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사형수, 실제 전두환 정권에 맞장 뜨려해”
“DJ계 김상현 탄압…돈 받았다는 루머, 사실 아냐”
“통추 독자후보 현실화됐다면?… 盧보단 제정구로”
“새길 모색한 통추, 미묘한 경쟁의식 한계로 작용”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정세운 기자, 윤진석 기자]

같은 꿈을 꿨으나 동상이몽으로 흩어지고만 스타군단들이 있다.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는 야당 주류인 동교동계와 이기택계에 맞선 그룹이 주축으로 모여 만든 정치조직이다. 훗날 노무현이라는 통추 출신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국민들에게 제대로 호소할 수 있는 정치를 해보자는 뜻에서 당대 가장 시급한 화두였던 지역주의 청산을 내걸고 국민통합에 나섰다. 하지만 1년여 만에 김대중(DJ) 지지파와 반DJ파로 갈라져 해체되고 만다. 주류 정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대로 건너가 보려 했던 ‘똘기 어린’ 실험 정신은 여전히 주목할 만하다. 크든 작든 한국 정치지형에 변화를 가져온 통추. 그들이 꿈꿨던 정치 개혁은 지금도 유효할까. 다시 만나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편집자 주>
통추 발자취 개요
통추 인사를 만나기 전에 먼저 통추사(史)부터 훑어본다. 아래는 통추 발자취를 개략한 것으로 다음부터는 그래픽 이미지로 갈음할 예정임을 밝힌다.
-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꼬마민주당+신민주연합당)은 크게 두 파로 나뉘었다. 공천 주도권을 놓고 김대중(DJ)계와 이기택계 갈등이 폭발했다. 경기지사 후보 공천을 놓고서는 점입가경이었다. 선거 후에도 앙금은 가시지 않았다. DJ는 7월 17일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신당 창당을 공표했다. 동교동계와 탈당해 그해 9월 11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민주당 소속 전체 의원 95명 중 65명이나 합류했다.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 민주당은 대폭 쪼그라들었다. 제2야당으로 전락했다. 이철 노무현 김원기 제정구 이규택 이부영 등 꼬마민주당 인사들은 대부분 기존 당에 잔류했다. DJ와 갈등을 벌였던 이기택 등 잔류파들은 1995년 12월 21일 개혁신당(시민운동계열)과의 통합을 선언했다. 이후 통합민주당을 창당했다.
-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이 돌아왔다. 통합민주당은 스타 정치인들이 많았지만 소선거구제 하에서 거의 전멸했다. 신한국당 국민회의 자민련에 이어 4당으로 밀려났다. 15석(지역구 9석+전국구 6석)에 그쳤다. 지역구는 이부영(강동갑) 제정구(경기 시흥) 황규선(경기 이천) 이규택(경기 여주) 최욱철(강릉) 장을병(강원삼척) 권오을(경기안동갑) 이규정(울산남구) 권기술(울주), 전구국(비례대표)는 이중재 이미경 이수인 김홍신 조중연 하경근이 당선됐다.
- 총선 참패를 계기로 통합민주당은 내분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상임고문이던 이기택계와 비주류이자 범개혁 세력인 구당파(김원기, 이철, 유인태, 노무현, 박계동, 원혜영, 박석무 등) 간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1996년 6월 4일 임시 전당대회가 열렸다. 결과는 이기택의 승리로 돌아갔다. 개혁세력 중 일부는 이기택이 총재로 선출되자 당직을 맡지 않겠다고 반발했다.
- 민주당은 1차 분당 사태(DJ탈당) 이후 또다시 제2차 분화의 시기로 빨려 들어갔다. 1996년 9월 23일 통합모임을 주도했던 개혁성향 인사들은 ‘지역할거주의 극복과 정치개혁’을 기치로 ‘개혁과 통합을 위한 국민통합추진회의’(약칭 통추) 결성을 추진했다. 김원기 장을병 제정구 이수인 이미경 김홍신 노무현 이철 박석무 원혜영 김원웅 유인태 홍기훈 황의성 등 23명은 이날 준비위 결성식을 개최했다. 이부영 박계동도 뒤늦게 합류했다. 당권파인 이기택 측은 통추 결성을 반당 행위로 보고 최후통첩으로 양자택일을 요구했으며 중징계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이철은 6개월 당원권 정지를 당했다.
- 통추는 예정대로 1996년 11월 9일 김원기 장을병 주도하에 롯데호텔에서 정식 출범했다. 종교 시민사회단체 인사들까지 결합해 300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석했다. 상임공동대표 김원기를 비롯해 장을병 신경림(시인) 송기숙(소설가) 유창우(영남대 총장)가 5인 공동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6인 고문에는 송월주(조계종총무원장) 박형규(목사) 백낙청(서울대교수) 이호철(소설가) 박찬석(경북대총장) 김진홍(두레공동체운동본부대표)이 맡았다.
- 사무총장에는 제정구, 총회 의장 이철, 감사 박석무, 정책위원장 김원웅, 교육연수위원장 유인태, 홍보위원장 성유보(전 한겨레신문편집위원장), 기획조정실장 홍기훈 등이 선임됐다. 창립선언문에서 통추는 “망국적 지역할거정치를 극복하고 지역 계층 세대 간 대립과 갈등을 치유, 21세기 민족통일시대와 정보화 사회를 이끌어 나갈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하는데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통추 멤버 중 원내 의원은 제정구 이부영 장을병 김홍신 이수인 이미경에 불과했다.
- 지역주의 극복과 국민통합의 역사적 대전환을 내걸은 독자적인 정치결사체가 출범함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15대 대선을 앞두고 통추가 정계개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촉각을 세웠다. 창립대회에는 신한국당의 강삼재 사무총장, 서석재 의원, 이인제 경기지사 등이 화환을 보내왔고, 국민회의에서는 김원길(김근태 부총재계) 김종배 의원(김상현 지도위의장계) 등이 축하 자리를 함께했다. 이기택 중심의 주류 측은 통추 참여 인사들의 출당 조치를 추진했지만, 김원기 전 대표 등은 나갈 이유가 없다며 맞섰다. 이들은 1996년 11월 9일 서울 동숭동 흥사단강당에서 칭립기념토론회를 열고 DJP연대를 맹렬히 비판하는 등의 첫 공식 행보에 나섰다.
