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흐름 거부한 레스터 시티의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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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흐름 거부한 레스터 시티의 우승
  • 정진호 기자
  • 승인 2016.05.03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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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 정진호 기자) 

▲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레스터 시티 FC 감독 ⓒ 레스터 시티 공식 홈페이지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고의 이변이 일어났다. 1884년 창단 후 단 한 번의 우승 경험도 없는 레스터 시티가 프리미어리그 패자(霸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불과 두 시즌 전까지만 해도 2부 리그 팀이었던, 지난 시즌에도 14위에 그쳤던 팀이기에 더욱 놀랍다.

레스터의 이번 우승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시대의 흐름을 거부한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우선 레스터는 ‘빅 클럽’이 아니다. 모든 면에서 산업화가 이뤄진 현대 축구는 말 그대로 ‘쩐의 전쟁’이다. 스타 선수 한 명의 몸값이 1000억 원을 상회하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레알 마드리드나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같은 팀들은 선수 영입에만 수천억 원을 투자한다. 돈 없이는 좋은 팀을 만들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하지만 레스터는 이런 흐름을 역행했다. 지난 여름이적시장에서 레스터가 지출한 이적료는 한화로 약 630억 원이었다.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3000억 원이 넘는 이적료를 뿌렸음을 감안하면 결코 많은 액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은골로 캉테, 로베르트 후트 등 요소요소에 중요한 보강을 해내면서 완성도 높은 선수단을 만들었고,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쥐었다. ‘돈’이 전부가 아님을 몸소 증명한 것이다.

전술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2008년 스페인이 우승을 차지하고, 08/09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바르셀로나가 트로피를 들어 올린 후, 현대 축구는 ‘점유율 축구’가 대세가 됐다. 점유율 축구란 자기 진영에서부터 짧은 패스를 통해 안정적으로 볼을 소유하고, 상대를 코너에 몰아붙인 뒤 파이널 서드(그라운드를 종으로 3등분했을 때, 상대 골문 근처 지역)에서 창의적인 플레이로 득점 기회를 창출하는 축구를 뜻한다. 볼 소유권을 자주 잃을수록 상대에게 많은 공격 기회를 내준다는 단순한 논리구조로부터 시작된 점유율 축구는 2008년 이후 전 세계 축구 감독들의 지향점이 돼왔다.

그러나 레스터는 이런 유행을 과감히 거부했다. 레스터에는 상대의 압박 수비를 뚫고 동료에게 안정적으로 패스를 전달할 수 있는 기술적인 선수가 많지 않은 반면, 힘 있고 활동량이 풍부하며 시원시원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소위 ‘잉글랜드스러운’ 선수들이 많았다. 백전노장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은 레스터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분석해 무리한 점유율 축구보다는 강한 압박에 이은 빠른 역습으로 수비와 공격을 연계하는 쪽으로 팀 컬러를 구축했다.

실제로 레스터는 4-4-2 포메이션을 바탕으로 포백과 미드필더 네 명이 촘촘한 간격을 유지하며 상대에게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압박 능력을 선보였고, 볼을 탈취한 후 제이미 바디와 리야드 마레즈, 마크 알브라이튼, 오카자키 신지가 좌우 측면으로 퍼져 뛰어나가면 다니엘 드링크워터와 은골로 캉테가 패스를 공급해 역습 속도를 살리는 역습 축구를 구사했다. 풍부한 활동량을 기반으로 한 강한 압박과 상대 배후 공간을 노리는 역습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뤄낸 것이다. 4-4-2 포메이션과 역습 축구로 무장한 팀의 우승은 유럽 축구계에서는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혹자들의 말대로, 어떤 의미에서 레스터의 진짜 도전은 다음 시즌부터일지 모른다. 하지만 다음 시즌의 성적과는 무관하게, 빅 클럽의 1/3도 안 되는 이적 자금과 구식으로 간주됐던 전술을 가지고 영광의 자리에 올라선 레스터의 ‘기적’은 역사에 아로새겨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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