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수성동(水聲洞)’, 화려한 풍광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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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수성동(水聲洞)’, 화려한 풍광 드러낸다
  • 임진수기자
  • 승인 2010.06.15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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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유명...기린교와 함께 문화재 지정
인왕산 자락의 잊혀진 계곡 수성동(水聲洞)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다.

서울시는 최근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백악산 삼청동과 함께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인왕산 수성동 계곡을 전통적 명승지로 지정해 보존키로 했다.

수성동 계곡은 문화재위원회의 조사와 심의를 거치게 된다.

수성동 계곡은 삶의 반세기를 인왕산에서 살며 인왕산 곳곳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았던 겸재 정선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 서울시가 문화재로 지정을 추진중인 인왕산 수성동 계곡.     ©뉴시스
또한 인왕산 아랫동네에 살면서 19세기 신지식인 중인(中人)들과 교류하며 위항문학(委巷文學)을 꽃피웠던 추사 김정희(1786~1856), 양반은 아니었지만 정조의 신임을 받아, 규장각 서리로 근무했던 존재 박윤묵(1771~1849) 등의 시에서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뽐냈다.

특히 조선후기 역사지리서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등에는 이 계속을 명승지로 소개했다.
이와함께 수성동 계곡 아래에 걸려 있는 ‘돌다리’도 문화재로 지정 보존된다. 약 190m에 달하는 이 돌다리는 그동안 ‘기린교(麒麟橋)’라는 이름으로 소개돼 왔다.
 
하지만 서울시는 정밀조사 결과 ‘기린교’ 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정선의 그림에 등장하고,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 위치에 원형 보존된, 통 돌로 만든 가장 긴 다리라는 점에서 교량사적 의미르 부여키로 했다고 밝혔다.

문화재 지정 범위는 인왕산 길 아래 인왕산 계곡 상류부터 하류 복개도로 전까지의 계곡(총길이 190m, 총폭 18m)과 돌다리(길이 3.8m, 폭 90cm)다. 
 
명승지로 이름 난 수성동(水聲洞)
 
수성동은 누상동과 옥인동의 경계에 위치한 인왕산 아래 첫 계곡이다. 조선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 이라고 해 수성동(水聲洞)이라 불렸다고 한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시사오늘
수성동의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 또는 ‘계곡’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역사가들은 설명하고 있다. 위치는 현재의 종로구 옥인동 옥인아파트 일대다.

인왕산의 물줄기는 그 옛날 수성동과 옥류동(玉流洞)으로 나뉘어 흘렀다. 이 물줄기가 기린교에서 합수돼 청계천으로 모아 내렸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던 ‘옥류동 계곡’이 지금은 복개돼 주택가가 됐지만, 수성동 계곡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여전히 맑고 청아한 물소리를 내고 있다.
 
박윤묵, “조물주와 노니는 곳”  
 
‘한경지략’이나 ‘동국여지비고’등 19세기 사료에 따르면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어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해 시내와 암석이 빼어난 곳으로 전해진다. 특히 더운 여름밤에는 노닐기에 적당하며, 안평대군이 이용했던 비해당이 있던 터”라고 적고 있다.

이 같이 수성동은 당시 뛰어난 명승지였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세조의 반정으로 목숨을 잃은 당대 최고의 명필 안평대군도 이곳에 집을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는 게 학자들의 얘기다.

또한 이곳에는 박윤묵을 비롯, 평민시인 천수경(千壽慶), 왕태(王太), 장혼(張混), 김낙서(金洛瑞) 등 중인 출신 위항시인들이 중심이 돼 19세기 저명한 ‘옥계시사(玉溪詩社)’를 결성해 소위 ‘위항문학’을 꽃피웠다. 

위항문학은 조선 후기 중인·서얼·서리 출신의 하급관리와 평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으로 기존의 한문학이 양반사회의 전유물이었다면, 위항문학은 중인, 평민층이 중심이 돼 나중엔 사회 저변으로 확대됐다.

박윤묵은 자신의 시집인 ‘존재집’에 여름 장마가 계속돼 인왕산 계곡에 물이 불어나자 벗들과 술병을 차고 수성동에 올라가 수성동의 풍경을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에서 노니는 듯하다’고 수성동 계곡의 풍경을 표현하기도 했다.
 
수성동 폭포의 장중함 묘사한 추사
 
▲ '한양도성도' 중 수성동.     © 시사오늘
수성동은 시인들의 글과 함께 간송미술관에 있는 겸재의 ‘수성동’ 그림으로 옛 풍광을 느낄 수 있다. 거대한 바위 사이로 급한 개울이 흐르고 주변에는 암석이 수려하고, 계곡에는 장대석을 두 개 맞댄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있다. 여기에 한가로이 풍경을 즐기는 선비들을 모습에서 망중한을 엿볼 수 있다. 

정선은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 살던 터전인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장동(壯洞)일대를 8폭의 진경으로 남겨 놓았는데 ‘수성동’도 그 중의 한 폭이다.

조선 최고의 서예가이자 실학자 추사 김정희는 수성동에서 멀지않은 월성위궁(月城尉宮)에 살면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雨中觀瀑此心雪韻)’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에서 추사는 비오는 날 수성동의 모습을 ‘낮인데도 밤인 듯 느껴진다’고 하며 매우 장중하게 표현했다.

김정희는 또 19세기 초 중인들의 모임터인 천수경의 집 송석원(松石園)의 글씨를 써주기도 하고, 조수삼, 오경석 같은 중인들과 교류를 갖는 등 위항 시인들과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문학으로 맺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 풍경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첫 사례
 
수성동 계곡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저명한 회화 속에 등장하는 풍경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되는 첫 사례가 된다. 서울시는 “수성동의 문화재 지정이 향후 문화재 지정의 방향 및 범위를 다양하게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번 지정은 내사산(백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중 하나인 인왕산의 경관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도 기대되고 있다. 

서울시는 “문화재 지정과 함께, 그동안 인왕산 조망과 경관을 저해했던 인근의 옥인아파트를 철거, 2011년까지 계곡 주변의 지형과 경관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시킬 계획”이다. 

또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수성동에서는 겸재의 그림과 이곳을 무대로 쓰여진 시들도 함께 전시된다. 시민들이 도심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옛 모습이 유지된 수성동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옛 사람들의 풍류를 느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서울시 관계자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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