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환의 최후진술(7)>˝유성환군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애…너는 왜 그리 우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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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최후진술(7)>˝유성환군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애…너는 왜 그리 우직하나˝
  • 유성환 자유기고가
  • 승인 2013.12.10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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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유성환 자유기고가)

6·8 부정선거 무효투쟁

1967년 6월 8일 총선은 헌정사상 최악의 무법타락선거였다. 부정부패선거는 공산당의 흑백투표보다 더 나쁜 선거였다. 신민당 경북도당에서 6·8선거 무효투위가 결성되고 젊은 우리들은 최전선에서 투쟁했다. 나는 법제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새벽에 신명여고 앞에 있던 강철호 의원 집에서 시위방법과 진행과정과 책임자를 선정하고 시위출발지점인 2·28기념탑 앞에 모였다. 강철호, 김인갑, 이원갑, 손윤하, 임차문, 서명교, 박재곤, 유성환 등 50여 명이 모였다. 우리는 2·28기념탑에 묵례를 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경찰의 병력은 150명 정도였다. 시위의 구호는 6·8선거무효였다. 부정선거의 실례로서 경북의 모군의 경우 선거 후 검찰에 소환된 유권자가 1,000명이나 되었다.

맹렬한 기세로 시위대의 앞장에는 강철호, 임차문, 유성환, 박재곤, 김인갑, 서명교 들이 섰다. 아무것도 두려움 모르던 청년시절이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100m를 더 넘지 못했다. 부상자가 속출했다. 증원된 경찰은 앞장선 시위지휘부를 파괴하면서 모조리 강제체포, 영장도 없이 트럭에 내던졌다. 우리는 대구서 유치장으로 끌려가 밤늦도록 조사를 받았다.

당시 국회에서는 야당 국회의원 전원이 147일간 국회등원을 거부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시정을 요구했다. 이 후 신민당은 여당의 부정타락선거와 이 나라 헌정과 헌법을 형해화 시킨 부당한 헌법개정과 제도의 변경 등에 민주회복의 대의를 위해서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다.

▲ 6.8 선거 무효투쟁 때 강제연행되어 트럭에 내던져지는 저자 (1967. 6. 12)

나의 결혼식 - 백 원짜리 결혼반지 50m의 신혼여행

1971년 8대 국회의원선거준비를 하면서 나는 큰 고민에 빠졌다. 성주칠곡 유권자들에게 드리는 달력을 만드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달력이라야 다른 후보들이 만드는 달력의 반쪽크기의 자그마한 달력이었다. 돈이 훨씬 덜 들기 때문이다. 해결책이 머리에 떠올랐다. 南양과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다. 달력 인쇄비가 5만원이면 되는데, 아마도 결혼축하금이 5만원은 들어올꺼다. “내가 떠나면 저이는 아무도 없어얘.” 라고 하던 南양, 각혈하는 환자방, 부모형제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각혈하는 무서운 피를 받아낸 南영자, 나는 일생을 함께 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대학선배 이수홍(당시 남선알미늄 사장 형)이 예식장경비를 주고, 현인수 형(전 도의원)이 축하객 식사비를 내겠다고 했다. 주례는 주병환 전 의원이 주례사례비도 사양하고, 수고하셨다. 성주고향에서는 어머님과 고모, 숙모 세 분만 오셨다. 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숙부님이 네 분이나 계시는데도 나의 결혼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축전조차 없었다. 예식장은 동원예식장이었다. 평소에 입은 한복 그대로의 신부가 입장하고, 물론 흰 고무신을 신고, 주례께서 “신랑은 신부에게 황금반지를”하시면서 나를 힐끗 보시고는 싱긋 웃으셨다. 달성동 골목에서 주운 백 원짜리 반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주병환 의원이 성주 국회의원을 할 때 나는 성주 도의원이었다. 나는 신부댁으로부터 새 양복을 해주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나는 대장부가 남으로부터 옷을 받아 입는 것은 남자의 수치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신부로부터 500원짜리 만년필을 선물로 받았다. 현인수 형이 금호호텔 202호실을 신방으로 예약해주었다. 그것이 신혼여행이었다. 예식장과 금호호텔과의 거리는 약 50m였다. 나의 신혼여행 거리는 50m였다. 저녁 늦게 축하금을 세어보니 57,000원이었다. 내 예상과 딱 맞았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 창문을 열어보니 흰 눈이 천지를 덮고 있었다. 나는 신부가 끼고 있던 백원짜리 반지를 흰 눈이 많이 쌓인 곳으로 힘껏 내던졌다. 반지 없는 신부의 손이 더 아름다웠다. 여인의 손은 그 자체가 신이 창조한 반지가 아닐까? 나는 오전 11시 쯤 조형래 인쇄소사장과 계약했다. 나의 자그마한 달력은, 칠곡군은 동장들이, 성주군도 동장들이 수고하셨으나 성주읍만은 성주향교지기 김씨였다. 그는 나의 달력을 어깨 밑에 차고 “개바디”로 “구등굴”로 “조지미”로 “댕끝”으로 걷고 또 걸었다.