- 통추 멤버 중 이철 김원웅 유인태 노무현 박석무 홍기훈 원혜영 박계동 등 15대 총선 낙선자들 20여 명은 각 4억 원을 출자해 1997년 3월 7일 강남구 역삼 전철역 부근 2층 단독건물에 한우 고깃집 ‘하로동선’을 공동부업 형태로 개업했다. 여름 화로나 겨울 부채처럼 당장은 필요 없지만 때가 되면 꼭 필요하게 될 거라는 뜻에서 하로동선을 간판으로 내걸었다. 정직하게 장사하고 질 좋은 고기를 제공해 맛으로 승부하겠다는 경영 원칙 아래 많은 손님을 끌었지만 실속 없이 운영해 경영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1년여 만에 조기 폐업했다. 한편 김원웅 김홍신 노무현 박계동 박석무 원혜영 유인태 이철 제정구 홍기훈 장두환 11명은 하로동선을 운영하는 동안 <의원님 장사는 잘돼요?>라는 제목의 수필집도 냈다.
- 15대 대선이 다가오면서 통추는 ‘반3김+세대교체론’이라는 공감대 안에서 진로를 모색했다. 우선 독자후보 추진파가 있었다. 대권을 꿈꾸던 노무현 전 의원이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는 1997년 9월 이인제 전 경기지사가 세대교체론을 내세워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3김 정치에 한 번도 저항한 적 없는 이 전 지사로는 올바른 세대교체가 될 수 없다”며 자신이 직접 나설 것을 표했다. 또, 통추에서 독자후보를 내야 한다는 것과 자신이 대선주자가 안 되더라도 결과에 승복할 것을 약속했다. 반면에 원혜영 김홍신 이미경 등은 독자후보론에 반대했다. 이들은 ‘조순-이인제 야권 연대론’을 주장했다.
- 여야 양대 축인 이회창 vs DJ 쪽에서는 세력화에 집중했다. 영남권 출신의 통추 인사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 기간 통추 내부에서는 격론 끝에 10월 14일 상임집행위원회를 열고 노무현 전 의원이 제기한 독자후보론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독자후보를 내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이후 통추는 ‘조순-이인제 연대’ 노선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듯했으나 다른 무엇보다 ‘정권교체론’이 우선돼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따로국밥 분위기로 흘러가게 됐다. 김정길 노무현 박석무 홍기훈 김원웅 유인태 원혜영 등은 DJ 지지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DJ 지지파들은 통추 내 다수가 돼갔다. 제정구 이철 등은 3김 청산을 주장해오던 통추가 DJ를 지지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며 반대했다. 양측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렸다.
- 1997년 10월 27일 밤 JP의 청구동 자택에서는 DJP 연대가 18개월간의 협상 끝에 극적으로 마무리됐다. 통추 내 DJ 지지파들은 DJP연대 합류에 몸을 실었다. 노무현 박석무 홍기훈 김정길 유인태 원혜영 이상 6명은 1997년 11월 10일 여의도 63빌딩에서 DJ를 만났다. 이 자리에 김원기는 참석하진 않았지만 국민회의 입당 의사를 미리 밝힌 터였다. 이들은 DJ를 향해 1995년 분당 사태를 일으킨 것에 대해 우선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DJ는 “결과적으로 여러분들이 희생되고 피해를 본 데 대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 DJ 지지파들은 1997년 11월 14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식으로 국민회의 입당을 선언했다. 김원기 김정길 노무현 원혜영 유인태 박석무 홍기훈 황의성 이상 8명이었다. 통추와 국민회의는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정권교체가 이 시대 최대의 사명이고 최고의 개혁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 한다”고 선언했다. JP와의 연대에 이어 통추 합류파들까지 흡수한 DJ는 경북을 대표하는 박태준과의 연대 구축을 향해 나아갔다.
- 제정구 이철 김홍신 등 통추 잔류파들은 반DJP 연합을 선언했다. 이들은 신정치추진연합(신정연)을 결성하고 “이번 대선에서 낡고 부패한 정치세력의 청산을 위해 노력할 것”을 결의했다. 신정연의 대표로는 홍성우를 선출했다.
-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는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대에 대한 맞불 공략로 반DJP연합 세력 수혈에 공을 들였다. 3김 정치 청산과 새정치세력, DJP연대에 의한 내각제 저지, 세대교체론 등을 명분으로 민주당 총재인 조순을 만나 이조(이회창-조순) 연대를 가시화 했다. 조순은 97년 11월 6일 대구 방문 뒤 김포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반DJP연합 전선의 필요성을 강조, 사실상의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다.
- 통추 잔류파 중 제정구 이철 홍성우 등 신정연의 전직 의원들도 얼마 안 있어 이회창-조순 연대에 합류했다. 신정연의 김부겸(전 민주당 수석부대변인), 이강철(통추상임집행위원), 장두환(역사비평 발행인), 강승훈(전 대한일보편집국장) 등도 동참했다. 이회창은 97년 11월 15일 신한국당 입당 의사를 밝힌 제정구 김홍신 이철 홍성우 등 신정연 멤버들과 63빌딩에서 조찬을 갖고 “양심을 대표하는 세력이 동참해줌으로써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라며 환영했다.
-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은 민주당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합당 전당대회를 열고 한나라당을 공식 출범시켰다. 창당선언문에서 “이 땅의 정치를 40여년이나 지배해온 낡고 부패한 3김 정치를 청산하고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한나라당의 기치를 들어올린다. 국민대통합의 정신을 바탕으로 대화합의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정치를 지향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창당을 지켜본 신정연도 정식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 통추에는 또 다른 잔류파가 있었다. DJ 지지도 반대하고,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통합도 거부해온 이들은 ‘내각제 저지를 위한 민주연합(민련)을 결성했다. 홍영기(전 국회부의장) 이부영 권기술 박계동 전 의원 등 30여 명의 전현직 지구당위원장 등이 속했다. 이들은 처음엔 이인제가 이끄는 국민신당행을 고민했다. 국민신당으로 먼저 가 있던 장을병 등과 만나 입당 절차를 논의하기도 했다. 김원웅은 아예 국민신당에 입당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 국민신당의 이인제는 11월 14일 이부영과 단둘이 만나 통합 거부파들의 입당을 권유했다. 이부영은 유보 입장을 보였다. 국민신당행을 고려한 것은 맞으나 반DJP연합 전선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후보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부영 박계동 김종완 등은 11월 23일 “이회창과 이인제 후보 단일화를 위해 한나라당에 입당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당초 국민신당행을 선언했던 김원웅도 한나라당으로 선회했다.
