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국정원 개혁이 민주화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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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국정원 개혁이 민주화의 완성˝
  • 김병묵 기자 변상이 기자
  • 승인 2014.11.1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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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에서 통일로 (6)>민청학련 의장 이철 전 의원
˝MB정권 들어 민주화 배상조건 나빠져˝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김병묵 기자 변상이 기자)

1972년 10월 유신체제가 발족하자, 박정희 정부의 독재에 대한 전국적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일명 ‘민청학련 사건’으로 불리는 1974년 전국민주학생청년연맹(민청학련) 핵심 멤버 구속이다. 1973년 말부터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반정부 시위는 점점 전국적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1974년 4월 초,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하며 중앙정보부를 통해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하고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240명을 체포했다.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됐다. 그 가장 핵심 인물이 바로 민청학련 의장 이철 전 의원이다. 학창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이 전 의원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한국 민주화 운동 취재에 일생을 마친 일본인 다치가와 마사키 대기자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전 의원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신념을 존경한다”고 언급키도 했다.

▲ 이철 전 국회의원 ⓒ시사오늘 변상이 기자

현상금이 간첩의 10배

이 전 의원은 민청학련 사건에 앞서 3선 개헌 반대운동을 벌이다 강제 징집된다. 다음은 강제 징집에 대한 이 전 의원의 구술이다.

“갑자기 잡아가서 수갑을 찬 채로 산길을 끌고 다니다가, 문득 도착한 곳이 병영이었다. 군번도 없었다. 그냥 민간인 신분으로 훈련을 받다가 열흘쯤 지나고서야 군번이 나왔는데, 그나마도 자꾸 훈련 때 홀로 끌려가서 심문을 당하고, 매를 맞았다.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새로 오는 간부들마다 내 이름을 호명하거나 ‘네가 이철이냐’고 확인하고 갔다. 그래서 우습게도 군대 내에서 ‘훈련 때마다 빠지고, 간부들이 매번 확인하는 것을 보니 이철이 청와대에 연줄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징집이 끝나고 1972년 복학한 이 전 의원은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동지들과 1973년 최초의 반유신 시위로 기록된 10·2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이나 시민들이 ‘반국가 시위’‘반민족 시위’로 오해해 냉담한 태도를 보일까 초조해했던 몇몇의 우려와는 달리, 이는 뜨거운 호응을 얻는다. 이에 고무된 이 전 의원 등은 제2의 4·19 혁명을 꿈꾸며 대대적인 민주화 운동을 준비한다. 종교계와 재야, 시민단체까지 이어지는 전국적 규모였다. 이와 관련해 이 전 의원은 “우리가 무슨 조직도 아니니, 이름을 붙이지 말자고 했다. 중앙정보부의 트집거리가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언문을 무기명으로 내보낼 수 없어 아래 적은 이름이 전국민주학생청년연맹, 바로 민청학련이다. 사실상 가공의 단체”라고 회고했다.

가칭 민청학련이 계획한 대대적 시위는 사실상 조기에 저지된다. 오히려 이 전 의원 등은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에 내란 선동 등의 죄목을 뒤집어 쓰고 수배자가 됐다. 이 전 의원은 수배자 생활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내 얼굴이 붙은 수배서가 전국 전봇대에 깔렸다. 관공서 자동차 등에도 빼곡하게 붙었다. 당시 간첩에게 걸린 현상금이 30만 원이었는데, 내게 걸린 현상금은 무려 300만 원이었다. 간첩의 10배나 걸릴 만한 죄목이 대체 무엇인가. 그 시절 120만 원이면 어지간한 집을 샀다. 내 몸값이 집 두 채 값을 넘어간 셈이다. 내 초·중·고 동창부터 친척까지, 나와 관련 있는 모든 사람은 다 한 번씩 조사를 받았고 나를 숨겨주지 않았는지 가택 수색을 당했다. 그러나 나는 광화문 네거리 앞의 한 레코드 가게에 숨어있었다. 형제가 운영하는 가게였는데 나와는 어떤 관계도 없고, 다만 한 번 그곳에 들러서 그 형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더라. 그래서 나와 아무 연관이 없는 그를 찾아갔다. 내게 다락 위 창고방을 내주고 밖에서 빗장을 잠갔다. 중앙정보부가 나를 찾느라 전국을 들쑤시고 있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정작 나는 청와대 코앞에 있었던 것이다. 연관이 없으니 들킬 리가 없었지만 종내엔 돈이 떨어져서 잡히고 말았다, 그 레코드 가게 형은 안타깝게도 나를 숨겨준 죄로 4년인가 옥살이를 했다.”

박정희 일가와의 기묘한 인연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발의 선봉에 섰던 이 전 의원은, 아이러니하게도 박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와는 인연을 이어왔다. 아버지로부터는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지만, 그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고 구속 때는 선처를 구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와 그 가족들까지 인간적으로 미워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딸인 박근혜 대통령, 박지만 군, 박근령 씨 모두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대선 때도 박 대통령이 당선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기왕에 선출된 뒤에는 국정을 잘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전 의원은 자신의 아버지와 박정희 대통령 일가 사이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아버지가 중앙고등학교 교사셨다. 그런데 박지만 군이 이제 중앙고에 입학을 했는데, 역도반 선배들에게 뭔가 잘못 보여서 소위 ‘빠따’를 맞고 그랬다. 대통령의 아들이지만 뭘 어떻게 하겠나. 경호원을 학교 안까지 데리고 들어올 수도 없고 해서, 아버님이 당시에 박 군과 상담을 하게 된 거다. 박 군이 이런 저런 얘기들을 집에 가서 육영수 여사에게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후에 육 여사가 중앙고 교사들을 모두 청와대로 초청을 했는데, 내가 수배 중이고 해서 영 불편하셨던 아버지는 초청일 당직교사와 당직을 바꿔서 가지 않으셨다. 그런데 육 여사가 아버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이근진 선생님은 어디 계세요’하고 물었단다. ‘이 선생은 당직이라 못 왔다’고 한 동료 교사가 대답을 했더니 가서 모시고 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아버지가 도착하니 육 여사가 아버지 손을 잡고 ‘요새 (아들 때문에)많이 힘드시죠’라고 위로를 했다. 그 길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소개를 했더니 박 대통령이 보자마자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고 했다.”