나는 그에게 일당을 드린 일이 없다.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그가 그렇게 헌신적 우정을 보인 것은 그와 나 사이에는 “서민적 애환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선개헌 반대투쟁

 삼선개헌은 헌법파괴

4·19 혁명 후 1960년 6월 15일 이 땅에 비로소 의원내각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대통령은 임기 4년에 이어 일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이제까지 스스로가 선택하고 서명한 이 헌법의 “대통령 중임제”를 철폐하고 “대통령이 세 번 연임” 할 수 있도록 또 다시 헌법을 뜯어고치자는 것은 사실상 헌법파괴다. 자기 손으로 만든 헌법이 아니던가. 나라의 기본인 헌법을 준수하지 못하고 파괴하여 헌법을 일개인의 의향에 맞게 다시 고치자는 것은 독재자의 속내를 노출한 것이다. 본심을 드러내는 민주헌정파괴의 무자비한 행위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국민을 우습게 보고 우롱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투쟁의 대의

민주헌법 수호를 위해 신민당, 중앙당의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위결성에 이어 신민당 경북도당은 69년 8월 21일 장영모 위원장의 삼선개헌반대투쟁 선언과 주병환 의원의 선언문에 이어 강철호 투위의원의 경북도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낭독으로 장장 3개월에 이르는 투쟁이 시작되었다. 나의 체중은 60kg로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고, 시위투쟁의 최전방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임차문 동지 경찰 트럭 밑에 돌진

8월 30일, 수성천변에서 유진오 당수와 거물급 인사의 삼선개헌반대 대연설회가 개최되었다. 수성천변에는 십만 군중이 모여들었다. 윤보선, 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김수한, 장영모, 양일동, 김상돈, 서민호 박기출 외 여러 저명 인사들이 연단에서 사자후를 토했다. 이대우 의원은 사회를 맡았다.

▲ 삼선개헌 반대투쟁 (1969. 9) 구타, 연행되는 저자

청중들의 반응은뜨거웠다. 대회장 주변에는 정사복 경찰 수 백명이 기동차와 더불어 대기하고 있었다. 유세가 끝나자 청년당원들과 일부 시민들은 삼선반대의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도중에 경찰과 충돌했다. 청년들은 강제연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임차문 동지가 트럭 밑에 뛰어들어 경찰트럭은 정지되었다. 수 백명의 청년당원과 시민들이 김영삼 의원을 선두에 세우고 수성천 변에서 덕산동 당사까지 시위를 감행했다. 서울서 온 중진 중 김영삼 의원은 직접 시위대를 선도했다.

(4) 삼선개헌 반대 7명의 결사대

20여명이 남대구서에 연행되어 신문조서를 받았다. 7명의 당간부들이 스스로 조직한 삼선개헌반대 7인 결사대도 이날 선두에 서서 싸웠다. 서명교, 김형수, 김주한, 한치만, 김종한, 안숙제, 유성환 등이었다. 나와 최차근 동지는 이 시위 때문에 경찰에 연행, 불구속 송청재판에 회부되어 집시법 위반으로 5,000원의 벌금을 각각 부과 받았으나, 돈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벌금자체가 부당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불복 장장 5년간의 법정싸움에서 마침내 “선고유예”판결을 받았다. 선고 재판관은 최재호 판사였다. 최재호 판사는 내가 통일국시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최종판결을 받을 때 무죄판결을 선고한 세 사람의 대법관 중 한 사람이다.

