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자필승론으로 또 다시 쪼개진 야권 [한국정당사⑩]
스크롤 이동 상태바
4자필승론으로 또 다시 쪼개진 야권 [한국정당사⑩]
  • 정진호 기자
  • 승인 2023.08.29 17: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일민주당, 민주화 이뤄냈지만…DJ, 탈당 선언하며 평화민주당 창당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정진호 기자]

4자필승론에 심취했던 DJ는 YS와의 야권통합 대신 평화민주당 창당을 선택한다. ⓒ시사오늘 정세연
4자필승론에 심취했던 DJ는 YS와의 야권통합 대신 평화민주당 창당을 선택한다. ⓒ시사오늘 정세연

1987년 6월 29일.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DJ(김대중 전 대통령) 등 시국사범에 대한 사면·복권도 단행했는데요. 이는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한 전두환 정권의 전략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의도대로, YS와 DJ는 대통령 후보 자리를 두고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DJ는 YS가 서독 방문 때 “김대중 씨가 사면·복권되면 후보로 지지할 것”이라고 발언했던 것을 내세워 양보를 요구했습니다. 반면 YS는 DJ가 1986년 11월 발표한 “직선제가 수용되면 불출마할 것”이라는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

이후 YS와 DJ는 수차례 회동을 열어 단일화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보름 동안 지속된 양자의 만남은 서로간의 입장 차를 확인하는 자리일 뿐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통일민주당 내 지분구조가 문제였습니다. 당시 민주당의 전국 92개 지구당 가운데 창당지구당은 56곳이었는데, 그 중 30곳이 YS 쪽, 26곳이 DJ 쪽이었습니다.

이에 동교동 측은 상도동계가 창당지구당을 많이 갖고 있으니 미창당지구당 36곳 중 23곳을 동교동계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상도동 측은 18곳씩 50 대 50으로 나눠 임명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지구당 수는 대선 후보 경선 승패와 직결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양측의 줄다리기는 한 달여 동안 지속됐습니다.

그러던 중, YS는 외교구락부에서 DJ를 만나 전격적으로 동교동 측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경선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DJ는 의외의 반응을 내놨습니다. “이제 때가 늦은 감이 있다. 양측이 경선할 때는 지금 같은 정보공작 정치 하에서 위험과 불미스런 사태가 우려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이유였을 뿐, 당시 DJ는 ‘4자 필승론’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4자 필승론이란 노태우(대구·경북), 김영삼(부산·경남), 김종필(충청), 김대중(호남)이 모두 출마해 각자 자기 지역을 가져가면 수도권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후보인 DJ 본인이 당선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결국 DJ는 10월 28일 대선 출마와 평화민주당 창당을 선언하며 통일민주당을 탈당했습니다. 민주화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통일민주당이, 민주화 달성 후 각자의 대권 행보를 위해 쪼개진 모양새였습니다. 이로써 제13대 대선은 DJ의 구상대로 민주정의당 노태우, 통일민주당 김영삼, 평화민주당 김대중,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의 ‘4자 구도’로 치러집니다.

당시 당내 세력 면에서 우세했던 김영삼 씨는 후보 단일화 문제를 민주당 내부 문제로 묶어두고 양자 간 협상으로 해결하고자 한 반면 김대중 씨는 이 문제를 민주당 밖으로 끌어내 외곽 세력의 지원을 받으려고만 했다.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한 양 김 씨는 각각 자신들의 지역적 연고지를 찾아가 관중을 동원함으로써 서로 세 과시를 하는 가운데 각자 별도의 출마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 회고록

하지만 결과는 DJ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노태우가 대구·경북에서, YS가 부산·경남에서, DJ가 호남에서 승리한 것은 계산대로였지만, 충청도에서 노태우·YS 지지표가 많이 나왔고 강원도·제주도도 노태우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수도권에서마저 서울 서북권·동북권·서남권은 DJ가, 동남권은 YS가, 경기도와 인천은 노태우가 승리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4자필승론이 허구였다는 사실이 선거를 통해 증명된 셈입니다.

대선이 끝난 후, YS와 DJ는 자신들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했습니다. 그러면서 4개월 후 있을 제13대 총선을 위해 다시 한 번 야권 단일화 작업에 돌입합니다. 선거를 2개월여 앞둔 1988년 2월에는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이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야권 통합기구 합동회의를 갖고 총선 전 양당을 통합하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통합의 길’ 앞에는 크나큰 장애물이 등장합니다.

담당업무 : 국회 및 국민의힘 출입합니다.
좌우명 : 인생 짧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