▲ 이철 전 국회의원 ⓒ시사오늘 변상이 기자

민주화의 완성은 국정원 개혁

이 전 의원에게 지금은 민주화가 완전히 이뤄졌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대답은 아직 몇 가지 마지막 퍼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전 의원은 그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국정원 개혁을 꼽았다.

“민주화를 가로막은 가장 핵심적인 존재는 바로 중앙정보부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존재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정보 기관이 있다. 이스라엘의 모사드, 미국의 CIA…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이들 중 어디서도 정보 수집권과 수사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 않다. 중앙정보부의 경우,  수집권과 수사권을 모두 쥐고 있어서 엉뚱한 정보를 가지고도 억지 수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중앙정보부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이제 와서 속속 무죄로 밝혀지고 있는 상황인데, 보상 받기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고, 연락이 안 닿는 사람들도 있으니 실제 피해자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고 보면 된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모두 중앙정보부의 과도한 절대적 권한 때문이다. 수사권을 분리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 국정원은 중앙정보부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정권은 물론이고, 불명예와 오명의 사슬을 끊어 국정원 직원들을 명예롭게 만들어 주는 길이다. 이스라엘의 모사드만 봐도 아랍 국가에겐 원수 같겠지만, 이스라엘 국민들에겐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지 않나. 국정원도 그런 존재로 만들어야 한다. 지난 대선만 봐도 그렇다. 세계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 선거에서 댓글 작업을 하고, 리트윗을 하고 하는가.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고 이런 국헌 문란은 반란죄로 다스려도 할 말이 없다. 언젠가는 심판을 받게 되고 또 다른 불명예를 뒤집어쓸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국정원이 개혁돼야 한다. 지금 야당 의원들을 포함해, 아무도 손도 못 대고 있어 안타깝다.”

MB 정권 들어 축소되는 민주화 보상

“그나마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재심이 이뤄지고, 배상이 시작된 것은 김대중(DJ) 정권과 노무현 정부였다. 다만 DJ 정권은 표면적으론 50%의 지분이 김종필(JP)전 총리에게 있었다. JP는 한때 3선 개헌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유신의 본체라고 할 정도로 혜택을 받았던 집권 세력의 일부다. 그래서 DJ정권 하에서는 반민주 인사들이 등용되기도 했었다. 예를 들어 L모 씨 같은 경우는 민청학련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제6국장이었다. 그는 1차 인혁당 사건 때는 수사과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8인을 처형한 사람이다. 물론 박 대통령의 지시와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명령이 있었겠지만, 여튼 그 정도로 민주화 운

▲ 이철 전 국회의원 ⓒ시사오늘 변상이 기자

동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인데 DJ 정권 때 요직에 등용됐다. 아직도 유신잔당이나 독재부역자들이 남아있던 것이다. 그래도 정치적 분위기가 바뀌었고, 사법부도 이용훈 대법원장 같은 몇몇 분들이 군사정권이 잘못됐고 유신헌법 자체가 문제 있다는 인식을 제기하면서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이 재심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명박(MB) 정부 들어서 점점 배상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또 나빠지고 있다. 사법부가 정권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반민주 인명사전 편찬

이 전 의원은 민청학련 계승사업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민청학련 40주년을 맞아 지난달 15일엔 시국토론회를 열고, 또 한편으론 ‘반민주 인명사전’ 편찬 사업을 활발히 벌이는 중이다.

“얼마 전 시국토론회를 열었다. 주제는 ‘박정희의 유신, 박근혜의 신(新)유신’이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진단하고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화의 길로 가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걱정하는 토론회다. 우리가 준비가 늦어서 좋은 장소를 구하지도 못하다가 막판에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예인홀을 빌렸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청중들이 넘쳐서 자리가 부족했다. 그리고 토론회가 진행되는 다섯 시간 동안 꼼짝을 하지 않더라. 끝난 후에는 ‘지방에서 토론회를 가져 달라’‘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어 달라’며 여러 군데서 요청이 오기도 해다. 여건상 그러진 못하고 있어 죄송하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토론회를 꾸준히 계획을 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장기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반민주 인명사전>편찬이다. <친일 인명사전>의 쌍둥이 작업이다. 사실 그 대상자도 일란성 쌍둥이 같은 것이다. 우리는 친일이라는 반민족 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반민주 행위에 가담해서 이 나라의 민주화를 가로막고 민주 질서를 흩트리는 데 또다시 일조했다. <반민주 인명사전>은 그 사람들을 표적으로 그들의 행위를 밝히고 기록하자 하는 취지다. 잘못된 행위를 보복하자는 것이 아니다. 응징하자는 사람도 많지만, 기록만 해도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담당업무 : 게임·공기업 / 국회 정무위원회
좌우명 : 행동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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