▲ 삼선개헌반대투쟁 때 무장경찰에 비무장으로 항거하는 저자와 한치만위원 (1969.10)

 덕산성이 무너지고 청년당원들의 죽음의 행진

이승만에 이어 두 번째 민주헌법을 유린하는 박정희는 국회 제 3 별관에서 삼선개헌안과 국민투표법을 불법 통과시켰다. 의사봉을 두드린 이효상은 투쟁위원회의 표적이 되었다. 신민당 도지부는 옥상에 이효상 씨의 허수아비를 세우고 매일 매일 그 화형식을 거행했다. 이에 100명에 가까운 무장 경찰들이 도당사의 높은 돌담을 넘어 월장침입을 시도했다. 우리는 당사를 “덕산성”이라고 불렀다. 당원들은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경찰에 물을 뿌리고 연탄재를 투하하며 저지했다. 싸움이 장기화되자 경찰은 신민당 도당 간부 김형수 부장의 아우가 소속경찰관임을 알고 김형수의 아우를 월장작전의 선두에 서게 했다. 김형수 동지의 아우에게 연탄폭탄을 투하하기가 어려웠다. 덕산성이 무너졌다. 전선이 무너지고 경찰은 당사 2층 옥상에 설치된 이효상 허수아비를 증거물로 갖고 갔다. 허수아비는 신민당 당원이 되었다. 체포하지 말라. 울분을 토하듯 야유하며 항의했다. 9월 14일 이후 10월 초까지 신민당 도지부의 상임위원과 당기위원 그리고 당원들은 기습시위작전을 계속했다. 도당 선전부차장 최차근과 그의 일행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 시위를 하지 않고도 바로 경찰서에 집단으로 침입하여 찾아가 우리가 시위를 했으니 신문하고 구속하라고 대들었다. 경찰은 이들을 돌려보내는데 기동대까지 동원했다. 

 반월당 대시위

8월 말경 반월당 앞에서 대시위를 감행했다. 이 때 경찰이 패퍼포그(최루가스)를 처음 사용했다. 장영모, 이대우, 신진욱, 강철호, 라학진, 유한종, 유시백, 윤한주, 현해봉 등이 즉심에 회부되었으나 매일신문 유동직 기자의 도움과 장영모, 이대우 씨의 판사와의 법리론 싸움의 성공과 김광일 판사의 현명한 상황판단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아무런 보수도 없고 훈장도 받지 않고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군사독재타도를 위해서 불고가사하고 민주화투쟁에 신명을 바치고 싸우는 민주투사들이었다. 나는 시위대의 최선두에 서서 구호를 선창하며 젊은 민주 투사들을 선도했다.

▲ 삼선개헌 반대투쟁 때 무장경찰과 대치하는 저자 (1969. 10) 대구 반월당 앞

 투사들의 면면

69년 8월 21일 삼선개헌 반대투쟁 선언 후 경북도당은 8월 30일 수성천 변에 대규모 삼선반대유세를 개최하면서 전면적 투쟁에 들어갔다. 1차, 2차…… 이십여 차례의 대소 옥내외 시위투쟁을 감행했다. (시위자 명단 : 자료부족, 누락자 많음)

