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YS)의 '三不신념'과 안철수의 '새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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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YS)의 '三不신념'과 안철수의 '새 정치'
  • 정세운 기자
  • 승인 2014.08.16 10:51
  •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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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없는 안철수 행보…YS와 비교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정세운 기자)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이 말처럼 ‘새벽(민주주의)’을 위해 투쟁의 선봉에 섰다. 유신체제를 무너뜨린 중심에는 YS가 있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항복을 하고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YS는 야당지도자로서 목숨을 건 투쟁을 이어나갔다.

YS의 투쟁방법은 다른 야당지도자들과는 달리 분명한 소신과 원칙이 있었다. YS에게는 ‘삼불(三不)의 신념’이 있었다.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쳐라”

우선은 국내정치가 아무리 얼어붙고 죽음의 위협이 눈앞에 있더라도 나라를 떠나 해외로 정치무대를 옮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일화가 있다.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됐다. 당시 YS는 국회 국무위원 자격으로 미국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 교수와 코헨 교수 초청으로 한국 통일문제에 관해 연설을 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다.

YS 부인인 손명순은 전화를 걸어 “지금 계엄령이 선포됐다. 미국에 머물면서 때를 기다려라. 제발 돌아오지 말라”며 눈물로 애원했다. 하지만 YS는 “무슨 소리냐. 감옥에 가는 일이 있더라도 내 나라로 가야지. 곧 귀국하겠다”고 말했다. 7월 21일 일본을 거쳐 YS는 한국으로 들어왔다.

1983년 5월 18일, 광주민주항쟁 3주년. YS는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YS의 단식투쟁이 국내외로 일파만파 파급돼 가자 다급해진 전두환 정권은 모종의 조치를 강구했다.

YS 단식 8일째인 5월 25일. 전두환 정권은 YS를 서울대병원으로 강제 이송시켰다.

당시 전 정권은 YS의 단식이 ‘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 측의 체크결과 YS는 오로지 물과 소금만으로 단식을 계속한 것으로 드러났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전 정권은 단식 10일째인 5월 27일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을 시켜 회유에 나섰다.

권 총장은 “대통령께서는 총재가 단식을 빨리 끝내고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건강이 회복되면 총재가 일본 미국 유럽 등 어디든지 가도록 주선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 총장은 YS를 해외에 내보내고 주택 제공은 물론 생활비 일체를 넉넉히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YS는 “우리 국민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외국에 나갈 생각은 꿈에도 없다. 나에 대한 연금해제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요구한 민주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이 정권도 이승만 박정희를 따라 결국 비참하게 될 것이다. 권 총장은 이 말을 전두환에게 꼭 전해라”고 맞섰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단식 12일째인 5월 29일.

권 총장은 병실로 YS를 찾았다.
“오늘 밤 0시를 기해 총재님의 연금이 해제되며 이제 국내외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나를 해외로 그렇게도 보내고 싶은가.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자 권 총장은 반색을 하며 물어봤다.
“어떻게 해주면 되겠습니까?”

YS는 이렇게 답했다.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

▲ YS는 어지간해서는 정치가 길거리로 나가서는 안된다는 소신이 있었다. 나간다면 선봉에 선다는 원칙이 있었다. 1987년 6월 26일 평화대행진 때 일명 닭장차에 끌려가는 YS.ⓒ사진제공=김영삼 자서전

“의회 안에서 투쟁하라”

YS의 신념 중 또 하나는 민주주의는 의회정치가 기반이고 의회정치는 정당정치가 주춧돌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정당정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73년 2월 27일 치러진 9대 총선. 153개이던 전국의 지역구가 절반도 못되는 73개로 줄어들었다. 더욱이 국회의원 중 3분의 1은 대통령이 임명했다. 많은 야당 의원들은 ‘보이콧’을 주장했다. 하지만 YS는 ‘어떤 형태의 국회든 참여해 투쟁을 해야 한다. 의회 안에서 유신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대부분의 정치지도자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YS는 23일간 단식투쟁을 통해 가택연금을 풀었다. 가택연금이 풀리자 사람들을 모아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들었다. 1985년 2월 12일 치러지는 12대 총선 참여여부를 두고 이들은 각론을 펼쳤다.

이들 중 다수는 “총선참여를 하게 되면 우리의 투쟁이 희석될 수 있다”며 반대했다. 미국에 체류 중인 김대중(DJ)도 “민추협은 선명재야로 남아달라”며 총선 보이콧을 전달했다.

하지만 YS는 “여당인 민정당과 관제야당인 민한당의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선명야당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해야 한다”며 신민당을 창당했다.

