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와 니콜라 아넬카]'저니맨', 마지막 불꽃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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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와 니콜라 아넬카]'저니맨', 마지막 불꽃 태운다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1.10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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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로 풀어 본 정치인(4)>잦은 탈당 후에도 연속당선, '불사조' 이미지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정치는 축구와 비슷하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겨뤄야 하고, 승자와 패자도 생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비슷한 점은, ‘사람’의 게임이라는 점이다. 축구 팬들은 잔디 위에서 뛰는 ‘사람’에게 멋진 플레이를 기대하고, 국민들은 정치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희망을 투영하고 미래를 건다. 다른 듯 닮은 정치계와 축구계의 ‘사람’을 비교해 본다. 

▲ 새누리당 이인제 최고위원 ⓒ 뉴시스

'저니맨' 이인제와 니콜라 아넬카

저니맨(journey man)은 중세시대 수습기간을 끝낸 숙련 노동자를 뜻하는 단어다. 장인이 되지 못하고 수습기간만 마친 듯한 느낌 때문에 최근에는 자주 팀을 옮기는 운동선수를 일컫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저니맨은 그만큼 능력 있는 선수라는 사실을 방증하기도 한다. 자주 팀을 옮긴다는 것은 한편으로 여기저기서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서 ‘저니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새누리당 이인제 의원이다. 故 김영삼 전 대통령(YS)에 의해 등용된 그는 제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안양갑 선거구에 출마, 금배지를 달았다. 제14대 총선에서는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아 안양갑에서 재선했고, 1995년 6월에는 국회의원직에서 사퇴하고 첫 민선 경기도지사 선거에 도전해 당선된다.

정계 입문 이후 승승장구하며 신한국당(민주자유당의 후신)의 젊은 정치인으로 큰 기대를 모은 이 의원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초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압도적 우세로 진행됐던 대통령 후보 경선은 중반 이후 이 의원이 급속히 지지세를 확보하면서 시계제로의 형세로 흘러간다. 결국 그는 1차 투표에서 14.7%를 얻어 2위에 오르고 결선 투표 진출에 성공한다.

결선 투표에서 이 전 총재에게 패한 이 의원은 “세대교체만이 30년의 낡고 병든 3김 정치구조를 청산할 수 있다”며 신한국당을 탈당, 국민신당을 창당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그러나 이 전 총재, 故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엎치락뒤치락 하던 이 의원은 DJ와 이 전 총재에 밀려 19.2%의 득표율로 낙선한다. ‘저니맨’ 정치 역정의 시작이었다.

대선에서 패하고 1998년 제2회 지방선거에서도 성과를 내지 못한 이 의원은 야당인 한나라당에 비해 의석수가 턱없이 부족했던 DJ의 러브콜을 수락한다. 이로써 새천년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 당적을 갖게 된 그는 고향 충남에서 논산시·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증을 거머쥔다.

3선 국회의원이 된 이 의원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도전한다. 당시 이 의원은 여당에서 가장 인지도 높고 경쟁력 있는 후보였다. 하지만 막상 경선이 시작되자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이 의원은 고배를 마신다. 결국 이 의원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다시 한 번 당적을 바꾼다.

탄핵 정국에서 치러진 제17대 총선에서 이 의원은 여러 악재를 극복하고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지역구에서 당선, 4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탄핵에 가담했던 자유민주연합은 군소 정당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는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해 국민중심당에 입당했다가 2007년 민주당과 중도개혁통합신당이 합당해 창당한 민주당으로 복귀한다.

민주당으로 돌아간 이 의원은 1997년 이후 10년 만에 대통령 후보로 선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맞붙는다. 하지만 그는 0.7%를 획득하는 데 그쳤고,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합병한 통합민주당에 합류한다.

이 의원의 탈당사(脫黨史)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18대 총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이 공천을 허용하지 않자 그는 또다시 탈당을 감행, 무소속으로 충남 논산시·계룡시·금산군 지역구에 출마해 5선에 성공한다. 통합민주당·한나라당·자유선진당·친박연대 등 후보가 난립한 덕분에 27.7%의 득표율로 얻어낸 ‘행운’의 당선증이었다.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이 의원은 2011년 10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심대평 전 충남지사가 주도해 만든 자유선진당에 입당, 제19대 총선에서 6번째 금배지를 획득한다. 하지만 자유선진당은 5석을 획득하는 데 그쳤고, 이 의원은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개정하는 등 반등 기회를 잡으려 노력하다가 2012년 10월 새누리당으로 복귀한다. 현재 이 의원은 새누리당에서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며 일곱 번째 금배지에 도전하고 있다. 

▲ 니콜라 아넬카 ⓒ 뭄바이 시티 FC 공식 홈페이지

보기만 해도 숨가쁜 이 의원의 정치 역정처럼, 축구계에도 18년 동안 12번이나 소속 팀을 바꾼 선수가 있다. 아스널, 레알 마드리드, 첼시 등 유럽 유수의 클럽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니콜라 아넬카가 그 주인공이다.