『강철호, 고만석, 곽천순, 김경윤, 김경자, 김근식, 김기표, 김동진, 김목일, 김병재, 김수영, 김우영, 김인갑, 김인득, 김재출, 김재홍, 김종한, 김주한, 김태종, 김형수, 노근성, 도태암, 라학진, 배성문, 박귀조, 박재곤, 박치달, 서권수, 서근수, 서명교, 서시경, 서윤수, 서창도, 손윤하, 손태영, 송병철, 신금환, 신진욱, 신현길, 안덕화, 안숙제, 우종국, 유성환, 유시백, 유한종, 윤종대, 윤한주, 이대우, 이덕수, 이만환, 이상조, 이승호, 이영식, 이정홍, 이재우, 이해득, 이화순, 임차문, 장래정, 장문상, 장영모, 장영환, 전구열, 전의관, 전재철, 정석호, 정호근, 조규택, 조연환, 지제석, 차세균, 최도한, 최병목, 최부환, 최인설, 최일, 최종국, 최종말, 최차근, 최팔교, 최형택, 한영수, 한영애, 한치만, 현한조』

한편 경북대학, 영남대학, 계명대학, 대구대학, 효성여대 등 학생들의 삼선개헌 반대 운동은 그들의 Campus를 벗어나 대구 중앙통 대로까지 진출하여 조직적이고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으며 서훈, 여정남, 이재영, 정만진, 송효익 등 걸출한 민주투사들이 선두에 나섰다.

 '체포영장 없는 강제 연행, 신문, 고문' 

1976년 5월 25일 신민당은 당권싸움으로 전당대회를 주류, 비주류 양파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치르게 되었다. 국민의 분노는 충천했다. 6월초 경 한병채 의원이 대구에 와서 경북도당의 간부들과 모 다방에서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이번에 유진산 씨가 정보부의 돈을 받아가지고, 여당의 입지를 넓혀주기 위해서, 두 장소에서 각각 전당대회를 했다는 말이 서울에서는 근거도 없이 돌아다녔다. 이런 통탄스러운 유언비어를 어느 측에서 만들었겠습니까?” 라는 말을 하면서 정보정치를 규탄했다.

다음날 한의원의 말을 들은 다섯 명은 영장도 없이 앞산의 모기관에 강제연행되었다. 서명교, 김형수, 유성환 외 2명이었다. 신문이 시작된 지 2~30분도 안되어 “당신은 안 되겠어.” 하고 나를 지하실로 데려갔다. 고문용 통통한 막대기를 갖고 오더니 대뜸 내 하복부를 찔렀다. 중학교 2학년 때 김태욱 씨가 하던 고문방식과 비슷했다. 하복부를 쑤시니 남성으로써 자연히 남근이 다칠까 긴장이 되었다. 신문 요지는 “한의원이 어제 왕실다방에서 한 말” 내용이었다. 어디에 어느 시에 누구를 만나도 기관의 첩자가 있는 시대였다. 어찌해서 도당 간부끼리 한 얘기가 당일 모기관까지 전해졌는지 실로 무서운 사회였다.

나는 내가 화장실에 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물론 일체 모르는 일이라고 계속 주장했다. 고문 작대기는 계속 내 복부와 몸뚱이에 뼈 아픈 통증을 가해왔다. 그래도 안 되니까 나를 증기를 뿜어내는 뜨거운 스팀앞에 앉혔다. 그 때, 나는 고혈압으로 고생할 때였다. 예사로 생각하고 스팀앞에 앉았다. 온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쉬기가 어려웠다. “나는 고혈압환자다.” 라고 부르짖었다. 막무가내 그는 들은 척도 안했다. 마침내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 의자에 앉으니 나이 50이 넘어보이는 깨끗한 신사가 들어오더니 “유군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애. 다른 일행은 다 시인하고 벌써 나갔는데 너는 왜 그리 우직하나.” 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는 십 여년 전 성주경찰서 사찰과장으로 있으면서 우리 집 식당에서 매일 점심 식사를 했다. 나를 많이 사랑해준 분이며 일본서 공부했으며 얼굴도 깨끗한 신사였다. 그 분은 “증거가 확보되었다. 집에 가도 좋다.” 해서 내가 밤 1시경 그 기관문을 나오니 “유 의원”하고 나를 끌어안는 동지는 김인갑(도의원)이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끌어안고 통분의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병채 의원에게는 아직도 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 이 일을 당한 나는 이 시대의 우리 국민들은 공사 생활에서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유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동지끼리의 노변한담까지 법에 의해서 압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권력은 국민의 자유를 다 빼앗아갔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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