- 결과적으로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한 DJP연합 지지파들 vs 반DJP연합파들로 갈라진 꼴이 됐다. 일부 국민신당으로 옮긴 것을 제외하면 크게는 국민회의와 한나라당으로 나뉘었다. 야심차게 새정치의 꿈을 안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차츰 동상이몽 되더니 1년여 만에 간판을 내리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미완으로 남은 이들의 정치 실험은 이후에도 크고 합종연횡과 정계개편의 과정 속에서 영향을 미치며 향후 정치 과제를 볼 때 오늘날까지 유의미한 시사점을 남기고 있다는 평가다.
통추 되짚기 첫 번째, 이철

첫 번째 통추 되짚기 인터뷰 주인공은 이철 전 국회의원(이하 이철)이다.
정치인 이철, 다음의 특징이 있다.
- 민청(민청학련 사건) 세대의 대표 재야 출신 정치인이다. 삼선개헌 반대운동, 유신 철폐 운동, 신군부 독재 타도 운동 등에 가담했다. 민청학련 사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천신만고 끝에 풀려났다. 광주 민주화운동 때는 신군부의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휘말려 고문을 받았다. 대표 재야인사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 12대 총선의 선거혁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인이다. ‘돌아온 사형수’라는 파격적인 홍보 문구로 처음 나간 12대 총선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정치 신인임에도 단기필마로 거물들을 물리쳐 이겼다. 국회의원이 되면서는 신군부 비판에 맹렬히 나섰다. 개혁파로서 깨끗한 정치 문화 만들기에 기여했다.
- 권위주의 타파에 앞장선 정치인이다. 통추 활동 등을 통해 3김 청산, 반DJ 노선을 주도했다. 권위주의 정치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이를 타파하는 데 애썼다. 권력욕과 거리가 멀다. 원리원칙주의 면모의 정치인이다. 87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를 끝까지 외쳤다. 꼬마민주당, 통추에 이르기까지 정치 현실에 유연하게 대처하기보다 처음 세운 원칙을 고수하는 정치 활동을 해왔다.
- 엘리트 정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진 정치인이다. 교육자 집안으로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한 수의사 출신의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한 아들로 인해 부모는 오랜 시간 정보국의 감시 속에서 살았다. 형제들이 모두 공부를 잘했다. 본인도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지만 엘리트 정치를 강하게 비판해왔다. 한나라당을 떠난 이유가 됐다.
12대 총선과 돌아온 사형수
이철과는 지난달 5월 29일 여의도 공삼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짙은 눈썹과 가무잡잡하게 그을린 왜소한 몸집에서 어딘지 단단한 아우라가 풍겨났다. 점잖게 생긴 왕년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다. 인터뷰하는 동안 긍정할 것은 긍정하며 조리 있게 말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담백한 여유가 느껴졌다.
‘돌아온 사형수’
마주 보고 앉은 얼굴 위로 1985년 12총선 때 봤던 포스터 문구가 선명하니 겹쳐 떠올랐다.
- 편하게 시작하겠습니다. 12대 총선 때 정치를 처음 시작했잖습니까.
“네. 그렇지요.”
- 저는 그 시절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아하. 그런가요.”
- 선거 기간 의원께서 들고나온 ‘사형수 돌아왔다’ 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굉장히 히트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 누가 만든 것인지가 궁금하더라고요.
“정확히 누가 낸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도 고대 학생운동권 쪽에서 나온 것을 채택했던 것 같습니다.”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것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선거운동 기간 형무소 가도 좋다는 각오로 임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 군사정권과 정면 대결하는 후보라는 점을 부각하는 가장 적합한 구호였다고 본 것이지요.”
말하는 눈빛에서 추억의 커튼이 어른거렸다.
“선거를 도와준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김상현(후농, 5선) 씨 주변에 있던 정치인들부터 운동권 학생들까지…. 고대생들이 제일 많았고 국민대, 성신여대 학생들도 도와줬지요. 설훈(고대, 5선) 씨가 열심히 진두지휘 해줬습니다. 애를 많이 썼던 기억이 납니다.”
새록새록 한 듯 보였다.
- 처음, 정치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계기는 무엇입니까.
“배경부터 말하자면 당시 학생운동 출신들은 크게 두 부류였습니다. 정치 활동을 통해 사회 개혁에 몸을 바치겠다는 쪽, 현실 정치를 굉장히 멀리하고 경원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 본인은 어느 쪽이었나요.
“나는 후자에 속했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강한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었습니다.”
- 정치에 대해 왜 부정적이었던 겁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정치를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잖습니까. 나 또한 그런 것에 물이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정치는 더럽고 건달이나 깡패들이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지구당 같은 곳에 깡패 출신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속된 말로 나 같은 고귀한 사람과는 안 맞다, 그런 결벽주의가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 처음엔 어떻게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건가요.
“12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YS) 씨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들었습니다.(이철이 지칭하는 정치인들은 모두 편의상 ~씨로 통일한다) 김대중(DJ) 씨는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김상현 씨가 실질적으로 동교동계를 대표해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도동 김영삼, 동교동 김상현 이 두 분이 민추협을 만들었지요. 12대 총선이 다가오고 민추협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신민당)을 창당해 각 후보들을 선정했습니다. 유독 성북구에 적당한 인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수소문해 봐도 안 되니까 구(舊)정치인 출신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인물, 즉 재야 쪽에서 발탁을 하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던 겁니다.”
하루는 선배(김승균)로부터 연락이 왔다.
“운동권 선배인데 어느날 아침 일찍 전화가 왔습니다. 신촌 어딘가에서 점심을 같이 했지요. 갈 데가 있다고 해서 뒤따랐더니 김상현 씨 집이었습니다.”
김상현은 이철을 만나서는 성북구 출마를 권유했다. 이철은 펄쩍 뛰었다. 몇 시간 동안 논쟁이 벌어졌다. “당신 밖에 없다.” 그 말에도 이철은 “정치하기 싫다”면서 완강히 거절했다.
엉뚱하게도 곧이어 두 손 두 발 드는 일이 생겨났다. 김상현을 만난 당일 오후 4시가 넘어섰을 때였다. 그 시각 가판대에서는 막 석간신문이 배포되고 있었다. 김상현은 그것을 사 오라고 했다. 가판대로 간 이철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 <동아일보>에 ‘성북구 이철 출마’라는 기사가 조그맣게 나 있는 겁니다.”
이철을 설득하기 위한 포석으로 사전에 기사부터 내고 본 것이었다.
- 놀랬겠습니다.
“네. 그걸 보니까, 뭐랄까. 기운이 쭉 빠지더라고요. 내가 나가든 안 나가든 일반인들이 알기론 이철이 출마하기로 한 것이 기정사실처럼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김상현 씨가 노렸던 게 그런 것이겠죠.”