‘스타 사관학교’로 불리는 클레르퐁텐 아카데미를 졸업한 아넬카는 1996년 만17세의 나이에 파리 생제르맹에서 데뷔했다. 10경기에서 1골을 넣는 데 그쳤으나 가능성을 보여준 그는 1997년 2월, 아르센 벵거 감독의 부름을 받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널에 입단한다. 입단 당시 벵거 감독은 아넬카를 ‘내가 발견한 재능 중 최고’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아스널에서 아넬카는 화려하게 비상한다. 1997-98시즌 소속 팀이 프리미어리그와 FA컵을 석권하는 데 힘을 보태더니, 1998-99시즌에는 PFA 올해의 영 플레이어 상을 수상하며 유럽이 주목하는 스타로 떠오른다. 프랑스 국가대표팀에도 승선, 맹활약을 펼친 아넬카는 아스널과 프랑스 대표팀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1999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꿈의 구단’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레알 마드리드가 아넬카를 영입하기 위해 아스널에 지불한 이적료는 2230만 파운드(한화 약 390억 원)였다. 레알 마드리드가 얼마나 큰 기대를 걸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그러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훈련 참가 거부로 징계를 받으며 ‘공공의 적’이 된 아넬카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저니맨’의 길로 들어선다.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의 신뢰를 잃은 그는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한지 한 시즌 만에 다시 유니폼을 갈아입는다. 이번 팀은 파리 생제르맹. 아넬카가 데뷔했던 ‘고향 클럽’이었다. 파리 생제르맹에서 39경기 10골을 넣으며 부활을 알린 그는 2002년 1월, 리버풀로 임대 이적하며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한다. 아넬카는 리버풀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리버풀을 준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제라르 울리에 감독은 완전 영입을 포기한다. 그렇게 아넬카의 다섯 번째 팀 생활도 막을 내린다.

리버풀로의 이적에 실패했지만 잉글랜드에 계속 남기를 원했던 아넬카는 맨체스터 시티 입단을 결정한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이었던 케빈 키건은 1300만 파운드의 클럽 역사상 최고 이적료에 아넬카를 영입했고, 아넬카는 89경기에서 37골을 터뜨리며 키건 감독의 기대에 부응한다.

하지만 맨체스터 생활도 길지 않았다. 2005년 1월 겨울 이적 시장에서 그는 7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남기고 터키 페네르바체로 떠난다. 터키에서도 재능을 발휘한 아넬카는 이적 직후 맹활약을 펼치며 페네르바체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다음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밟기도 했다.

2006년, 이청용이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활약하기도 했던 팀인 볼튼으로 복귀, 잉글랜드로 돌아온 아넬카는 2008년까지 두 시즌 동안 53경기에서 무려 21골을 넣는 맹활약을 펼친다. 프리미어리그 유수의 빅 클럽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지사. 결국 그는 2008년 1월 11일, 볼튼에 15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안겨주고 첼시로 이적한다.

지금까지 한 팀에서 3년 이상 머문 적이 없었던 아넬카는 첼시에서 무려 4년을 뛰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초반만 해도 아브람 그랜트 감독,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과 불화를 겪으며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으나, 거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한 후 디디에 드록바와의 호흡이 맞아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기량을 회복한다. 08/09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기에 이른다.

어느덧 30대를 넘긴 아넬카는 2011년 12월, 다시 한 번 유니폼을 갈아입는다. 행선지는 상하이 선화, 중국 슈퍼리그 소속 팀이었다. 그러나 상하이 선화는 아넬카의 높은 연봉을 감당하지 못했고,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임대 이적해 11번째 유니폼을 맞이한다.

하지만 빅 리그에서 활약하기에는 아넬카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유벤투스에서 세 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친 그는 잉글랜드의 웨스트 브롬위치로 이적해 12경기에 출전, 마지막으로 잉글랜드 팬들에게 인사를 했고, 2014년 인도의 뭄바이 시티의 감독 겸 선수 제의를 받아들이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중이다.

이인제 의원의 당적변경

통일민주당 – 민주자유당 – 신한국당 – 국민신당 – 새정치국민회의 – 새천년민주당 – 자유민주연합 – 국민중심당 – 민주당 – 통합민주당 – 무소속 – 자유선진당 – 선진통일당 – 새누리당

니콜라 아넬카의 이적

파리 생제르맹 – 아스널 – 레알 마드리드 – 파리 생제르맹 – 리버풀 – 맨체스터 시티 – 페네르바체 – 볼튼 – 첼시 – 상하이 선화 – 유벤투스 – 웨스트 브롬위치 – 뭄바이 시티

담당업무 : 정치부 기자입니다 (대통령실 출입)
좌우명 : 인생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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