전두환 정권의 끊임없는 방해에도 불구, YS는 민한당 의원들을 만나 설득했다. 정책위의장 김현규, 정책연구실장 홍사덕, 당무위원 서석재, 수석부총무 박관용 등 8명의 민한당 의원들이 집단 탈당해 신민당에 입당했다.

또한 YS는 창당을 주도했지만 욕심을 버렸고, 지분을 동교동과 5 대 5로 나누자며 설득하고 양보했다.

신민당은 12대 총선에서 돌풍을 몰고 왔다. 선거 후 신민당은 민한당을 흡수 통합 시켰다. 그리고 12대 국회에서 신민당은 대여투쟁에 앞장서며 ‘대통령직선제’를 이끌어냈다.

“길거리로 나선다면 선봉에 선다”

YS는 어지간해서는 정치를 ‘길거리’로 몰고 가지 않는다는 신념이 있었다. 만약 길거리로 나간다면 앞장선다는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야당지도자들은 지금도 ‘국민’을 앞세워 국회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다. YS는 여간해서는 길거리로 나서지 않고, 의회 안에서 투쟁했다.

1987년 대통령직선제 투쟁 때 길거리로 나선 YS는 선봉에 섰다. 그러다 일명 ‘닭장차’에 실려 가는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유성환 전 의원은 이와 관련, “YS는 어지간해서는 길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나선다면 맨 앞에 섰다. 3선개헌반대투쟁 때 야당지도자들은 길거리로 나섰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뒤로 빠져있었다. 하지만 YS는 맨 앞줄에 섰다. 때문에 경찰의 곤봉세례를 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안철수 새정치연합 전 대표의 행보는 소신이나 명분을 찾기 힘들었다는 게 일반론이다. ⓒ뉴시스

소신이나 명분 없는 안철수 행보

YS의 정치철학과 비교해보면, 새정치민주연합을 이끌었던 안철수 김한길 공동대표의 행보는 명분이나 소신을 찾기 힘들다.

국민이란 이름하에 천막을 만들고 길거리로 뛰쳐나가는 일이 잦았다. 2014년 3월 2일 김한길 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신당 대표는 전격적으로 합당을 선언, 새정치연합을 탄생시켰다. 합당의 명분은 ‘기초공천제 폐지’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지켜지지 못했다.

7·30 재보궐 선거 공천과정에서 보여준 두 사람의 지도력 부재는 끝을 달렸다. 선거결과는 참패였다. 그리고 새정치연합 지지율은 하락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떨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두 공동대표는 사직했다.

필자는 이제 안철수 전 대표에게 ‘당신의 정치철학과 그토록 부르짖었던 새 정치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물론 그가 대답해줄 리 없지만….

 


 

담당업무 : 정치, 사회 전 분야를 다룹니다.
좌우명 : YS정신을 계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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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효 2014-08-22 18:16:37
국민이란 이름하에 천막을 만들고 길거리로 뛰쳐나가는 일이 잦았다? 그건 안철수 김한길이 아니라 친노패권이 강요해서 벌어진 일 아니었나? 오히려 김 안 둘은 투쟁의 이미지를 벗으려 했다만, 친노패권과 전라디언에게 인민재판 당하고 질질 끌려다녔을 뿐.

에효 2014-08-22 18:14:54
그 잘난 민주화운동으로 권력을 잡은 개꼴통김영삼은 거산 소산 놀이로 국가부도 사태를 불러일으켰지.

00 2014-08-18 17:05:08
안철수 의원이 정치를 하려한다면 ys식 정치를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아직 안철수의 새정치를 보여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봅니다

양심을 지키고 살자 2014-08-17 09:19:20
결론.... 시대정신을 떡바로 보지 못하고 미래 지향적이지 못한.....냄비 대중성.

이와 더불어 각자 자기가 속한 이익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부정직성.

거기에다 언론들마저....... 미래를 지향하는 사명의식이 없고....덩ㄱ 부채질.


.....어쩐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도로 나무아부타불.

YS깊이존경 2014-08-16 23:27:03
안철수는 정치의 기본속성인 정당한 권력의쟁취와 시대상을 담은 권력의행사면에서 많이 부족하다는 말일겁니다 물론 후자는 정권을 잡을경우 가능할지도모르죠 하지만 전제인 첫째에서 많은의문이 듭니다 기자님이 나가서 데모나하라고 YS의 결단력과 정치적역량을 언급한것은 아니죠 YS도 독재시대에만 시위했지 절차적 민주화이후엔 중도우파의 길을 걸었습니다 안철수는 물론가능성있는인물이나 현재는많이 부족한게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