기세가 꺾인 이철은 “어차피 버린 몸이다, 나가서 흙탕물에 몸을 담그자”라고 생각했다. 마지못해 출마를 결심하게 된 배경을 전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 큰 모험이었겠습니다.
“근데 나는 전두환 군사정권을 정면으로 들이받으면 승산이 있다, 이길 수 있다고 봤습니다.”
호기 어린 그때로 돌아간 듯 눈을 반짝였다.
- 그런가요. 정치권 인사들부터 일선 기자들까지 신민당이 제1야당이 될 것이라고는 많이들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던데요.
“(이철의) 주변에서도 그랬습니다. 운동권 선배들한테 출마한다고 하자 당선될 것 같으냐고 묻더라고요. ‘당선될 것 같다’, ‘네가 돌아도 완전히 돌았구나’ 혀를 차더라고요(웃음).”
- 어떻게 자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글쎄요. 나는 재야운동을 하면서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민들 정서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지요.”
DJ와 김상현, 바로잡고 싶은 오해

-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종로‧중구 같은 경우 상도동 몫으로 이민우(6선) 후보가 나섰잖습니까. 미국에 있던 DJ가 정대철(5선, 현 국회 헌정회장) 후보를 측면 지원하면서 신민당 vs 민한당 구도가 됐고 말입니다. 성북은 동교동계 조윤형(6선) 후보가 나섰는데 DJ가 지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후농(김상현)이 이철을 낙점하는 바람에 (DJ, 김상현) 둘 사이가 벌어졌다는 얘기가 있었는데요. 어찌 봅니까.
“네. 그것은 사실입니다. DJ는 신민당 창당도 반대했습니다. 대놓고 비토는 못하고 은근히 측근들한테 신민당은 안 된다, 민한당을 지원하라고 한 것으로 압니다. 귀국해 돌아와서는 신민당 창당 자금 출처를 놓고 김상현 씨를 심하게 문초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을 때 안타까웠지요.”
이철은 민추협에서 김상현 권한대행 비서실장을 맡았다. 옆에서 지켜보며 마음이 안 좋았던 듯했다.
- DJ는 왜 그랬다고 봅니까.
“자신의 이름을 팔아 신당 창당 자금을 거둬들이고, 총선에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주머니에 넣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 동교동계에서 그런 이야기를 흘렸던 것은 기억납니다. 후농이 돈을 받은 게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닙니다. 전혀 반대입니다.”
표정이 단호해졌다.
“김상현 씨는 진짜 눈물겨울 정도로 민정당을 박살내는 선거에 자기 전력을 쏟았습니다. 돈을 챙긴 게 아니라 거꾸로 없는 가산까지 동원해 총선 자금으로 150%, 200%까지 썼습니다. 터무니없는 오해였고 반드시 수정돼야 할 부분입니다.”
마당발이던 김상현은 주변에 아낌없이 베풀었던 인물로 유명하다.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부인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전해진다. DJ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했다. 그런 그가 DJ의 반대에도 YS와 함께 민추협을 만들고 신민당을 창당한 것은 민주화 신념 때문이었다는 게 통설이다.
필자는 12대 총선 당시 ‘악성 루머를 들은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생전 후농을 만나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제가 청와대에서 돈을 받았다거나 정보를 넘겨 동교동을 팔고 다닌다는 등의 헛소문이 돌았습니다. 역사는 진실에 있는 것입니다.”
-김상현, 2009년 <시사오늘> 인터뷰 중
- 당시 모함에 대한 후농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참 특이한 것은 김상현 씨가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한마디 이야기도 안 하고 반박도 안 했다는 겁니다.”
평소 성정이 어떨는지 가늠됐다.
“DJ와 같이 일할 때뿐 아니라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거기에 대해 서운한 말을 꺼낸 적이 없습니다.”
이철은 그리 말했지만, 필자가 아는 후농은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뒤 가슴속 이야기를 꺼낸 바 있다.
정치 말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후농은 필자와의 대담 중 “DJ에 헌신했지만 돌아온 것은 외면뿐이었다”며 씁쓸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 그런 루머가 돌 때 주변의 반응들은 또 어땠습니까.
“주위에서야 김상현 씨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말도 안 된다고들 봤습니다. 동교동계에서 김상현 씨한테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많이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 왜입니까.
“그게 일반적인 동교동 주류의 압도적 흐름이었기 때문입니다.”
- 후농이 평민당(평화민주당)을 안 따라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그런 이유도 좀 있었을 겁니다. 이후 동교동 세력과 밀착할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지요.”
- 결국 조윤형이 민한당 후보로 출마해 성북구에 나서지 않습니까.
“민한당에서는 조윤형 씨, 민정당에서는 김정례(보건사회부장관, 재선) 씨라는 거물이 출마했지요”
다시 12대 총선 이야기로 돌아왔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내용이지만 재야 출신의 김정례 씨를 발탁한 것이 전두환 씨입니다. 그 집(전두환) 안방 문을 마음대로 출입할 정도로 가까웠던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거물들 틈바구니에서 성북은 신민당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돌았습니다. 차라리 새로운 인물을 찾아서 시험대로 한번 돌격해 보자는 의미로 나를 영입한 것이었지요(웃음).”
신민당의 신인을 내보내는 전략은 대성공이었다. 중선거구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민정당 김정례와 더불어 신민당의 신예 이철이 당선됐다.
87, 후보단일화 운동
- 87년 대선 때는 어떤 입장이었습니까.
“후보단일화 편에 섰는데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통일민주당 내 후보단일화 성명에 동참한 의원만 40여 명이었는데 다음날엔 20명, 또 그다음엔 절반으로 줄어드는 겁니다. 종국엔 최후 5인방만 남게 됐습니다.”
- 왜 그런 겁니까.
“다음 공천과 연관된 권력 지향적인 면모들이 드러난 것이지요.”
이철은 후보단일화 추진을 강하게 촉구했다. 민주당의 박찬종 조순형 홍사덕, 평민당의 허경구 의원과 함께 후보단일화를 강하게 촉구하는 소장파 5인방으로 불렸다. 양김 후보단일화 협상이 결렬되자 이들은 1987년 11월 6일 소속당을 탈당해 단일화 운동을 이어나갔다.
“거기까지는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요?(다음 말이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양자택일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좀 아쉽습니다.”
후회하는 듯했다.
“후보단일화가 안 될 경우를 대비해 차선책을 세웠어야 했습니다. 두 사람 중 좀 더 단일화에 적극적이었던 후보를 지원하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 양김 중 어느 한쪽 손을 들어줘야 했다고 본 것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철저히 중립을 지켰다.
