 가장 이득을 볼 사람이 누구입니까. 노태우입니다. 손실을 볼 사람은 전두환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할 리가 있겠습니까.”

 

숨은 주역, 시그루의 개입 


- 전두환이 그럴 수밖에 없던 결정타는 무엇에 있다고 봅니까.

“미국의 개입입니다.”

임 교수는 이 같은 취지로 말하며 왜 그런지 덧붙여나갔다.

“6월항쟁이 일어나자, 전두환이 19일 비상계엄을 통해 군부를 투입해야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4시간 만에 철회하고 맙니다. 이때 역할을 한 사람이 제임스 릴리 주한대사였습니다. 미국 정부로부터 계엄령에 반대하는 친서를 직접 전달함으로써 군 동원령을 할 수 없게 한 것입니다. 훗날 회고록에서 릴리 대사는 자신이 주도했다고 했지만, 나는 그의 역할은 부차적이었다고 봅니다. 실제는 레이건 행정부 국무성의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인 게스톤 시구르(gaston sigur)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압니다. 시그루는 필리핀 민주화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활동을 했고, 6월항쟁 기간에도 여러 번 한국으로 날아와 전두환 정권이 군을 투입하지 못하도록 레이건의 뜻을 전하며 자제해라, 압박해 나갔습니다.‘

- 새로 알게 된 내용입니다.

“한국의 은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전두환을 움직일 수 있는 건 미국밖에 없고, 레이건을 설득할 수 있는 자가 시그루였음에도 민주화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다행히 “미국 내에서는 레이건을 도와 제3의 물결을 주도한 공적에 대해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의 이름을 따 조지워싱턴대학 국제대학원 건물 이름도 지어졌다”고 전했다. 

결과적으로, 6월항쟁이 동아시아의 자생적 민주화의 최초 사례라고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87체제 또한 ‘동아시아도 민주화를 이루게 하자’는 미국의 저강도 전략의 일환이었다는 해석이 새로움을 더했다. 

 

87 있었기에 선진화 


6월 항쟁 승리 평가가 1987년12월 26일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게재됐다. 신문은 동아일보 캡처ⓒnewslibrary
6월 항쟁 승리 평가가 1987년12월 26일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게재됐다. 신문은 동아일보 캡처ⓒnewslibrary

임 교수는 87체제 이후 한국 경제가 더욱 성장했다는 이론을 정립한 학자로 유명하다. 인터뷰 말미에는 왜 그런지 물었다. 

“1987 전후 경제실적을 비교한 결과 87 이후 전반적으로 고도성장을 이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말기 IMF가 있었지만, 이는 외부에서 온 위기입니다. 잠시 다운돼 있던 것을 제외하면 87 이후 한국의 경제는 굉장히 질 높은 성장을 거뒀습니다.”

임 교수는 “또, IMF를 극복할 수 있던 것도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종합하면 민주주의가 경제발전 측면에서도 권위주의 체제보다 우월합니다. 만성무역적자 해소되고 인플레이션 줄어들고, 투자율이 늘어나고 소득평등지수도 개선되는 등 모든 면에서 질 높은 성장을 보였습니다.”

그는 “6월항쟁을 통해서 비로소 나는 한국이 선진 민주주의로 도달할 수 있었다고 본다”는데 방점을 찍었다.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민주화가 일어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습니다. 그러나 87 이후 한국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고 자타공인 자화자찬하고 있게 된 것입니다.”

P.S.

요약하면 87년 6·10항쟁 되짚기 15번째는 학자 출신 관점에서 임혁백 고려대 석좌교수의 6월항재이 갖는 세계사적 의의다. YS(김영삼)와 12대 총선의 재발견(정세운)을 모티브로 민주 항쟁의 결집체 역량(김민석), 전대협의 방향 전환(함운경), 비폭력 평화 운동(김현), 4‧13 호헌조치가 결정타(유기홍), 진화하지 못한 586의 명암(明暗)(이현종), 천주교계의 국본 참여(이명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 사건을 알린 특종기자의 투쟁기(이부영),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성공의 결정타(이재오), YS총선 참여, 6·10항쟁의 동력(이성헌), 언론인으로서 바라본 6월항쟁(최문순), 넥타이 부대의 참여 계기(최재호), 6월항쟁 시발전 5·3사태(장기표), 직선제 개헌의 의의(신평)에 이어서다.
 

임혁백 교수는…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 석사 및 박사, 미국 조지타운대학, 듀크대학, 스탠퍼드대학 초빙교수, 미국 민주주의재단 초빙연구원,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임, 현재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정책대학원 원장,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소장, BK21한국정치학의 세계화교육 연구단 단장, 세계정치학회 집행위원.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좌우명 : 꿈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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