- 그때는 왜 그랬던 겁니까.
“당위론적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후보단일화를 통해서만이 민주주의를 앞당길 수 있다고 봤습니다. 마치 해방 이후 반민특위를 가동해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해야 했듯이 후보단일화를 통해 민주화 세력이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때만이 군정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야만 군정세력들이 다시는 얼굴을 들이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다른 방도를 찾았어야 했습니다.”
- 다시 돌아간다면 누구를 지원했어야 했다고 봅니까.
“그 당시는 YS가 후보단일화에 더 적극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YS가 단일화에 나서고자 동교동에서 내세운 조건들을 모두 수용했는데 DJ가 굳이 안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87년 12월 11일 남산외교구락부. YS는 동교동계 요구를 모두 수용하며 단일화 협상 테이블에 나왔지만 DJ가 불참하고 따로 나가 평민당을 창당해 독자출마하면서 야권 단일화는 실패로 돌아갔다)
“후보단일화하면 정치계의 대변혁이 만들어질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DJ쪽에서는 4파전이 더 유리하다고 봤던 것 같습니다. 누군지 알지도 모르지만 허 모 씨라는 분이 4자필승론 논문을 만들어 DJ한테 갖다 준 것으로 압니다. DJ가 거기에 심취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중정(중앙정보부)이나 민정당 핵심세력의 큰 그림일 수 있다. 그쪽에 더 강한 의심이 든다”며 후자에 무게를 뒀다.
-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DJ한테는 4대 불가론이란 게 있었습니다. 영남, 기업인, 군인, 공무원들이 강하게 반대하는 상황이라 DJ로서는 정권을 잡기가 일단은 불가능했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YS를 밀어주자니 상도동계가 집권 세력이 돼 동교동계는 몰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들었을 겁니다. 야권이 분열되는 것은 안타까웠겠지만 정권을 못 잡더라도 민주세력의 한 축을 이끄는 수장으로 남아 권력을 유지하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YS가 대통령이 되면 동교동계가 절멸하다시피 해 정치적 기반마저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근데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하는 행동이 분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요.”
15대 총선과 마타도어

- 13대 총선 때 말입니다. 소선거구제였기 때문에 어느 한쪽을 선택해서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도 무소속으로 나왔습니다.
“네.”
- 그때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겁니까.
“뭐 자신이라기보다 그 길밖에 없었습니다.”
담담한 말이었다.
“당시 나는 양김이 후보단일화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1988년 13대 총선을 앞뒀을 때도 야권통합 추진에 매진했다. YS는 87 단일화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야권 통합 차원에서 통일민주당 총재직을 내놓았다. DJ가 요구하는 소선거구제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합당 직전 DJ측은 약속을 깨고 무산시켰다. 소선거구제로 처음 치러진 13대 총선은 철저히 지역주의 선거로 치러졌다. 이철은 그때도 누구 편에 서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 13대 총선에서 기호 7번을 달았는데 이겼습니다.
“성북구의 최 모 신부님을 비롯해 의식 있고 뜻있는 많은 분들의 도움 때문에 이길 수 있었지요(웃음).”
- 14대 총선 때도 여유 있게 당선이 됐는데 15대 때는 어려웠지 않습니까.(이철은 4선 고지 앞에서 무너졌다) 당시를 보면 DJ가 통추 멤버들을 떨어뜨리려고 집중적으로 저격했던 느낌이 들었거든요.
“집중적으로 견제했죠.”
고개를 끄덕였다.
- 예를 들면요?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기고 있었는데 선거일 20일 전쯤 되니까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겁니다.”
-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주로 택시기사들한테 많이 뿌려진 내용이었는데, 국회의원하면서 내가 수백억 원대 재산을 축적했다는 거짓 악성 루머였습니다. 나중엔 선거 참모들까지 ‘그게 진짜냐’며 묻는 겁니다. 너무 황당해서 내가 그랬습니다. ‘그런 돈 있으면 좀 찾아와라. 당신들 다 줄 테니까.’ 급기야 ‘재산을 찾습니다’ 라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일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근데 이미 소문이 굉장히 많이 퍼진데다 심지어 등기부등본을 본 사람들까지 있다는 얘기가 도는 겁니다.”
-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알고 보니 동명이인의 주민등록등본과 재산서류를 복사해 내 것인 양 꾸민 것이었습니다.”
- 누가 한 소행인지는 밝혀졌습니까.
“평민당 청년부 당직자가 돌린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상대 진영의 간부 2명이 구속됐다. 하지만 선거에 끼친 악영향은 복구되기 어려웠다.
“선거 열흘 전부터 (지지율이) 급격히 추락하고 만 것입니다. 처음엔 압도적으로 유리했는데 결국 큰 표 차로 떨어졌지요.”
- 선거무효소송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까.
“주위에서도 그리 권유해왔지만 굳이 재판까지 하면서 정치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선거를 치러야 하나? 싶었습니다.”
마타도어까지 당하니 더 할 의욕이 없어진 듯싶었다. 어느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는지는 과거 수필집(하로동선 멤버들이 공동으로 출간한 <의원님, 장사는 잘 돼요?>)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선거운동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집에 들어왔던 나의 눈에 시무룩하니 앉아 있는 초등학생 막내 딸애가 보였다. ‘우리 반에 한 아니가 너희 아빠 도둑질해서 땅부자라며?’ 하길래 대판 싸웠어.’ 아뿔싸! 그들이 만든 야비한 흑색선전이 마침내 이 어린 아이의 가슴까지 멍들게 만들고 말았구나. ”
-이철, <의원님들 요즘 장사 잘 돼요?> 수록 중
- DJ가 왜 굳이 통추 의원들을 타깃으로 삼았다고 봅니까.
“주민등록등본 사건은 DJ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리 말하면서도 그는 “아마도 지나치게 자신과 반대되는 행보를 보이는 정치인들이 거북했겠지요. DJ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모호하게 말을 흘렸다. 그는 15대 총선 당시 낙선 소감을 묻는 기자들 질문에 “DJ가 이겼다”고 한 바 있다.
- 거꾸로 보면 권력 의지가 다른 정치인에 비해 좀 약한 것 같습니다.
“사실상 없다시피 한 거지요. 처음부터 정치할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 내리 3선이나 했는데요?
“하다 보니까 자동적으로 출마하게 된 것이지요. 12대 총선 이후 두 번째 출마할 때는 나름의 명분도 있었습니다만, 이후부터는 관성적으로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왕 떨어진 김에 손을 털자는 생각이 더 컸던 것이지요.”
- 생전 유성환 의원 얘기론 군사정권 시절에는 수표를 뿌리는 등 민주계에 대한 회유가 많았다고 하던데요. 그런 경험은 없었습니까.(화제를 돌려 이 말을 물었다)
“글쎄요. 나한테는 아주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회유했다가는 내가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 근처에도 못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꼭 회유가 아니더라도 옛날에는 같은 민주 진영 안에서도 계파별로 돈을 만지는 사람이 있으면 암암리에 동료 정치인들에게 나눠주고는 했잖습니까.
‘아무개 돈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말도 공공연하게 나왔고 말입니다. 누군지는 못 밝힙니다만 그분과 아는 사이였음에도 나는 한 번도 돈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식사 한 번 얻어먹은 것도 없고, 커피 한 잔 마신 적이 없지요. 내가 미워서 안 줬겠습니까. 잘못 줬다가는 오히려 고지식한 나로 인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몸을 사려 안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통추와 반DJ 노선

- 통추 얘기로 넘어오면요.
“네.”
- 모두 DJ한테 안 간 분들입니다. 듣기론 DJ의 수직적 리더십을 너무 싫어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것은 사실입니다. 여느 정치인들보다 DJ가 훨씬 더 유연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는 면모가 있다는 것도 압니다. 결코 독선적인 분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때는 자기를 따라오라며 강하게 주장하는 모습을 볼 때 좀 심하다고 느꼈습니다.”
- 동교동계에서는 DJ를 일컬어 무오류의 정치인이라고 했지요.
“하하.”
그 시절이 생각난 듯 호탕하게 웃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리더십이 아니고선 야당 세력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 생각이 달라진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죠.”
수긍부터 하면서 부연해나갔다.
“당시 나는 너무나 원리주의자적인 면모 또는 결벽증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완벽한 정치 지도자, 완벽한 정치 그룹을 찾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당시 그나마 DJ가 가는 길이 차선이라도 생각됐다면 마지못해서라도 그 길을 뒤따라가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후회스러운 것일까.
“나름대로는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생각을 읽은 듯 그리 답했다.
“그러니까 87 대선 때 양김 단일화가 안 됐다면 YS라도 지원하는 것이 옳았고, 3당합당 후에는 DJ가 어떤 부분적인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을 한 것이 있더라도 통추 전체가 그쪽으로 가는 게 더 옳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콕 강조하고 싶은 눈치였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환을 뒤로 남겨두고 다음의 질문에 주목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통추만의 단일후보론을 주장했잖습니까.
“그렇지요.”
- 일각에서는 어떤 초조함의 발로 때문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
무슨 얘기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다.
- 다른 통추 분들은 15대 총선에 떨어져도 좀 여유가 있었다고 보였는데요.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역으로 물어왔다.
- 명문대 출신이고 명성도 있고 인맥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가든 충분히 정치권에 발 디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단 말이죠. 반면에 노 전 대통령은 학력 콤플렉스도 있었고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지지 않은 데서 오는 어떤 초조함 때문에 독자후보를 주장한 게 아니었겠느냐. 그리고 이후 DJ한테 간 것도 결국 그런 이유에서 오는 초조함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얘기를 듣고 보니 일부분 동의를 합니다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그것이 독자후보론을 내세운 데 대한 주요 원인이었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 그럼 뭡니까.
“초조함보다는 새로운 어떤 개혁적 기치를 내걸자는 당위론적 입장에서 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추의 여력으로 봐선 돌출 발언일 수도 있다고 봤지만 당시는 뭐랄까, 양김 정치의 용납할 수 없는 점을 인식하고 있던 상황이라 (노무현 주장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만 우리가 후보를 내게 된다면 어떤 성과를 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런 것을 기대하기에는 부족한 상황이었던 점이 아쉬운 일이었지요.”

- 권력욕을 위해 DJ한테 갔다는 일부 평가에 대해서는 어찌 봅니까.
“터무니없다고 생각합니다.”
- 학력 콤플렉스 때문에 더 많이 초조했을 거라는 얘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노무현 씨는 지금까지 본 정치인들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학력 콤플렉스를 갖고는 있었지요. 그런데 학력이나 다른 커리어로 우월감을 갖는 자기중심적 엘리트주의자들이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 혹 이회창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정확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었죠. 요즘 윤석열 대통령이 갖고 있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절대로 굽히지 않는 고집 같은, 그런 특성이 있지요.”
그리 말하며 캔커피를 들이켰다. 이철은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 윤 대통령에 대해서는 이때만 잠깐 언급한 것임에도 강한 비판 의식이 느껴졌다.
- 여담이지만 지난번 이규택 전 의원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분도 민주당 시절 여주에서 당선된 배경에 대해 얘기해 줬는데 엄청 재밌게 들었지요.
“아, 그랬습니까.”
두 사람은 꼬마민주당에 이어 통합민주당을 거치며 15대 총선 직후까지 함께했다. 꼬마민주당은 1990년 초반 3당통합을 반대한 통일민주당계 잔류파와 후보단일화파들이 모여 만든 정당으로 이기택 이철 노무현 김정길 장석화 김광일 이부영 김부겸 등이 들어가 있었다. 꼬마민주당은 신민주연합당(DJ계열)과 합한 민주당을 거쳐 1995년 시민사회계열의 개혁신당과 신설합당하며 통합민주당으로 변모해갔다.
- 그분(이규택)은 DR(김덕룡, YS 비서실장)과 워낙 친해서 신한국당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김동영(4선, 정무제1장관)씨는 정말 훌륭한 인간이자 정치인이었습니다.”
필자는 김덕룡 얘기한 건데 이철은 YS 최측근이었던 김동영이라고 들은 듯했다. 김동영과 김덕룡은 상도동계 선후배 간이다.
- 김덕룡 아닌 김동영 전 의원 말하는 거지요?
“네. 그렇죠. 김덕룡 씨도 참 좋은 분이지요.”
이 점을 첨언하며 덧붙여갔다.
“김동영 씨는 YS 명예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졌던 사람입니다. 12대 국회 때 그분이 원내 활동을 했는데 군사정권 세력을 규탄하는데 앞장서 줬지요. 눈물겨울 정도로 참 훌륭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분이죠.”
김동영은 이미지로 볼 때 불곰으로 통했다. 최형우(6선,내무부 장관)와 함께 좌형우-우동영하며 상도동계 최일선에서 민주대장정을 헤쳐 나갔다. 하지만 YS 대통령 만들기에 전력투구하던 중 14대 대선의 고지를 얼마 남기지 않고서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철은 여기까지 얘기하다, 목이 말랐는지 잠시 쉬어가자며 남은 캔 커피를 맛있게 들이켰다.
통추 의미와 한계
좀 더 여담을 나눈 뒤 다시 통추 얘기로 돌아왔다.
-제정구 전 의원(2선, 국본 공동대표)을 중심으로 독자후보를 내는 방향으로 상당히 민의가 모아졌다고 하던데요.
“당시 나는 일본의 동경대학교로 가있었습니다. 통추 멤버들이 고민하던 쟁점 논의에서는 약간 벗어나 있었지요.”
- 역으로 물어보면 만약에 독자후보론이 현실화됐다면 누가 됐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지요. 제정구 전 의원이었나요. 아니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요?
“노무현 씨가 됐을 가능성은 좀 낮았죠. 굳이 얘기하자면 제정구 씨 정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 통추에 관해 궁금한 점은 어느 정도 해소됐는데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통추를 왜 만들어야 했는지 그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예컨대 YS가 만든 민주산악회(민산)는 반독재 민주화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잖아요. 통추는 뭐였냐는 거지요.
“양김과 같은 정치 지도자들과 그들 집단에 의해 우리가 피해를 보며 유민화 됐지 않습니까. 그들을 넘어 새로운 기치를 내걸고 우리끼리 돌파해 나가야 될 거 아니냐는 어떤 의식을 갖고 있던 겁니다. 지역주의가 굉장히 컸던 상황에서 국민통합이라는 당위적인 목표를 갖고 정치개혁을 이룰 결사체를 새롭게 만들어가자는 생각을 했던 거지요.”
- 낙선은 했지만 낭인으로 표현하기에는 워낙 대중적 인기가 높았지 않았나요.
“발붙일 데가 없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 DJ가 국민회의를 만들어 나갈 때 아쉬웠던 것이 당 안에서 왜 개혁을 못하느냐. 당권을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거든요. 어떻게 봅니까.
“당내에서 개혁하고 올바른 정당을 만들어 가면 될 텐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나갔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 것이었지요. 근데 돌이켜보면 DJ도 인간이니까 이기택(7선, 민주당 총재) 씨에 대한 미움이랄까, 실망감이 워낙 컸던 것 같습니다.”
- 마찬가지로 통추 또한, 새로 정치결사체를 만들 필요 없이 이기택 대표를 내몰고 당의 주도권을 접수할 수 없었는가. 이 점을 역으로 묻고 싶더라고요.
“결론적으로는 그게 옳았을 겁니다.”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이기택 씨와는 극과 극이었거든요. 실망스러운 행위를 여러 번 한 분이었습니다.”
- 예로 들면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14대 대선 당시 당은 DJ와 이기택 공동대표 체제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당대표가 아니더라도 의원들이나 당료들조차 조금씩 십시일반 모아 선거비용을 내지 않습니까. 이기택 씨는 그러지를 않습니다. 한번은 대선후보로 나선 DJ를 지원유세하고 다닌다는 명목으로 자동차 수리비를 당비에 청구한 겁니다. 이 때문에 당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쏟아졌던 것으로 압니다. 그분의 집이 북아현동에 있었는데 잔디밭 마당이었습니다. 하루는 이기택 씨가 자기 계보에 있는 사람들을 100여 명 모아놓고 자기 집 마당에서 집회를 한 모양입니다. 잔디밭이 망가졌는지 그것 또한 당에다 수리비용을 청구한 겁니다. 아주 유명한 얘기입니다.”
- 집안이 태광그룹을 운영하는 등 부자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이죠.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백과사전 하나는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홍사덕 박찬종 장기욱 씨 이런 사람들과 꼬마민주당을 만들 때도 이기택 씨는 처음엔 일체 관여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나와 홍사덕 씨 등이 이기택 씨 있는 호텔 방을 찾아가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지요.”
- 이기택을 앞세우려 했던 했던 이유는 뭡니까.
“그때 우리는 나이도 젊고 그분에 비해 정치 경험이 일천하다고 봤습니다. 이기택 씨 한테 ‘당신이 대표하라’ 한 것입니다.”
- 결국, 했지 않습니까.
“간신히 설득한 끝에 된 것입니다. 근데 당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하잖습니까. 나는 창당에 가담한 구성원들한테 일일이 서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돈으로 최소 3000만 원을 내자고 했는데 대부분은 자신들의 몫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장기욱(2선) 씨가 제일 많이 냈는데 어렵게 돈을 빌려서 낸 유일한 사람입니다.
근데 이기택 씨는 돈 자랑은 하면서도 정작 나중에 내겠다면서 회피하는 겁니다. 노무현 씨와 내가 돈을 달라고 집에까지 갔더니 땅문서 한 장을 보여줬습니다. 영등포에 3천몇 백 평 정도 되는 큰 땅이 있었습니다. 이기택 씨는 현금이 없으니 그거라도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알아서 처분하라고 했는데 나중 보니 그 땅은 절대 팔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는 땅을 처분하라며 준 거이니 거짓말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결국 이기택 씨는 당 자금에 한 푼도 보태지 않았습니다.”

이철은 꼬마민주당 시절 사무총장을 맡아 당의 살림을 챙겼다.
- 작은 당을 운영하기 어려웠겠습니다.
“당사를 만든 뒤에도 당직자들이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월급을 받거나 공식적인 활동비로 지급받는 것이 전혀 없을 때였습니다. 학생운동하다 퇴학당한 친구들 등 당직 일을 하겠다고 지원해오는 이들은 많은데 밥도 먹을 형편이 못 되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이철은 소정이지만 처음으로 당에서 공식적으로 나눠주는 활동비 제도를 만들었다. 30만 원가량 되는 금액이었다.
“그것이 야당에서 주는 최초의 당직자 월급이었을 겁니다.”
- 그 돈은 어떻게 마련한 겁니까.
“국회의원 월급이 많지 않을 때였는데 받은 급여를 다 쏟아붓느라 집에는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고생이 많았을 법했다.
“또, 그때는 야권의 경우 전국서 유명한 건달들이 국장급 당직자로 많이들 모여 있을 때였습니다. 서로 힘자랑할 때면 분위기가 살벌했고 말입니다.”
- 용팔이 사건 같은 것 말이지요.(신군부와 이민우의 내각제 구상에 반발해 양김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자 폭력배들이 난입해 방해한 사건을 말한다)
“그렇지요. 당시 야권에서는 주먹깨나 쓰는 왕초들이 부장급 당직을 맡는 경우도 많았는데 꼬마민주당 시절 나는 이런 분위기를 개혁하기 위해 공채로 당직자를 뽑았습니다. 정당 교육도 시키고 활동비와 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한 겁니다.”
야권에서는 처음 시도한 일이었다.
“동교동계에서 깜짝 놀라더라고요. 그때부터 다른 야당에서도 활동비 지급이 공식화됐던 것으로 압니다. 근데 그렇게 당을 운영하다 보니까 돈이 똑떨어진 겁니다. 이기택 씨한테 가서는 약속한 돈을 준비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돈이 없다면서 다시금 창당할 때 준 땅문서를 팔아보라고만 하더라고요.”
- 아까 못 파는 땅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우리가 알아본 바로 ‘그 땅은 못 파는 땅이던데요?’ 하니까, ‘하여튼 난 돈 없어’ 면서 딱 잘라 말하는 겁니다. 그때부터 나도 일체 돈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없이 어느 때는 영등포에서 약품 상회를 하는 선배에게 부탁해 어음을 빌려 월급을 주기도 했습니다.”
- 갚기는 했습니까.
“물론 갚았죠. 당이 극빈 상태에 있을 때도 나 몰라라 했던 분입니다.”
이외에도 인색한 일화에 대해 더 열거했지만 나머지는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 이기택 대표의 회고록(<우행>)을 읽어봤는데 재밌긴 하더라고요.(잠시 여담을 더 나눈 뒤) 통추 결성 초창기 때는 이기택 측으로부터 탄압을 많이 받았지요?
“전혀 엉뚱한 이유로 중징계까지 당했습니다.”
1996년 10월 민주당은 이철이 한 방송에 출연해 이규택을 비판했다는 이유를 들어 6개월 간 당원 자격을 정지시켰다.
“발언하지 않은 것을 회의에 상정하더니 자기들끼리 격론을 벌이며 중징계를 내린 겁니다. 나중에야 사과를 받아내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정치 동료들한테 못할 짓을 했습니다.”
- 그 정도면 이기택 측이 민심을 잃었을 텐데 왜 통추는 당권을 차지하지 못한 겁니까. 시도라도 한 적이 있었는지가 궁금합니다.
“그건 참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정치적 경륜이랄까. 제일 큰 것은 정치 자금의 문제도 있었고요.”
하로동선과 유시무종

- 통추가 갖고 있는 개혁적 화두나 실천적 모습은 좋았습니다. 멤버들도 현역은 아니지만 전도유망한 스타군단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다 실패한 이유는 뭐라고 봐야 할까요.
“충분한 협의와 고민을 함께 나누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갔어야 했는데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것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미묘한 경쟁의식 같은 것도 작용했겠지요.”
- 중간에 통추 멤버들끼리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했는데요. 왜 만들게 됐고 또, 어쩌다 실패하게 됐는지도 궁금하더라고요.
“처음에 누가 아이디어를 낸 것인가 하면, 아마 유인태 씨 등이 제안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중들과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던 중 음식점이 좋다고 생각돼 공동출자해 개업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엔 나에게 관리하라고 했는데 마침 동경대 객원교수로 가려던 중이라 맡기가 어려웠습니다.
나한테 하라고 한 이유는 칼국숫집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전부 다 성공시켰거든요. 암튼 일본에 있다가 귀국해 가끔 들르는 정도였는데 가끔 가서 보면 손님은 넘치는데 재무재표는 적자인데다 직원 관리도 안 되는 등 엉망인 겁니다.”
- 운영을 잘 못한 거네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 하로동선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기자들이 공짜로 와서 먹는 경우가 많아 그런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제대로 관리만 했으면 잘 됐을 겁니다. 손님이 줄을 서서 먹는 음식점인데 어떻게 적자가 날 수가 있겠습니까.”
하로동선은 개업 후 일 년 남짓 안 돼 문을 닫았다. 통추나 하로동선이나 유시무종(有始無終)이었다.
- 또 궁금한 게 통추 이후 한나라당에 잠시 몸담았을 때 말인데요. 16대 총선은 아예 출마를 안 했잖아요. 이회창 체제의 어떤 염증 같은 것 때문이었습니까.
“한나라당에 간 것은 입당이라기보다는 법적 절차에 따라 당(통합민주당)이 합당을 했기 때문이었죠. 막상 가보니까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어떤 면에서 그랬던 겁니까.
“인간적으로는 괜찮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겁니다. 서민을 위한 정치보다는 자기들의 이해를 대변하려는 이익집단 같았습니다. 몇 달 지나 바로 탈당을 해버렸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정치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항상 비주류에 있었습니다. 주류를 선택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돌린다면 또 다를 듯싶었다. 그가 앞서 한 말 때문이었다. 이철은 인터뷰 중 87 대선 때 후보단일화가 안 됐다면 그때는 YS 손을 들어줬어야 옳았다고 했다. 또, DJ가 국민회의를 차렸을 때는 그 길을 따라가고, 97 대선에선 그를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고 봤다. 몇 번이고 인터뷰 중간중간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회한을 내비쳤다. 그때의 그와 지금의 그가 다른 지점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나는데 우연찮게 김재규의 10‧26 사건에 관한 대화를 나누게 됐다.
- <시사오늘>에서는 역사 아카이브 관련해 정치 원로들의 증언을 모아 미니 다큐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 첫 번째가 김재규의 10·26 격발사가 우발이냐 계획인지를 놓고 조명했지요. YS나 안동일 변호사, 김동규 전 의원 등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그것은 우발이 아닌 계획이라고 하더라고요. 반면에 JP는 회고록에서 김재규가 평소 발작 증세가 있었다면서 우발로 봤고 말입니다.
“나는 계획으로 봅니다.”
냉큼 단언하는 모습에서 자신에 찬 확신이 감지됐다.
“서울대학교의 김채윤 교수라고 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형무소 갔다가 집행정지돼서 학교에 갔는데 그분을 만난 겁니다. 당시 김재규 씨가 육군단장인을 할 때였습니다. 김 교수는 나를 보더니 자신이 ‘김재규 장군을 만났는데 나(이철)에 대해 들은 것이 있다’며 전해주었습니다.
김재규가 ‘이철, 유인태가 당시 제자요?’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자 ‘잘 지도해 주세요. 용감하고 애국적인 학생들입니다. 그런 학생들이 잘 자라줘야 이 땅의 중심이 될 수 있지 않겠소?’ 하더라고요. 그런 것으로 봐서는 우발이 아닌 계획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역사적 진실을 찾아나가는 데 있어 또 하나의 작은 퍼즐이 보태진 듯했다. 증언을 찾아가는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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